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인성 과부의 아들을 살리심
성 경: [눅 7:11-17] 그 후에 예수께서 나인이란 성으로 가실새 제자와 많은 무리가 동행하더니
12) 성문에 가까이 이르실 때에 사람들이 한 죽은 자를 메고 나오니 이는 한 어머니의 독자요 그의 어머니는 과부라 그 성의 많은 사람도 그와 함께 나오거늘
13) 주께서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울지 말라 하시고
14) 가까이 가서 그 관에 손을 대시니 멘 자들이 서는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하시매
15) 죽었던 자가 일어나 앉고 말도 하거늘 예수께서 그를 어머니에게 주시니
16) 모든 사람이 두려워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이르되 큰 선지자가 우리 가운데 일어나셨다 하고 또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셨다 하더라
17) 예수께 대한 이 소문이 온 유대와 사방에 두루 퍼지니라.
[눅 7:11] 그 후에 예수께서 나인이란 성으로 가실새 제자와 많은 무리가 동행하더니
▶ 나인이란 성 - '나인'(Nain)은 '즐거움'이란 뜻이며 성경에서 오직 이곳에서만 나타난다.
이 성의 위치는 나사렛에서 남동쪽으로 약 10km 떨어진 수넴(Shunem) 지방과 모레 언덕(the Hill of Moreh) 사이의 작은 헬몬산(little Hermon)의 비탈에 위치하고 가버나움에서는 남서쪽으로 약 40km쯤 되는 지점에 위치한다.
이 성에서 엔돌(Endor) 방향으로는 약 10분쯤 거리에 묘지가 있다.
한편 '나인' 성은 오늘날까지 '네인'(Nein)으로 불리우는 작은 마을로 현존한다.
그 당시 이곳으로 올라가자면 좁은 급경사로 이루어진 지대를 통과해야만 했는데,
그 길 양편에는 무덤 같은 굴들이 있었다고 전한다.
바로 이 지점 부근에서 예수께서는 나인성 과부 아들의 장례행렬(葬禮行列)과 마주치셨다.
[눅 7:12] 성문에 가까이 이르실 때에 사람들이 한 죽은 자를 메고 나오니 이는 한 어머니의 독자요 그의 어머니는 과부라 그 성의 많은 사람도 그와 함께 나오거늘
▶ 성문에 가까이 이르실 때에 - 이 성은 성벽으로 둘러 싸여 있었고 벽에 나 있는 큰 문을 통해 들어갔다.
보통 성문 근처는 성 주민들의 집회 장소로서 정규적인 화합이 이루어지는 장소이기도 했다.
일반적으로 유대인들은 사람이 죽으면 죽은 당일에 장례를 치렀다고 한다.
그리고 묘지는 보통 성 밖에 있는 것이 일반적이다.
따라서 지금 성문 근처에서 모였던 장례 행렬이 성 밖의 묘지를 향하여
가고 있을 때 예수의 일행은 성문을 향해 들어가고 있었다.
▶ 사람들이 - 이스라엘에서는 가장 가난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장례시에 두 명 이상의 피리부는 사람과 한 명 이상의 호곡(號哭)할 여자를 고용했다고 한다.
그러므로 여기서 '사람들'이란 단순히 시체를 직접 운구(運柩)하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곡을 위해 고용된 사람들까지 포함된 것이다.
▶ 이는 한 어머니의 독자요 그의 어머니는 과부라 - 여인이 과부라는 사실은 그 가정의 비참한 경제생활을 입증한다.
1세기 당시에 여자가 자기의 생계를 꾸려 나가는 것은 극히 어려운 일이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어려운 여건 속에서 마지막 소망이었던 외아들이 죽었다는 것은 엄청난 상심에 빠졌음을 나타낸다.
한편 이 성의 주민들은 그전에도 이미 이 여인을 위해 죽은 사람을 한번 운반해 주었을 것이다.
그 죽은 사람은 물론 이 과부의 남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 그 여인은 하나밖에 없는 장성한 아들을 장사지내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독자요', '과부라'라는 말은
이 여인의 참담한 심경을 더욱 강조하며 잘 묘사하는 표현이라 할 수 있다.
여기서 성의 많은 사람이 장례 행렬에 동참했다는 것은
그 동네 사람들이 과부에게 참된 동정을 표하고 있었음을 뜻한다.
[눅 7:13] 주께서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울지 말라 하시고
▶ 주께서 - 여기 사용된 '주'(主)라는 칭호는 예수께서 죽음을 다스리시는 권세있는 '생명의 주'이심을 나타낸다.
▶ 과부를 보시고 - 본문은 예수께 그 상황을 알리거나 무엇인가를 부탁하는 사람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는다.
다만 예수께서 스스로 비통해하는 여인에게 위로의 눈길을 보내고 계신다.
▶ 불쌍히 여기사 - 예수께서 이적을 행하실 때 그 원동력은 사랑과 동정이었다.
(마 14:14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그 중에 있는 병자를 고쳐 주시니라;
15:32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내가 무리를 불쌍히 여기노라 그들이 나와 함께 있은 지 이미 사흘이매 먹을 것이 없도다 길에서 기진할까 하여 굶겨 보내지 못하겠노라;
20:34 예수께서 불쌍히 여기사 그들의 눈을 만지시니 곧 보게 되어 그들이 예수를 따르니라).
불쌍히 여기사의 헬라어 '스플랑크니조마이'의 원래 뜻은 '창자까지 뒤틀려지는 것'을 뜻한다.
즉 과부의 슬픔을 목격한 예수께서는 속 내장까지 뒤틀리는 듯한 비통함과 연민을 느끼셨다는 의미다.
그러므로 이 구절은 예수께서 과부의 슬픔을 보시고 얼마나 큰 동정과 사랑을 보내셨는가를 보여 준다.
또한 이러한 긍휼은 본 이적의 동기였다고 할 수 있다.
예수께서는 사람들 속에 역사하는 믿음을 보시고 이적적 은혜를 베풀어 주기도 했으나, 본문의 경우처럼 믿음의 유무를 보기 전에 고통당하는 인생에 대한 긍휼의 동기에서 먼저 은혜를 베푸신 경우도 종종 있었다.
(마 15:32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내가 무리를 불쌍히 여기노라 그들이 나와 함께 있은 지 이미 사흘이매 먹을 것이 없도다 길에서 기진할까 하여 굶겨 보내지 못하겠노라;
20:34 예수께서 불쌍히 여기사 그들의 눈을 만지시니 곧 보게 되어 그들이 예수를 따르니라;
막 1:34 예수께서 각종 병이 든 많은 사람을 고치시며 많은 귀신을 내쫓으시되 귀신이 자기를 알므로 그 말하는 것을 허락하지 아니하시니라;
8:2 내가 무리를 불쌍히 여기노라 그들이 나와 함께 있은 지 이미 사흘이 지났으나 먹을 것이 없도다).
그리고 이는 곧 죄많은 인생에 대한 하나님의 주도적이고도 무조건적인 사랑을 보여주는 구체적 실례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아직 죄인이요 원수 된 상태였을 때, 독생자 예수를 대신 죽으시게끔 하심으로써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확정 지으신 것이다.
▶ 울지 말라(메 클라이에) - 현재 명령법으로 '울음을 그치라'는 뜻이다.
'울다'는 동사는 두 가지가 있는데 '클라이오'와 '다크뤼오'이다.
전자는 '흐느껴 우는 것'을 의미하고,
후자는 '소리없이 눈물을 흘리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과부는 지금 독자의 죽음에 슬퍼하고 비통해 하면서 매우 흐느끼며 울고 있었음에 분명하다.
[눅 7:14] 가까이 가서 그 관에 손을 대시니 멘 자들이 서는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하시매
▶ 가까이 가서 그 관에 손을 대시니 - 율법에 의하면 죽은 자의 관에 손이 닿으면 부정한 것으로 간주되었다.
(레 22:4 아론의 자손 중 나병 환자나 유출병자는 그가 정결하기 전에는 그 성물을 먹지 말 것이요 시체의 부정에 접촉된 자나 설정한 자나;
민 19:11 사람의 시체를 만진 자는 이레 동안 부정하리니).
왜냐하면 죽음은 곧 죄의 결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사랑의 법으로 이 율법을 초월하셨다.
여기서 '관'(소로스)은 호머(Homer)의 글에서 나타난 바대로 원래 죽은 자의
유골이나 재를 넣어 두는 항아리를 의미했으나
나중에 시체를 넣는 함을 뜻하게 되었다.
유대인의 관습에 의하면 시체는 세마포로 감싸고 얼굴은 손수건이나 수다리움(sudarium)으로 덮어서 뚜껑이 없는 관에 넣었다(Josephus).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는 시체에 대한 고정 관념에도 불구하고
예수께서 관에 손을 대셨음은 과부의 슬픔을 자신의 슬픔으로 여기시고
과부를 불쌍히 여기시는 예수의 사랑이
이런 율법의 문자적 이해를 뛰어넘었음을 뜻한다.
▶ 일어나라 - 예수께서는 지금 죽어 있는 청년에게 마치 그가 듣고 순종할 수 있는 것처럼, 즉 지금 잠자고 있는 사람에게 말씀하시듯 말씀하신다.
예수께서 죽은 자를 살리신 기사는 본문을 포함해서 세 번 나타나는 데
그때마다 이렇게 말씀하셨다.
(8:54 예수께서 아이의 손을 잡고 불러 이르시되 아이야 일어나라 하시니;
요 11:43 이 말씀을 하시고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 부르시니).
성경의 몇몇 인물들이 죽은 자를 살렸던 경험이 있지만
(왕상 17:21 그 아이 위에 몸을 세 번 펴서 엎드리고 여호와께 부르짖어 이르되 내 하나님 여호와여 원하건대 이 아이의 혼으로 그의 몸에 돌아오게 하옵소서 하니;
왕하 4:35 엘리사가 내려서 집 안에서 한 번 이리 저리 다니고 다시 아이 위에 올라 엎드리니 아이가 일곱 번 재채기 하고 눈을 뜨는지라;
행 9:40 그 때에 다메섹에 아나니아라 하는 제자가 있더니 주께서 환상 중에 불러 이르시되 아나니아야 하시거늘 대답하되 주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니;
20:10 바울이 내려가서 그 위에 엎드려 그 몸을 안고 말하되 떠들지 말라 생명이 그에게 있다 하고)
그들은 모두 하나님의 권능을 힘입어 그러한 이적을 행했다.
그러나 여기서 예수께서는 자신의 권위를 직접 사용하시어 '일어나라'고 명령하신다.
이는 예수께서 음부의 열쇠를 지니고서 생명과 죽음을 다스리시는 전능자 하나님이심을 증거하는 단적 실례이다.
(롬 8:2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고후 1:10 그가 이같이 큰 사망에서 우리를 건지셨고 또 건지실 것이며 이 후에도 건지시기를 그에게 바라노라;
딤후 1:10 이제는 우리 구주 그리스도 예수의 나타나심으로 말미암아 나타났으니 그는 사망을 폐하시고 복음으로써 생명과 썩지 아니할 것을 드러내신지라).
[눅 7:15] 죽었던 자가 일어나 앉고 말도 하거늘 예수께서 그를 어머니에게 주시니
▶ 죽었던 자가 일어나 앉고 말도 하거늘 - 누가는 죽었던 자가 다시 살아났다는 증거로 '일어 앉고 말도 하였다'는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우리는 여기서 종말론적인 한 암시를 볼 수가 있다.
즉 세상 끝날 성도의 부활시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모든 사람들이
부활과 함께 새 생명을 얻을 것에 대한 간접적인 암시를 보게 된다.
▶ 예수께서 그를 어머니에게 주시니 - 그 과부를 향한 예수의 사랑과 동정이 얼마나 크셨는지 분명히 나타난다.
이러한 행동은 왕상 17:23의 엘리야의 그것과 유사하다.
(왕상 17:23 엘리야가 그 아이를 안고 다락에서 방으로 내려가서 그의 어머니에게 주며 이르되 보라 네 아들이 살아났느니라)
예수는 소생한 청년에게 자기를 따르라고 하는 대신 그 불쌍한 여인을 잘 봉양하도록 당부하셨을 것이다.
이제 이 과부에게는 더 이상의 비애와 고통이 없고 아들을 다시 찾은 기쁨과 자비로우신 예수를 만난 희열로 가득했을 것이다.
[눅 7:16] 모든 사람이 두려워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이르되 큰 선지자가 우리 가운데 일어나셨다 하고 또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셨다 하더라
▶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이르되 - 누가는 또다시 백성들의 반응을 기록하고 있다.
(5:26 모든 사람이 놀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심히 두려워하여 이르되 오늘 우리가 놀라운 일을 보았다 하니라;
18:43 곧 보게 되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예수를 따르니 백성이 다 이를 보고 하나님을 찬양하니라;
23:47 백부장이 그 된 일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이르되 이 사람은 정녕 의인이었도다 하고).
무리들은 이 이적이 하나님의 권세로 이루어진줄을 믿었으므로 마땅히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 것이다.
'영광을 돌려'는 예수의 크신 권능에 압도당한 무리들이 계속적으로 하나님을 찬양한 사실을 나타낸다.
▶ 큰 선지자가 우리 가운데 일어나셨다 - 전에는 보지 못한 큰 이적을 목격한 무리들은 예수를 한 위대한 선지자로 보았고 이런 선지자를 보내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예수께 대한 이 칭호가 비록 적합한 것이 아니라 할지라도 이는 그 무리들이 사람에게 붙일 수있는 최대의 경칭이었을 것이다.
그들이 예수께 대해서 선지자라는 칭호를 사용한
직접적인 동기는 엘리야나 엘리사와 같은 구약의 선지자가
행한 일과 같은 일을 행하신 데 있었을 것이다.
(왕상 17:21 그 아이 위에 몸을 세 번 펴서 엎드리고 여호와께 부르짖어 이르되 내 하나님 여호와여 원하건대 이 아이의 혼으로 그의 몸에 돌아오게 하옵소서 하니;
왕하 4:35 엘리사가 내려서 집 안에서 한 번 이리 저리 다니고 다시 아이 위에 올라 엎드리니 아이가 일곱 번 재채기 하고 눈을 뜨는지라)
무리들은 말라기 선지자 이후로부터 약4세기 동안 선지자의 음성을 듣지 못하여 하나님이 그들을 버리신 것이 아닌가하고 생각했으나 예수께서 베푸신 이적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다시 그들에게 관심을 기울이시기 시작했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아울러 백성들의 이러한 모습은 그들이 로마의 압제로부터 자신들을 구원해 줄 메시야를 얼마나 고대하고 있었는지 잘 보여준다.
당시부터 그들은 예수를 메시야로 인식하기 시작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들의 메시야관은 현세적이며 또한 민족주의적인 차원을
넘어서지 못한 데에 큰 문제가 있었다.
▶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셨다 하더라 - 이 말은 구약에서 여러 번 나오며,
(룻 1:6 그 여인이 모압 지방에서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시사 그들에게 양식을 주셨다 함을 듣고 이에 두 며느리와 함께 일어나 모압 지방에서 돌아오려 하여;
삼상 2:21 여호와께서 한나를 돌보시사 그로 하여금 임신하여 세 아들과 두 딸을 낳게 하셨고 아이 사무엘은 여호와 앞에서 자라니라)
축복을 나타낼 때 사용되기도 하고 또한 심판을 나타낼 때에도 사용되었다.
원래 '돌아보셨다'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의사가 왕진하여 환자를 치료할 때 쓰는 동사 '에피스켑토마이'다.
따라서 이 말은 하나님이 오랜동안의 침묵을 깨고 이제 이 큰 선지자를 통해
다시 그들을 방문하여 상하고 연약한 부분들을 치유하러 오셨다는 것을 뜻한다.
(말 4:2 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공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비추리니 너희가 나가서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 같이 뛰리라)
[눅 7:17] 예수께 대한 이 소문이 온 유대와 사방에 두루 퍼지니라.
▶ 예수께 대한 이 소문이 - 이는 예수께서 죽은 자를 살리신 결과 무리들이 하나님을 찬양한 바 곧 큰 선지자가 우리 가운데 일어나셨다는 것과 관련된 소문이다(Meyer).
당시에 백성들이 순수하게 예수의 가르침을 통해서만 하나님께 영광과 찬양을 돌리기에는 아직까지 그들의 믿음이 너무 어렸으므로 그들은 예수의 놀라운 치유 이적을 목격하고서 경이로움을 느끼고 있었을 것이다.
▶ 온 유대와 사방에 두루 퍼지니라 - 이것은 유대 지방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유대땅 전체, 즉 실질적인 팔레스틴을 말한다.
물론 유대 지방이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한 남방 지역을 가리키지만 성경에서 보통 '온 유대'라고 했을 때는 팔레스틴 전역을 가리키는 것이 일반적이다.
'나인 성'은 갈릴리에 속한 자그마한 마을이었으나 죽은 자를 소생시키신 예수의 위대한 권능은 소문의 꼬리를 물고 각처로 퍼져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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