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애의 극점, 과부의 귀향
본문
룻기 1장 19-22절 : 이에 그 두 사람이 가서 마침내 베들레헴에 이르렀더니 그들이 베들레헴에 이를 때에 온 도시가 그들로 인해 흥분하여 말하기를, 이 사람이 나오미냐? 하므로
20) 나오미가 그들에게 이르되, 나를 나오미라 부르지 말고 마라라 부르라. 전능자께서 나를 심히 괴롭게 하셨느니라.
21) 내가 풍족하게 나갔으나 주께서 나를 빈손으로 집에 돌아오게 하셨느니라. 주께서 나를 대적하는 증거를 보이셨고 전능자께서 나를 괴롭게 하셨거늘 너희가 어찌하여 나를 나오미라 부르느냐? 하니라.
22) 이같이 나오미가 모압 지방에서 돌아온 자기 며느리 모압 여인 룻과 함께 돌아왔더라. 그들이 보리 수확을 시작할 때에 베들레헴에 이르렀더라(KJV 흠정역)
19) 그래 그들 두 사람은 행하여, 마침내 베들레헴에 이르렀는데, 베들레헴에 이른 때, 성읍 모두가 이로 인해 떠들기 시작하고, 여인들은 ‘이가 나오미냐’고 했다.
20) 나오미는 그들에게 이르기를, ‘나를 나오미(희락, 즐거움)라 부르지 말라.
마라(괴로움, 쓰다)라고 부르다’. 여호와께서 심히 나를 괴롭게 하셨기 때문이다.
21) 내가 풍족하게 떠났댔는데, 여호와께서 나로 하여금 비어 돌아오게 하셨도다.
여호와께서 나를 치시고, 전능자께서 나를 괴롭게 하셨는데, 너희들 어찌 나를 나오미라 부르는가!
22) 이와 같이 나오미는, 저 모압 땅에서 돌아온 며느리 모압여인 룻과 함께 돌아왔다.
즉 그들은 보리 추수 초에 베들레헴에 이르렀다(내촌감삼의 주석에서).
해석
‘나오미(희락, 즐거움), 마라(괴로움, 쓰다)’ - (이것은) 유대인이 보통 쓰는 말씨이다.
영어로 이것을 오노우매토우피어(onomatopoeia)라고 한다.
즉 뜻 따라 이름을 지음이다.
‘희락(즐거움)’이라는 이름,
지금은 내게 적합하지 않고,
‘괴로움(씀)’이라고 할 것이라 이다.
‘여호와께서 심히 나를 괴롭게?’
보통, 유대인의 개념에 의하면,
사업의 성공, 가운의 융성, 모두 이것을 여호와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하고,
실패 곤란은,
모두 하나님께서 나를 쳐서 괴롭게 하신 것으로 했다.
깊은 종교적인 관념을 가졌던 증거이다.
‘보리 추수’ - 4월 상순이다. 밀 가을에 앞서기 2개월.
정신
사람의 일생 중,
영예의 극(최고)이라고 해야 할 때는,
금의(미의)를 입고서 고향에 돌아오는 때이다.
이에 반하여 치욕 영락의 극이란,
남루(루의 rags)를 걸치고,
처참(처연)한 모습으로,
고인(구친구)에 대하는 때이다.
그리고 나오미의 경우는,
실로 이 비탄의 극이었다.
생각하면, 일찍이 10년 전 옛날,
사랑하는 남편에게 인도되어,
강장한 두 아들과 함께,
마음 든든하게도 떠났던 고향,
지금은 외돌토리 홀몸이 되어,
의지할 것은
이국의 천한 과부(며느리) 룻 한 사람,
일찍이 있었던 재산도,
지금은 남의 손에 넘어가
내일의 땔감(연료)은 어찌하며, 살아가랴!
의지할 데 없는 덧없는 세상을,
사람의 자비로, 살아가려는 외로움이여!
아아 그럴 줄 알았다면,
나도 모압 오두막집에서,
사막의 이슬로 사라져 버렸을 것을.
그렇지만 하나님은 종극까지 그 자녀를 추궁치 않으신다.
암흑이 그 극(절정)에 달했을 때,
동천이 바로 밝아오는 때가 아니랴!
그녀(나오미)의 정절 있는 며느리 룻은,
내일 아침 바야흐로 식물을 얻기 위해 가까운 이웃 밭으로 나가려 하고 있다.
그리고 자비로 풍성하신 섭리는,
이 정절효녀의 마음을 불쌍히 여겨,
천사를 보내어,
이 영락해진 노약의 과부를 구원하고자 하신다.
한토의 옛말(고담;고사)은
반드시 모두가 다 망담(망탄 a lie)이라고는 할 수 없는 것이다.
여호와 하나님은,
하늘의 하나님으로서,
효자는 그의 특별한 보호 아래 있는 것이다.
*내촌감삼의 글을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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