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9월 4일 일요일

룻기1장 1-18절의 정신

  

룻기11-18절의 정신

 

 

출소거취(출신진퇴),

인생의 대사이다.

가볍게 결행할 바 아니다.

 

우리들은 일난(one difficulty)을 피하려다가,

도리어 백난을 부르는 일 있다.

 

우리들은 목전의 간난(고난)을 볼 수 있대도,

먼 곳(원방 a distant place)의 곤고를 헤아려 알지 못하는 자이다.

 

외의(치솟음)한 산악도 거리를 멀리 사이에 두고서 바라보면,

원만원활(smoothness)한 것 같다.

 

우리들은 생각한다.

이 고장에 있는 쓴망(떫고 괴로움),

저 고장에는 없겠지 하고.

 

(그러나) 그곳에 가면,

역시 마찬가지의 세상 안이어서,

그곳에도 이곳의 곤고가 있다.

 

고향에 있어서의 난을 면하려다가,

도리어 뼈를 이경에 묻게 되는 일은,

어찌 홀로 엘리멜렉 뿐이랴!

 

곤고는 참고 견디어 내는 것을 제일로 한다.

(도피)하는 것은, 위험 많다.

 

그리스도 신자는,

이교신자와 혼인 말아야할까?

 

엘리멜렉의 두 아들은, 모압 여자와 결혼했다.

이는 유대국에 있어서는 이례인 듯하다.

 

옛날,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세상)의 딸과 혼인함으로써

하나님의 노를 부른 일이라든가.

 

(창세기 6:6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이교인과 결혼하지 말지니라는 교훈은,

모세율의 긴요한 조항인 듯하다.

 

신명기 73절에 이른바 있다.

또 그들과 혼인하지 말지니 네 딸을 그 아들에게 주지 말 것이요 그 딸로 네 며느리를 삼지 말 것(이니라)

 

이와 대조하여,

여호수아 2312, 에스라서 912절을 보라.

 

(여호수아 2312너희가 만일 퇴보하여 너희 중에 빠져 남아 있는 이 민족들을 친근히 하여 더불어 혼인하며 피차 왕래하면,

 

에스라서 912그런즉 너희 여자들을 저희 아들들에게 주지 말고 저희 딸을 너희 아들을 위하여 데려오지 말며 그들을 위하여 평강과 형통을 영영히 구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왕성하여 그 땅의 아름다운 것을 먹으며 그 땅을 자손에게 유전하여 영원한 기업을 삼게 되리라 하셨나이다)

 

유대의 관례로서, 모세의 훈명으로서,

이교인과의 결혼은 금지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

 

그리스도 교회가,

그 신도들의, 이교 신자와 결혼하는 일에 대하여,

언제나 동의를 표하지 않음의 이유는,

고린도후서 614절에 있어서의 바울의 말씀에 의거한다고 한다.

 

그 말씀에 이르기를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 하지 말라 이와 불법이 어찌 함께하며 빛과 어두움이 어찌 사귀며

 

그러므로 만약 성서의 훈명에서 논하는 때는,

신도 미신도간의 결혼은, 금지되어 있음 같다.

 

그런데 같은 성서 중에 아주 이 교훈에 어긋나는 기사를 기재한 것이 적지 않다.

 

모세 그 자신의 아내 십보라는,

미디안 사람 이드로의 딸이다.

 

가나안의 기생 라합은 여호수아의 좌관(령관의 총칭)

충직호매한 살몬의 아내로 맞이하는바 되었을 뿐 아니라,

유대 역사에 있어서 가장 성실한 신앙에 찬 부녀로서 열거되는 바가 아닌가.

 

(마태복음 1:5 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스를 낳고 보아스는 룻에게서 오벳을 낳고 오벳은 이새를 낳고),

 

그리고 복음 기자가 구세주의 혈통을 기록하려하자,

허다한 현부숙녀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가나안 기생과 모압의 부인 룻의 이름을 열거하여,

만세에까지 그들의 이름을 전케 했다.

(마태복음1장 그리스도의 계보 중, 여자는 다만 3명을 기록하고 있을 뿐).

 

이는 그중에 무언의 설교가 있는 것이 아니랴!

 

유대 부인의 최대 희망은, 구세주의 어머니 되려는데 있었다.

 

무자하게 죽은 부녀를 슬퍼함의 이유는, 주로 이에 있었다.

 

(사사기 11:39-40 두 달만에 그 아비에게로 돌아온지라 아비가 그 서원한 대로 딸에게 행하니 딸이 남자를 알지 못하고 죽으니라 이로부터 이스라엘 가운데 규례가 되어

40) 이스라엘 여자들이 해마다 가서 길르앗 사람 입다의 딸을 위하여 나흘씩 애곡하더라).

 

그렇다면, 이 영예의 지위가,

기생 라합과 모압 여자 룻에게 주어진 이유는,

필경 그리스도교의 교리에 있는 심원한 오의(奧義) 아니랴!

 

나는 이 글() 끝에 있어서 이점에 관한 나의 설명을 시도하고자 한다.

 

누가 말하는가,

성서는 고부(고식)의 관계를 경시하는 것이라고.

 

누가 말하는가,

며느리는 시어머니에 대하여, 하나의 의무도 갖지 않는다고.

 

경회와 주의로써 성서를 연구치 않고서,

지나(1105p 참조), 일본에 있어서의

고부(고식)의 관계를 냉소하는 부박(천박)한 여자는 그 누구인가?

 

시어머니와 며느리와의 관계는

동양에 있어서의 여자 도덕의 긴요한 조건이다.

 

온나다이가꾸(여대학), 온나이마가와(여금천) 히메가가미(희감 여자구감), 요르노쯔루 등,

여자 덕육의 교과서로,

우리나라에서 사용되어 온 것은,

모두 비중을 이 관계에 두었던 것이다.

 

여자란, 그 최애의 남편 위해,

남편의 부모에게 자식으로서의 할 바 일을 다 해야 할 것은,

가장 알기 쉬운 도리로서,

남편이 세상 떠난 후에는, 그를 대신하여,

그의 노부모를 간호함은, 이는 실로 미덕이라 않을 수 없다.

 

물론 며느리와 시어머니는,

하나의 동일한 혈통상의 관계있는 것 아니다.

 

만약 법률상의 의무에서 논하는 때는,

남편이 간 후는, 아내 된 자는,

그의 집(시가)을 떠나도 가하다.

 

그렇지만 덕은,

(2118p 참조)이 부여하는 권리를 방기하는데 있어서,

가장 현저한 것이다.

 

나는 서언에 있어서 룻기를

성서중의 여대학(온나다이가꾸 여대학)이라고 했다.

성서의 이 장과 여대학(일본 에도시대의 여자 수신 교과서)

다음 교훈을 대조해보라.

 

여자는 자기 집(본가)에 있어서는 자기 부모에게 오로지 효행함이 도리이다.

그렇지만 남편의 집에 가서는,

오로지 시아버지, 시어머니를 자기 부모보다 중시하여,

보다 소중히 여기고, 공경하며, 효행을 다해야 할 것이다.

 

부모편을 중히 여기고, 시부모 편을 경시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

시아버지, 시어머니를 조석으로 돌보는 일을 결여하지 말라.

시아버지, 시어머니 편의해야 할 일을 게을리 하지 말라.

만약, 시아버지, 시어머니의 명하심 있을 때면,

조심스레 행하여 거역치 말라.

만사를 시아버지 시어머니에게 물어서, 그 가르치심에 맡기도록 하라.

시아버지, 시어머니 만일 나를 미원하며, 비방한대도,

성내거나 원망하지 않도록 하라.

효를 다하고, (성실 truth)을 다하여 섬기면,

반드시 사이좋게 되는 것이다

 

시어머니 나오미는, 두 며느리에게,

그 본가로 돌아가, 다른 데로 재가할 것을 권했다.

이는 시어머니된 자가 할 바 일이다.

 

시어머니와 며느리와의 사이는 (관계는),

본래 정의(friendly feeling 우정)의 관계이다.

이런 것을 정의로써,

묘령(이십 전후)의 여자를 묶어 두려는 것은,

시어머니된 자의 할 바 아니다.

 

며느리가 시어머니를

섬기려 하는 것이나 않으려는 것이나,

전적으로 며느리의 자유에 있는 것이다.

 

나오미는 일가의 불행을 자기 한 사람이 짊어지고

그 며느리로 하여금 평안을 다른데 구하게끔 했다.

 

사랑할진저! 나오미의 심정이여.

세상에 고부간에 진정이 결핍되는 이유는,

하나는 며느리 된 자의 제멋대로 하는 데에도 있지만도(특히 근세에 있어서는),

또 크게 시어머니 된 자의 도리에 어긋난 심사에 기인하는 것은,

반대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 시어머니 있고서 어찌 이 며느리 없으랴!

 

지나(중국), 일본의 윤리의 최대 흠점은,

어른(윗사람)이 작은 자(손아랫사람)에 대한 의무를 분명히 하지 않음에 있다.

 

온나다이가꾸(여대학),

며느리가 시어머니에 대해서 할 의무는 남김(빈틈)없을 정도로 써놓고 있음에도,

시어머니가 며느리에 대해서 할 의무와 교훈은 싣지 않고 있다.

 

성서는 시어머니 된 자에 대하여, 특별한 교훈을 싣지 않고 있지만도,

그 정신에서 미루어 볼 때는,

다음과 같이 가르치고 있는 것으로 믿는다.

 

너희, 시어머니된 자들아,

너희 며느리를 귀애하라.

그녀는 하나님께서 자식으로 너희에게 주신자다.

너희 친자식보다 더한 사랑으로써 그녀를 인도(훈도)하라.

그녀는 아직 무경험자이다.

이는 그녀는 너희의 특별한 교훈을 필요로 하는, 이유로서,

너희로부터 흠점을 적시됨의 이유가 아니다.

너희도 한번은 그녀처럼, 너희 부모를 떠나,

남의 집으로 시집온 자이다.

 

너희 받은 고통과 걱정으로 하여금

너희 며느리에게 있게끔 하지 말라.

너희는 이미 며느리 된 자의 사정을 알고 있다.

너희는 지금은 추정 잘할 수 있는 시어머니 될 수 있게 되었다.

너희도 딸을 가지고 있을 게다.

그리고 머지않아 너희 딸도 남에게 시집보내지 않을 수 없다.

 

각별히 키울 세도 없이, 남에게 시집보내는 딸’,

너희가, 너희 딸이 그 시어머니 된 자에게 우대(대우)받기를 원하는 것만치,

너희도 너희 며느리를 대우하라.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며느리 오르바는 한번은 주저했지만도,

마침내 시어머니의 말을 받아들여, 떠나갔다.

오인(I, we)은 그녀를 비난치 않는다.

그녀도 죽은 자와 나(시어머니)를 선대했기 때문이다.

 

이제 남편은 죽은 자 수에 들어가,

그녀는 어머니의 집 본가로 돌아가 가하다.

그녀는 한 여자로서의 의무를 다한 것이다.

원컨대, 여호와의 은혜가 그녀 위에 있기를.

 

그렇지만 룻은 오르바보다 더욱 아름답다.

그녀는 종생 시어머니와 함께 하려는 것이다.

 

나오미의 간절한 설유(admonition),

그녀의 결심을 움직이게 하지 못했다.

 

여자 된 자, 일단 그 남편이 집에 출가했는데,

어찌 다시 부모의 집으로 돌아가오리.

남편의 집은 내 집, 남편의 어머니는 내 어머니,

남편의 나라는 내 나라로서

남편의 하나님은 내 하나님

나는 이미 모압 여자가 아니라,

이스라엘 족에 속한 자.

 

나는 엘리멜렉의 성을 가지고 죽으리라.

나는 말론의 아내로서 장사되리라.

내게 귀가를 권하는 이는 누구인고.

만약 죽는 일 이외에,

나를 내 남편의 집에서 떠나게 하는 자 있다면,

여호와의 저주가, 내게 있을지어다라고.

 

온나다이가꾸(여대학)에 이르기를

 

부인은 남편의 집을 자기 집으로 하는 까닭에,

모로꼬시에서는, 시집가는 것을, 출가()라고 한다.

자기 집으로 돌아간다는 말이다.

 

가령 남편의 집이 빈천하대도, 그것을 원망하지 말 것이다.

하늘에서 내게 준 집의 가난은,

내 운이 나쁜 때문이라 생각하고,

일단 시집가서는,

그 집을 나오지 않음을 여자의 도()로 할 것이라는 것,

옛 성인의 가르치심이다

 

아아 사행 동안에 따라, 아라비아국의 북부에 접하여,

모래와 자갈(사력 Gravel) 망막(광막)한 곳에서

그모스(2195p 참조)’의 우상 앞에 엎드려 머리를 숙임으로써,

언제나 이교 미신의 이름으로써

이스라엘인에게 폄시되어 온 모압인 중에,

이 여자 있다니!

 

참으로 참으로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취하지 아니하시고

각 나라 중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받으시는 줄 깨달았도다’.

 

(사도행전 10:34-35 베드로가 입을 열어 가로되 내가 참으로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취하지 아니하시고

35) 각 나라 중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받으시는 줄 깨달았도다)

 

이처럼 미덕 있는 자는

이스라엘 중 아직 만나보지 못한 일이다’.

 

(마태복음 8:10 예수께서 들으시고 기이히 여겨 좇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보지 못하였노라).

 

지당하시도다.

하나님은 이 이교 신자를 취하여,

그녀에게 세상의 구주의 조모(祖母) 됨의 영광을 주신 일이야말로’.

 

*내촌감삼의 글을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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