침례요한
누가복음 7:11-35절 : 그 후에 예수께서 나인이란 성으로 가실새 제자와 많은 무리가 동행하더니
12) 성문에 가까이 이르실 때에 사람들이 한 죽은 자를 메고 나오니 이는 한 어머니의 독자요 그의 어머니는 과부라 그 성의 많은 사람도 그와 함께 나오거늘
13) 주께서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울지 말라 하시고
14) 가까이 가서 그 관에 손을 대시니 멘 자들이 서는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하시매
15) 죽었던 자가 일어나 앉고 말도 하거늘 예수께서 그를 어머니에게 주시니
16) 모든 사람이 두려워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이르되 큰 선지자가 우리 가운데 일어나셨다 하고 또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셨다 하더라
17) 예수께 대한 이 소문이 온 유대와 사방에 두루 퍼지니라
18) 요한의 제자들이 이 모든 일을 그에게 알리니
19) 요한이 그 제자 중 둘을 불러 주께 보내어 이르되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하라 하매
20) 그들이 예수께 나아가 이르되 침례 요한이 우리를 보내어 당신께 여쭈어 보라고 하기를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하더이다 하니
21) 마침 그 때에 예수께서 질병과 고통과 및 악귀 들린 자를 많이 고치시며 또 많은 맹인을 보게 하신지라
22)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가서 보고 들은 것을 요한에게 알리되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먹은 사람이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23)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하시니라
24) 요한이 보낸 자가 떠난 후에 예수께서 무리에게 요한에 대하여 말씀하시되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25) 그러면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부드러운 옷 입은 사람이냐 보라 화려한 옷을 입고 사치하게 지내는 자는 왕궁에 있느니라
26) 그러면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선지자냐 옳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보다도 훌륭한 자니라
27) 기록된 바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그가 네 앞에서 네 길을 준비하리라 한 것이 이 사람에 대한 말씀이라
28)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요한보다 큰 자가 없도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그보다 크니라 하시니
29) 모든 백성과 세리들은 이미 요한의 침례를 받은지라 이 말씀을 듣고 하나님을 의롭다 하되
30) 바리새인과 율법교사들은 그의 침례를 받지 아니함으로 그들 자신을 위한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니라
31) 또 이르시되 이 세대의 사람을 무엇으로 비유할까 무엇과 같은가
32) 비유하건대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 서로 불러 이르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하여도 너희가 울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
33) 침례 요한이 와서 떡도 먹지 아니하며 포도주도 마시지 아니하매 너희 말이 귀신이 들렸다 하더니
34) 인자는 와서 먹고 마시매 너희 말이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 하니
35) 지혜는 자기의 모든 자녀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느니라.
예수, 가버나움에서 백부장의 종을 고치신 다음날, 그곳에서 서남 약 10리(한국 100리)되는 나인의 땅에 내려가셨다.
그런데 성문에 가까이 이르신 때, 보라, 판자 위에 운반되는 사인 있었다.
'그 어머니는 과부였고, 이는 외아들이라'(12일역)고.
인생 동정해야 할 최대불행이다.
그리고 성읍 사람들 모두 깊이 동정하면서도,
이것을 표시할 길을 알지 못하고,
다만 그 뒤를 따라 가는 것이다. 예수도 또한 이것을 보고 측은해 하셨다.
그래 말씀하셨다.
'울지 말라'(13)고.
이것은 누구나가 발할 수 있는 말이다.
하지만, 우리들은 울지 말라는 길 외에, 어떻게 할 찌를 알지 못한다.
우리들의 동정은 말에 그친다.
일찍이 어떤 사람이,
죽은 영아(a baby)를 석가 앞에 데리고 가서, 그 회복을 청했다.
석가(2권 282역주) 말하기를 '겨자를 붙이라. 그리하면 회복될 것이다.
다만 아직 한 번도 죽은 사람을 낸 일없는 집의 겨자여야 한다'고.
여인은 이것을 구하려 했으나 종내 얻지 못했다.
이에 석가는 또 말하기를 '세상에 죽은 사람 없는 집 없다.
모든 사람이 죽듯, 네 아이도 죽은 것일 뿐'이라고.
그리하여 여인의 깨달음은 열렸던 것이다.
하지만 예수는 여기서 그칠 수는 없다.
예수의 동정은 우리의 동정과 다르다.
그는 말만으로서 그치지 않는 것이다.
그는 울지 말라 하시고, 곧 가까이 가셔서.
그 관(a coffin)에 손을 대시니. 메고 가던 사람들이 곧 멈추고 섰다.
예수 말씀하시기를
'일어나라'(14)
죽은 자는 곧 일어나, 그리고 말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어머니의 기쁨이야, 어떠했으랴!
사람들은 모두 두려워하며, 하나님을 찬양하여 말했다.
'대예언자가 우리 중에 일어났도다. 하나님께서 그 백성을 돌보셨도다'(16일역)라고.
기사는 간단해도 사실 그대로로서, 마치 명화가의 걸작같이,
일획(일점)의 무익한 것 없다.
이는 실로 누가 독특의 필치이다.
어찌하여 예수는 지금도 그렇게 하여 사자를 부활케 하시지 않는가는,
종종 되풀이되는 의문이다. 하지만 그 이유는 명백하다.
그는 지금은 사자의 갱생(rebirth) 이상의 은혜로써 우리를 위로하시는 때문이다.
그의 씻지 못할 눈물이란 없다. 그는 긍휼과 함께 능력을 주신다.
그의 동정을 받아, 우리들은 모든 불행(재난)에 이겨 낼 수가 있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 기적에 특별한 한 가지 일은,
신앙을 조건으로 하지 않은 일이다.
이는 신학자에게 장애이다. 그들은 말한다.
'하나님이라 해도 신앙 없는 자를 구조하지 않으신다'고.
하지만.
'하늘 아버지는 그 해를 선한 자에게도 악한 자에게도 비추시고, 비를 의로운 자에게도 의롭지 않은 자에게도 내려주신다'(마태복음 5:45일역)
과부가 그 외아들을 잃은 것을 보고 주의 깊은 동정은
왕연(다루)히 용솟음치지 않을 수 없다.
불신의 집에도 이상(비상)한 재화 임하고 비통의 소리 오를 때는,
주 이것을 본체만체 않으신다.
반드시 거기 서서 힘 있는 동정을 경주하시는 것이다.
이는 실로 인생의 대위자이다.
그 때문에 어떤 신학자는 낭패할지 모른다.
하지만 하나님의 사랑은 이로 말미암아 한층 발양(exultation)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인의 기적은 이것을 하나의 독립된 기사로 보아 본시 감사해야 할 복음이다.
하지만, 누가가, 이것을 여기에 삽입한 주요한 목적은 절로 다른데 있었다.
이것을, 이하에 기록되어 있는 침례 요한에 관한 기사와 관련시킬 때
비로소 그 의리를 해득할 수가 있다.
요한은 앞서 요단강가의 땅에 와서 회개의 침례를 선전(전파)하여 외쳐 말했다.
'나는 물로서 침례를 너희에게 준다. 나보다 힘 있는 이가 오시리라. 나는 그의 신 끈을 풀기도 족하지 못하다…'(누가복음 3:16)고.
또 말했다.
'세상 죄를 진 하나님의 어린양을 보라'(요한복음 1:29)고.
그는 그렇게 하여 예수를 세상에 소개했던 것이다.
그 후, 그는 정의를 부르짖었기 때문에 폭려(폭학 a prison)에 매인바 된 몸이다.
그런데 그는 옥중에서 두 제자를 예수에게로 보내어.
'오실 이는 당신입니까?
아직 우리들은 달리 기다려야 합니까?'(마태복음 11:3일역)고 묻게 했던 것이다.
(분명히) 알 수 없다. 앞서 자기가 소개한 구주에 대하여,
어쩌면 그러한 의혹을 가지기에 이르렀는지?
그 하나는,
그의 구주관의 그릇됨에서였다.
그는 예수께서 구주이심을 믿는 까닭에,
예수로 말미암아 대 혁명의 실현을 기대했던 것이다.
예수로 말미암아 종교계의 죄악은 일소되고,
예수로 말미암아 정치계의 압제는 격양(격퇴 repulse)되고,
새로운 하나님의 나라는 곧 건설될 것이라고.
이는 침례요한의 희망이었다.
그런데 예수께서 하시는 일은 전연 그의 예기에 어긋났다.
옥중 그에게 알려지는 보도는,
사회의 혁신이 아니라 미미한 소자선, 소구제의 부류에 지나지 않았다.
왈, 예수는 갈릴리 호숫가에서 무지한 어민을 거느리고 있다고.
왈, 세리를 이끌어 그 도당으로 하셨다고.
왈, 이방 군인의 종을 고치셨다고.
왈, 나인의 과부의 외아들을 살리셨다고.
그리고 정권은 의연히 악자(惡子)의 손에 있고,
예루살렘의 세력은 의연히 위선가의 장중에 돌아가고,
사회는 의연하여 암흑리에 방황하는 것 아닌가?
저 사소 (petty)한 소민위해 하찮은 긍휼(자비)을 베푼다한들 무슨 소용이랴?
어찌하여 곧 그 근원에 착수하지 않는가?
어찌하여 당당히 혁명의 기치(기 a flag)를 휘날리지 않는가?
그러한 것은 이른 바 우국의 지사의 소론으로서,
또 실로 침례 요한의 감상이었다.
그러므로 그는 잠잠할 수 없어, 사람을 보내어 말하게 했던 것이다.
'오실 이는 과연 당신입니까? 나는 그렇게 믿을 수 없습니다'고.
그 이는,
자기의 경우에 대한 예수의 태도였다.
요한이 옥에 갇힌 것은, 본래 죄가 있어서가 아니라,
하나는 폭군 헤롯의 죄를 책했기 때문이다.
그는 전적으로 정의 위한 희생으로 된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만약 사람을 구하려면 먼저 그를 구해야 할 것 아닌가?
그런데 곳곳(소재)의 약자를 구하면서, 다만 요한을 모르는 것처럼,
그 위해 그 기적을 하나도 쓰려하지 않는 것이다.
예수는 소재자인 자기를 잊은 것일까?
당초 그는 진정한 구주는 아닌 것이었을가고?
이런 종류의 의문도 확실히 요한을 괴롭혔으리라.
이상은 행해지지 않고 은혜는 몸에 미치지 않는다.
요한의 흉중(심중) 민민(난처)의 정 살펴 알만하다.
하지만 예수는 그 사자의 안전에서 몇 가지의 소자선을 행하고,
그리고 말씀하셨다.
'너희가 본 바, 들은 바를 요한에게 가서 알리라. 그것은 소경은 보고, 절뚝발이는 걷고, 나자(나병환자)는 깨끗해지고, 귀머거리는 듣고, 사자는 부활하고, 빈자는 복음을 듣게 되었다. 무릇 나로 인하여 실족하지 않는 자는 복이다'(22-23일역)라고.
세상을 구원함의 길은 과연 어느 것인가?
기고당당(위세당당), 성명(명성 fame)을 크게 하고 위용(위엄 dignified appearance)을 대단히 하여 정치와 무력으로서 일거사회의 혁신을 기도하는 것일까?
혹은 옛 고요한 복음에 의해,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노약부녀의 영혼을 고쳐야 할 것인가?
전자로서 하는 것이 아니면 구세의 기대는 할 수 없다는 것은 요한이었다.
후자로서 하여 비로소 참된 구제(구원)를 실현시킬 수 있다는 것은 예수였다.
예수 대 요한,
그 정신에 천지의 차가 있다.
그는 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다.
요한은 특히 사람이었다.
예수는 요한을 아셨지만,
요한은 예수를 알지 못했다.
그는 그 사자에게서 전술의 회답에 접할 때,
아마도 이것을 해득치 못했으리라.
그리고 예수께서 의연(여전)히 그를 구조하지 않음을 의아히 여겼으리라.
그리하여 마침내 음부가 일야의 흥을 채우기 위해
의인 요한의 목을 넘겨줄 때는 왔던 것이다.
하지만, 이 한 가지 사실 가운데 아주 심각한 교훈이 있다.
그것은 이 세상이 얼마나 가치 없는 것인지를 통절하게 표시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모두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바 일이다.
이제 욕리가 와서 바야흐로 그의 목을 구하려는 때,
요한의 눈은 아마도 열렸으리라.
그리하여
'여호와의 이름은 찬미 할 바로다'라고 찬양하며 고요히 그 요구에 응했으리라.
요한의 사자에 대한 예수의 대답은 일견 냉담한 것이었다.
하지만, 사자 떠나간 후, 예수는 사람들에 대하여, 요한을 위해 대 변호를 하셨다.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들에 나갔던가?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즉 무의미한 것을 보려고 갔던가?
혹은 미복을 입은 사람이냐?
고위고관의 무리를 보고자 하면 정계관계에 나가는 것이 낫다.
그러면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예언자인가? 옳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요한은 예언자 이상의 사람이다. 예언자에 의해 예언된 사람이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여인이 낳은 자중, 아직 침례 요한보다 큰 자 없다'(25-26참조)고.
이는 실로 이상한 동정의 말씀이다.
이것을 직접으로 사자에 대해서 한말과 대비하여,
그 사이에 무량의 맛있음을 기억하지 않을 수 없다.
요한이 만약 이 말을 들었을 것인가?
그는 반드시 감격을 어찌하지 못하여 용사의 눈물로 목메어 흐느끼며 울었으리라.
그렇지만, 예수는 아직 한마디 부가해야 할 것을 가지고 있었다. 즉
'그렇다고는 하나 하나님 나라의 지극히 작은 자도 그보다는 큰 것이다'(28일역)라고.
요한은 여인이 낳은 자중의 최대자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영에 의해 태어난 자는 더욱 그보다도 큰 것이라고.
마치 후가구(부악-2권 277역주)의 크기보다도 그 산정에 핀 한포기의 백합화는 보다 귀하다는 것과도 같은 것이다.
은혜의 자식은 정의의 자식보다도 더 큰 것이다.
요한 위대하다 해도, 그도 역시 자기의 죄를 회개하고
주 예수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아들로 됨의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최후에 예수는 자기 및 요한에 대한 이 세상의 태도에 대하여 일언하시었다.
그는 이것을 무엇에 비교하고, 또 무엇으로 비유할까로 반복고려 끝에,
마침내 가장 절실한 비유에 생각이 미쳤다.
즉 당시의 유대에 있어서의 소아의 풍습으로서,
피차 2단으로 나뉘어, 각각 장례 및 혼례의 유희를 했던 것이다.
그는 이 예를 취하여 말씀하셨다.
'어린아이, 장터에 앉아, 서로 부르며, 우리가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았다. 비가(애곡)해도 너희가 울지 않는다는 것과 같다.'(32일역)고.
비가(悲歌)를 부른 것은 요한이다.
즐거움(기쁨)의 악곡을 노래한 것은 예수이다.
그런데 세상은 이자 어느 것에도 응하지 않고,
저것으로서 하면 이것이라 하고, 이것으로서 하면 저것이라고, 한다.
실로 어거(drive)할 수 없는 백성이다. 하지만 속담에 말한다.
'지혜는 모든 지혜의 자식에 의해 옳은 것으로 된다.'(35일역)고.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는, 요한을 따름에 있어서 비조(悲調)로서 하고,
예수에게 따르는데 있어서 환희로써 하는 것이다. (4월 15일 등정무필기)
*내촌감삼의 (1917년 5월 '성서지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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