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7월 30일 토요일

내가 기도하며 내 죄와 및 내 백성 이스라엘의 죄를 자복하고 내 하나님의 거룩한 산을 위하여

  

응답받은 다니엘의 기도 2

 

(9:20-27) 내가 이같이 말하여 기도하며 내 죄와 및 내 백성 이스라엘의 죄를 자복하고 내 하나님의 거룩한 산을 위하여 내 하나님 여호와 앞에 간구할 때

21) 곧 내가 말하여 기도할 때에 이전 이상 중에 본 그 사람 가브리엘이 빨리 날아서 저녁 제사를 드릴 때 즈음에 내게 이르더니

22) 내게 가르치며 내게 말하여 가로되 다니엘아 내가 이제 네게 지혜와 총명을 주려고 나왔나니

23) 곧 네가 기도를 시작할 즈음에 명령이 내렸으므로 이제 네게 고하러 왔느니라 너는 크게 은총을 입은 자라 그런즉 너는 이 일을 생각하고 그 이상을 깨달을지니라

24) 네 백성과 네 거룩한 성을 위하여 칠십 이레로 기한을 정하였나니 허물이 마치며 죄가 끝나며 죄악이 영속되며 영원한 의가 드러나며 이상과 예언이 응하며 또 지극히 거룩한 자가 기름부음을 받으리라

25) 그러므로 너는 깨달아 알지니라 예루살렘을 중건하라는 영이 날 때부터 기름부음을 받은 자 곧 왕이 일어나기까지 일곱 이레와 육십이 이레가 지날 것이요 그 때 곤란한 동안에 성이 중건되어 거리와 해자가 이룰 것이며

26) 육십이 이레 후에 기름부음을 받은 자가 끊어져 없어질 것이며 장차 한 왕의 백성이 와서 그 성읍과 성소를 훼파하려니와 그의 종말은 홍수에 엄몰됨 같을 것이며 또 끝까지 전쟁이 있으리니 황폐할 것이 작정되었느니라

27) 그가 장차 많은 사람으로 더불어 한 이레 동안의 언약을 굳게 정하겠고 그가 그 이레의 절반에 제사와 예물을 금지할 것이며 또 잔포하여 미운 물건이 날개를 의지하여 설 것이며 또 이미 정한 종말까지 진노가 황페케 하는 자에게 쏟아지리라 하였느니라.

 

 

. 메시지 내용을 검토해보자.

 

그 소식은 대단히 엄숙하게 전달되었다.

그리고 대단한 관심이 기울여졌을 것이 분명하다.

그리고 아주 정확하게 기록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예언들이 그런 것처럼 거기에는 이해하기 힘든 것들이 있었다.

예언자 예레미야의 예언서를 통해서

70년간의 포로생활이 끝나 감을 이해하고 있었던 다니엘은,

이제 영광스럽게도 다른 곳보다 더 먼저 영광스러운 해방을

교회에게 알리도록 선택된다.

먼저 것은 나중 것의 그림자에 불과하다.

 

이것은 70주간(週間)이 지나면 곧 해방이 있다.

다니엘은 그 예언을 넘어서 있는 것을 기도했고,

그 기도에 대해 이같은 응답을 받은 것이다.

 

다니엘은 "자기 백성" "거룩한 도성" 을 위해서 기도했다.

"저들" 의 석방과 "그것" (도성)의 재건을 위해서 기도한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니엘이 생각하거나 요구했던 것 이상의 것을 응답하셨다".

 

하나님은 자기를 두려워하는 사람들의 요구를 들어주실 뿐만 아니라,

그 이상의 것을 베푸신다.

 

(21:4 저가 생명을 구하매 주께서 주셨으니 곧 영영한 장수로소이다).

 

 

1. 여기에 확정된 시간은 다소 이해하기 곤란한 점이 있다.

 

일반적으로 보면 그 기간은 "칠십 주간",

"7년의 70" 490년을 말한다.

 

이스라엘 백성과 예루살렘 도성에 관해서 앞으로 일어날

거대한 사건은 이 490년이 다하기 전에 있을 것이다.

 

 

(1) 따라서 여기서는 햇수가 주()로 서술되었다.

 

[1] 이것은 대부분인 예언자적 문체와 주화되는 것이다.

 

예언의 문제는 일상적인 화법과는 달리, 너무 분명한 것은 피해서 되어 있다.

 

[2] 본래 안식일에 의해서 이루어진 바 시간을 주간으로 나눈 제도를

영광스럽게 하기 위해서이며, 그 영광이 영원함을 상징하기 위한 것이다.

 

[3] 70년 동안의 포로 기간과 관련된 것이다.

 

이스라엘은 오랫동안 그들 자신의 땅을 가져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이제 그들이 그 땅을 차지하면 7배나 오래 보존해야 한다.

 

하나님은 심판보다는 자비를 베푸시는 것을 더욱 즐겨하신다.

그 땅은 좋지 아니한 의미에서, 70년 동안을 "안식하였다".

 

(26:34 너희가 대적의 땅에 거할 동안에 너희 본토가 황무할 것이므로 땅이 안식을 누릴 것이라 그 때에 땅이 쉬어 안식을 누리리니).

 

그러나 지금은 하나님의 백성이 좋은 의미에서,

70년의 7배나 되는 기간을 안식할 것이다.

이것은 희년을 열 번 지내는 것이다.

 

이러한 비율이 섭리에 의해 이루어진 것은

"미리 정해진 시간을 작정한" 하나님의 지혜를 깨달아 찬양하게 하기 위한 것이다.

 

(2) 70 주간에 대해서 생기는 난점들은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1] 시작과 끝나는 때에 대한 것이다.

 

본문에는 "예루살렘을 회복하고 재건하라는 명령이 주어지는 때부터" 라고 했다.

 

(25절 그러므로 너는 깨달아 알지니라 예루살렘을 중건하라는 영이 날 때부터 기름부음을 받은 자 곧 왕이 일어나기까지 일곱 이레와 육십이 이레가 지날 것이요 그 때 곤란한 동안에 성이 중건되어 거리와 해자가 이룰 것이며).

 

나는 그것은 에스라서 11절에 언급된

고레스 왕의 조서를 말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싶다.

왜냐하면 고레스의 조서에 의해서 이스라엘 백성이 "회복"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비록 거기에는 예루살렘의 재건에 대한 언급이 밝혀

나타나 있지는 않을지라도, 성전 건축이 암시되었고,

또 그것이 그레스에 의해서 실시되리라고 예언되었기 때문이다.

 

(44:28 고레스에 대하여는 이르기를 그는 나의 목자라 나의 모든 기쁨을 성취하리라 하며 예루살렘에 대하여는 이르기를 중건 되리라 하며 성전에 대하여는 이르기를 네 기초가 세움이 되리라 하는 자니라).

 

고레스가 "너를 재건하리라고 예루살렘에게 말하게 되리라".

 

이것은 예언으로나 역사적으로나 예루살렘의 건축에 대한 가장 유명한 조서이었다.

아니, (고레스의 명령이자 동시에 하나님의 뜻이었던)

"이 명령의 공포" "다니엘의 기도의 시작" 에서(23) 언급된

명령의 선포와 같은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70주간이 70년이 만기되자 즉시 시작된다는 것은 대단히 은혜스럽게 보인다.

그리고 이것에 대해서 이의가 제기될 만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단지 이 사실에 의해서 계산하면,

고레스에 의한 바벨론 정복 때부터 알렉산더가 다리오를 정복한 때까지

"바사 왕국" 은 겨우 130년간 존속했다는 결론이 나와 문제가 된다.

 

반면에 바사 황제의 통치에 관한 자세한 기록에 의하면,

바사 제국은 230년 간 계속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투키디데스(Thucydbdes), 크세노폰(Xenophon),

그리고 다른 여러 사람들은 이렇게 계산한다.

 

이 때를 첫 번째 조서가 내려진 때로 정하는 사람들은

이방 역사가들의 위와 같은 연대 계산을

불확실하고 신빙성이 없는 것으로 일축해 버린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그들의 계산에 동조한다.

그래서 그 490년을 고레스의 조서에서(1:1)가 아니라,

 

(1:1 이 일은 아하수에로 왕 때에 된 것이니 아하수에로는 인도로 구스까지 일백이십칠 도를 치리하는 왕이라)

 

에스라서 6장에 언급된바 약 백 년 이후에 있었던

다리오에 의해서 선포된

예루살렘의 재건에 대한 두 번째 조서에서 시작한 것으로 이해한다.

 

또 다른 사람들은 에스라를 보낸 왕 아닥사스다 제7년에 못 박는다.

 

(7:8-12 왕이 후원으로부터 잔치 자리에 돌아오니 하만이 에스더의 앉은 걸상 위에 엎드렸거늘 왕이 가로되 저가 궁중 내 앞에서 왕후를 강간까지 하고자 하는가 이 말이 왕의 입에서 나오매 무리가 하만의 얼굴을 싸더라

9) 왕을 모신 내시 중에 하르보나가 왕에게 아뢰되 왕을 위하여 충성된 말로 고발한 모르드개를 달고자 하여 하만이 고가 오십 규빗 되는 나무를 준비하였는데 이제 그 나무가 하만의 집에 섰나이다 왕이 가로되 하만을 그 나무에 달라 하매

10) 모르드개를 달고자 한 나무에 하만을 다니 왕의 노가 그치니라).

 

박학자 풀(Poole)씨는, 그의 라틴 대조표에서

70주간의 시작에 대한 여러 견해차를 아주 광범위하고, 치밀하게 수집해 놓았다.

 

[2] 그 시기의 종말에 대한 어려움이 있다.

 

이때에 대해서도 해석자 사이에 일치된 견해가 없다.

어떤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죽음의 때라고 하여,

이 유명한 예언의 명시적인 말들을 보면,

가브리엘이 다니엘에게 저녁 제사 때에 말했던

바로 그 시간에서부터 그리스도가 죽은 때(그 때도 저녁 무렵이었다)까지의

기간을 말해 준다고 결론 내릴 수 있다 한다.

 

그리고 나는 이 견해를 받아들인다.

그 기간은 정확하게 490년이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이 "주간의 절반에(70주간의 마지막 주간에),

그가 제사와 예물을 중지시킬 것이다(27)라는 말이 있으므로,

그때는 유대인들이 복음을 거부한 때요,

사도들이 이방인들에게로 향해 나아가던 때이다.

 

그러나 그 때를 정확히 그리스도의 죽음의 때와 같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그것(27)을 다음과 같이 읽을 것이다.

 

"그는 많은 사람들에게 증언을 강화시킬 것이다.

최후의 7, 혹은 최후의 한 주간, 그리고 그 주간의 절반

7년의 절반(즉 그리스도가 그의 공생애를 보낸 3년 반)

희생과 봉헌을 그치게 할 것이다" 고 해석한다.

 

또 다른 사람들은

이 때를 그리스도가 죽은 후 37년 경, 예루살렘의 파괴 때까지로 계산한다.

 

그것은 이 70주간이 유대 백성과

"그들의 거룩한 도성에 대해 정해지리라" 고 말해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기에는 예루살렘의 멸망과 성소의 파괴에 대해 많은 것이 나와 있다.

 

[3] 그것은 7주간과 62주간, 그리고 1주간으로 나눈 것에 대한 난점이 있다.

 

그리고 이렇게 한 이유는 다른 어떤 것보다도 계산하기 어려운 문제이다.

 

첫 번째 일곱 주간 곧 49년이 지난 때에 성전과 도성이 건축되었다.

그리고 마지막 한 주간 동안에 그리스도가 그의 복음을 선포하셨다.

그의 복음의 선포에 의해서 유대적 질서는 무너졌다.

그리하여 복음의 도성과 성전을 위한 터전이 마련되었다.

이것은 전자의 잿더미 위에 세워질 것이었다.

 

(3) 그러나 이들 시간을 정확히 정하는 것이 아무리 불확실하더라도,

그 때를 결정하는 데는 두 가지 중대한 목적이 있다.

 

[1] 그것은 믿는 자들에게 그것에 대한 기대를 일으키는 구실을 한다.

 

메시야의 도래하리라는 막연한 약속이 족장들에게 주어졌었다.

 

이전의 예언자들은 메시야를 "오실 분"으로 말했다.

 

그러나 지금까지 그의 도래에 대한 정확한 때는 말해지지 않았다.

비록 이 때에 대한 대단한 의심이 있어서 그 때를 확정할 수는 없었을 지라도,

이 예언의 빛에 의해서 그들은 메시야를 기다릴 때가

언제인지에 대해서는 대략 알 수 있게 되었다.

 

따라서 그리스도가 오셨을 때,

일반적으로 보면 그가 "이스라엘의 위로"로써,

그리고 "예루살렘의 속량"으로 간주되었다는 것을 안다.

 

(2:25 예루살렘에 시므온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 사람이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

 

38 마침 이 때에 나아와서 하나님께 감사하고 예루살렘의 구속됨을 바라는 모든 사람에게 이 아기에 대하여 말하니라).

 

이 이유 때문에 "하나님의 나라가 곧바로 나타날"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19:11 저희가 이 말씀을 듣고 있을 때에 비유를 더하여 말씀하시니 이는 자기가 예루살렘에 가까이 오셨고 저희는 하나님의 나라가 당장에 나타날 줄로 생각함이러라).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예루살렘으로 몰려든 것도 바로 이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2:5 그 때에 경건한 유대인이 천하 각국으로부터 와서 예루살렘에 우거하더니).

 

[2] 그것은 지금도 불신자들의 기대를 거부하고 묵살시키는 구실을 한다.

 

그들 불신자들은 예수가"오실 분" 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다른 사람을 기다리는 사람" 들이다.

이 예언은 그들을 침묵시키고 그들을 비난할 것이다.

 

왜냐하면 예루살렘을 재건하라는 명령으로부터 이 70주간을 계산하면,

그 기간은 1500년 전에 다 찼다는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은 "변명의 여지가 없는" 것이다.

 

그들이 메시야의 도래를 잘못 계산하고 있는 동안

메시야가 오셨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려 하나

그러나 이 사실에 의해서 메시야가 오셨다는 것을 우리는 확신하게 되었으며,

바로 우리의 예수님이 메시야이심을 확신하게 되었다.

 

그는 바로 미리 정해진 그 시간에 왔고

영원히 기념되어야 할 시각에 오셨던 분이다.

 

2. 여기에 예언된 사건들은 적어도 지금 우리에게는 보다 평이하고 쉬운 것이다.

 

여기에서 예언된 사건들이 무엇인지를 살펴보자.

 

(1) 유대인들이 자기 조국에 되돌아올 것이며,

다시 그 땅에 정착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이 예언된다.

 

이것은 다니엘이 일차적으로 간구한 바로 그것이었다.

그러나 그의 기도에 대한 응답에서는 간단하게 언급되어 있을 뿐이다.

 

"예루살렘을 중건하러 가라는 명령"은 경건한 유대인들에게는 위안이 되었으리라.

 

(25절 그러므로 너는 깨달아 알지니라 예루살렘을 중건하라는 영이 날 때부터 기름부음을 받은 자 곧 왕이 일어나기까지 일곱 이레와 육십이 이레가 지날 것이요 그 때 곤란한 동안에 성이 중건되어 거리와 해자가 이룰 것이며).

 

그리고 그 명령은 헛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비록 그 시대가 대단히 어려웠고,

동시에 그 선한 일이 반대에 부딪힐 것이지만,

결국 수행될 것이며 성취될 것이기 때문이다.

 

비록 "곤란한 동안" 일지라도 "성벽" 과 길거리가 세워졌듯이,

"길거리가 다시 재건되어" 전과 같이 아름답게 되리라.

 

우리가 이 세상에 사는 동안은 언제고

"곤란한 때"를 각오해야 된다.

"즐거운 때" 에도 떨리는 마음으로 즐거워해야 한다.

 

그것은 하나의 섬광에 불과하다.

또한 평화와 번영으로 빛나는 막간에 불과하다.

구름은 "비가 온 후"에도 되돌아 올 것이다.

 

유대인들은 그들이 그들 자신의 땅을 되찾았을 때에도,

그들은 "곤란한 때" 에도 하나님께서는 그 자신의 일을 행하실 것이며,

그의 예루살렘을 중건하시고 아름답게 하실 것이라는 사실은 우리들의 기쁨이다.

아니, 오히려 때의 곤란함이,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 교회를 더 발전시켜 줄 것이다.

 

교회는 어려울수록 성장한다.

 

(2) 메시야와 메시야의 사업에 대한 예언이 나와 있다.

 

현세적인 유대인들은 메시야가 자기들을 로마제국의 멍에에서 구출하고,

세속적인 권세와 부를 줄 것이라고 기대했다.

 

반면에 여기에서는 메시야가 다른 사명,

즉 순수하게 영적인 사명을 위해 오셔야 한다는 사실이 강조되고 있다.

 

*메튜핸리의 주석을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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