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9월 25일 일요일

이에 보아스가 룻을 취하여 아내를 삼고 그와 동침하였더니 여호와께서 그로 잉태케 하시므로

 희락의 회복, 감사의 과부

 

성 경: [4:13-17] 이에 보아스가 룻을 취하여 아내를 삼고 그와 동침하였더니 여호와께서 그로 잉태케 하시므로 그가 아들을 낳은지라

14) 여인들이 나오미에게 이르되 찬송할지로다 여호와께서 오늘날 네게 기업 무를 자가 없게 아니하셨도다 이 아이의 이름이 이스라엘 중에 유명하게 되기를 원하노라

15) 이는 네 생명의 회복자며 네 노년의 봉양자라 곧 너를 사랑하며 일곱 아들보다 귀한 자부가 낳은 자로다

16) 나오미가 아기를 취하여 품에 품고 그의 양육자가 되니

17) 그 이웃 여인들이 그에게 이름을 주되 나오미가 아들을 낳았다 하여 그 이름을 오벳이라 하였는데 그는 다윗의 아비인 이새의 아비였더라.

 

 

[4:13] 이에 보아스가 룻을 취하여 아내를 삼고 그와 동침하였더니 여호와께서 그로 잉태케 하시므로 그가 아들을 낳은지라

 

보아스가 룻을 취하여 아내를 삼고 - 이렇게 함으로서 모압 여인 룻은

가나안 여인 라합 및 다말과 더불어 여인 중 그리스도의 계보에 들게 되는

영광을 얻게 되었다.

 

(1:5 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스를 낳고 보아스는 룻에게서 오벳을 낳고 오벳은 이새를 낳고).

 

그런데 사실 구속 역사 속에서 모압의 인상은 매우 부정적이다.

왜냐하면 모압 족속은 본래 근친상간(近親相姦)에 의하여 생겨난 부족이며,

 

(19:31 큰 딸이 작은 딸에게 이르되 우리 아버지는 늙으셨고 온 세상의 도리를 따라 우리의 배필 될 사람이 이 땅에는 없으니

32) 우리가 우리 아버지에게 술을 마시게 하고 동침하여 우리 아버지로 말미암아 후손을 이어가자 하고

33) 그 밤에 그들이 아버지에게 술을 마시게 하고 큰 딸이 들어가서 그 아버지와 동침하니라 그러나 그 아버지는 그 딸이 눕고 일어나는 것을 깨닫지 못하였더라

34) 이튿날 큰 딸이 작은 딸에게 이르되 어제 밤에는 내가 우리 아버지와 동침하였으니 오늘 밤에도 우리가 아버지에게 술을 마시게 하고 네가 들어가 동침하고 우리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후손을 이어가자 하고

35) 그 밤에도 그들이 아버지에게 술을 마시게 하고 작은 딸이 일어나 아버지와 동침하니라 그러나 아버지는 그 딸이 눕고 일어나는 것을 깨닫지 못하였더라

36) 롯의 두 딸이 아버지로 말미암아 임신하고

37) 큰 딸은 아들을 낳아 이름을 모압이라 하였으니 오늘날 모압의 조상이요

38) 작은 딸도 아들을 낳아 이름을 벤암미라 하였으니 오늘날 암몬 자손의 조상이었더라)

 

출애굽중인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적대적이었고,

 

(22:2-6 십볼의 아들 발락이 이스라엘이 아모리인에게 행한 모든 일을 보았으므로

3) 모압이 심히 두려워하였으니 이스라엘 백성이 많음으로 말미암아 모압이 이스라엘 자손 때문에 번민하더라

4) 미디안 장로들에게 이르되 이제 이 무리가 소가 밭의 풀을 뜯어먹음 같이 우리 사방에 있는 것을 다 뜯어먹으리로다 하니 그 때에 십볼의 아들 발락이 모압 왕이었더라

5) 그가 사신을 브올의 아들 발람의 고향인 강 가 브돌에 보내어 발람을 부르게 하여 이르되 보라 한 민족이 애굽에서 나왔는데 그들이 지면에 덮여서 우리 맞은편에 거주하였고

6) 우리보다 강하니 청하건대 와서 나를 위하여 이 백성을 저주하라 내가 혹 그들을 쳐서 이겨 이 땅에서 몰아내리라 그대가 복을 비는 자는 복을 받고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줄을 내가 앎이니라),

 

바알브올 사건 때에는 이스라엘을 범죄케 하는 올무가 되기도 하였기 때문이다.

 

(251-18 이스라엘이 싯딤에 머물러 있더니 그 백성이 모압 여자들과 음행하기를 시작하니라

2) 그 여자들이 자기 신들에게 제사할 때에 이스라엘 백성을 청하매 백성이 먹고 그들의 신들에게 절하므로

3) 이스라엘이 바알브올에게 가담한지라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시니라

4)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백성의 수령들을 잡아 태양을 향하여 여호와 앞에 목매어 달라 그리하면 여호와의 진노가 이스라엘에게서 떠나리라

5) 모세가 이스라엘 재판관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각각 바알브올에게 가담한 사람들을 죽이라 하니라

6)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이 회막 문에서 울 때에 이스라엘 자손 한 사람이 모세와 온 회중의 눈앞에 미디안의 한 여인을 데리고 그의 형제에게로 온지라

7) 제사장 아론의 손자 엘르아살의 아들 비느하스가 보고 회중 가운데에서 일어나 손에 창을 들고

8) 그 이스라엘 남자를 따라 그의 막사에 들어가 이스라엘 남자와 그 여인의 배를 꿰뚫어서 두 사람을 죽이니 염병이 이스라엘 자손에게서 그쳤더라

9) 그 염병으로 죽은 자가 이만 사천 명이었더라

10)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11) 제사장 아론의 손자 엘르아살의 아들 비느하스가 내 질투심으로 질투하여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내 노를 돌이켜서 내 질투심으로 그들을 소멸하지 않게 하였도다

12) 그러므로 말하라 내가 그에게 내 평화의 언약을 주리니

13) 그와 그의 후손에게 영원한 제사장 직분의 언약이라 그가 그의 하나님을 위하여 질투하여 이스라엘 자손을 속죄하였음이니라

14) 죽임을 당한 이스라엘 남자 곧 미디안 여인과 함께 죽임을 당한 자의 이름은 시므리니 살루의 아들이요 시므온인의 조상의 가문 중 한 지도자이며

15) 죽임을 당한 미디안 여인의 이름은 고스비이니 수르의 딸이라 수르는 미디안 백성의 한 조상의 가문의 수령이었더라

16)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17) 미디안인들을 대적하여 그들을 치라

18) 이는 그들이 속임수로 너희를 대적하되 브올의 일과 미디안 지휘관의 딸 곧 브올의 일로 염병이 일어난 날에 죽임을 당한 그들의 자매 고스비의 사건으로 너희를 유혹하였음이니라).

 

그래서 모압 사람은 영원히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율법에 규정되기도 했다.

 

(23:3 암몬 사람과 모압 사람은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하리니 그들에게 속한 자는 십 대뿐 아니라 영원히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이처럼 혈통적으로 볼 때 모압의 딸 룻은

마땅히 저주받을 수 밖에 없는 죄인이었지만,

자기 민족의 신인 그모스를 버리고 온전히 여호와를 신앙함으로써

하나님의 크신 구원의 은총을 힘입을 수 있었을 뿐 아니라

그리스도의 조상이 되는 복을 받았으나,

이것은 하나님의 은총이 거둔 놀라운 승리였던 것이다.

 

여호와께서 그로 잉태케 하시므로 - 당시 이스라엘 사회에서는

아들을 낳게 되는것이 무엇보다 귀중한 하나님의 축복으로 여겨졌다.

반대로 아들을 낳지 못한 여자는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것으로 여겨졌으므로,

 

(127:3 보라 자식들은 여호와의 기업이요 태의 열매는 그의 상급이로다)

 

슬픔 가운데 살 수 밖에 없었다.

 

(삼상 1:11 서원하여 이르되 만군의 여호와여 만일 주의 여종의 고통을 돌보시고 나를 기억하사 주의 여종을 잊지 아니하시고 주의 여종에게 아들을 주시면 내가 그의 평생에 그를 여호와께 드리고 삭도를 그의 머리에 대지 아니하겠나이다).

 

따라서 본 구절은 룻이 하나님의 돌보심과 축복 가운데서

성읍 장로들의 소원대로 아들을 낳게 된 사실을 강조한 것이다.

 

 

[4:14] 여인들이 나오미에게 이르되 찬송할지로다 여호와께서 오늘날 네게 기업 무를 자가 없게 아니하셨도다 이 아이의 이름이 이스라엘 중에 유명하게 되기를 원하노라

 

찬송할지로다 - 이 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바라크'

'무릎을 꿇다','축복하다', '문안하다'등 다양한 의미를 지닌다.

 

그런데 이 말이 인간 대 인간 사이에 사용될 때에는

주로 '무릎을 꿇다', '축복을 빌다', 등의 뜻으로 사용된다.

 

그러나 인간이 하나님을 향하여 이 말을 사용할 때에는

'찬양하다'란 의미가 된다.

그 이유는 인간이 하나님 앞에 이 말을 사용할 때에는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축복에 대한 감사와 응답으로 이 말을 하기 때문이다.

 

기업 무를 자 - 혹자는 여기 이 말을

'보아스'에게 적용시키고 있으나(CanonCook),

문맥으로나 법적으로 볼 때

분명 룻이 보아스를 통해 낳은 아들을 가리킨다(Keil, Cassel, Morison).

 

왜냐하면 룻이 낳은 아들은 법적으로 엘리멜렉 가문을 이어나갈 자이며,

 

(10또 말론의 아내 모압 여인 룻을 사서 나의 아내로 맞이하고 그 죽은 자의 기업을 그의 이름으로 세워 그의 이름이 그의 형제 중과 그 곳 성문에서 끊어지지 아니하게 함에 너희가 오늘 증인이 되었느니라 하니),

 

따라서 나오미에게는 마치 아들처럼 되어 그녀에게 위로와 기쁨을 줌으로써,

결국 나오미의 참 기업 무를 자가 되기 때문이다.

 

유명하게 - 이 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익콰레'

'부르다', '선포하다', '읽다'를 의미하는

'콰라'의 수동형으로 곧 '불리워지다', '선포되다'로 옮길 수 있다.

 

따라서 어떤 사람의 이름이 사람들 사이에서 좋은 의미로 많이 불리워지는 것은

곧 그 사람이 유명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4:15] 이는 네 생명의 회복자며 네 노년의 봉양자라 곧 너를 사랑하며 일곱 아들보다 귀한 자부가 낳은 자로다

 

네 생명의 회복자 - 이 말은 나오미의 생명이 새롭게 된다는 것,

즉 마치 죽은 것과 방불했던 나오미의 가정 엘리멜렉 가문이 룻이 낳은

그 아이로 인해 생기를 되찾게 된 것에 대한 표현이다.

 

네 노년의 봉양자 - 이것은 나오미에게 손자가 생겼으므로,

그로 인해 그녀가 비록 늙더라도 장성한 손자의 봉양을 받게 될것을 일컫는 말이다.

 

일곱 아들보다 귀한 자부 - 이 말은 룻이 단순히 아들을 낳았기 때문에

나오미에게 있어서 일곱 아들보다 귀하게 여겨진 것이 아니라,

그 동안 룻이 시모를 잘 공경하고 헌신하며 순종하였던 사실에 근거하여,

결국 그러한 지극한 효성이 열매를 맺게 된 사실을 칭찬한 말이다.

 

특히 히브리인들에게 있어서 '일곱'이라는 숫자는

충만이나 완전을 상징하며,

하나님께로부터 자녀의 축복을 풍성히 받았음을 상징할 때에도 사용되었다.

 

(삼상 2:5 풍족하던 자들은 양식을 위하여 품을 팔고 주리던 자들은 다시 주리지 아니하도다 전에 임신하지 못하던 자는 일곱을 낳았고 많은 자녀를 둔 자는 쇠약하도다).

 

따라서 본 구절은 시모에 대한 룻의 공경과 헌신이

많은 아들의 그것보다 더욱 컸다는 것을 생생히 표현한 말이다.

 

 

[4:16] 나오미가 아기를 취하여 품에 품고 그의 양육자가 되니

 

아기를 취하여 품에 품고 - 혹자는 나오미가 단순히 그 아이의 보모가 되었다는

사실을 강조하지만(Hervey),

사실상 이것은 보아스와 룻을 통해서 난 아이가 엘리멜렉의 가문에

속하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이 말은 나오미가 그 손자를 자신의 양자(養子)로 삼았다는

의미일 가능성이 크다(Keil).

 

 

[4:17] 그 이웃 여인들이 그에게 이름을 주되 나오미가 아들을 낳았다 하여 그 이름을 오벳이라 하였는데 그는 다윗의 아비인 이새의 아비였더라.

 

나오미가 아들을 낳았다 - 보아스와 룻이 낳은 아들은

'계대 결혼'에 의해 태어난 아이이므로,

곧 나오미의 남편인 엘리멜렉 가문을 잇게 될 아이였다.

 

(10또 말론의 아내 모압 여인 룻을 사서 나의 아내로 맞이하고 그 죽은 자의 기업을 그의 이름으로 세워 그의 이름이 그의 형제 중과 그 곳 성문에서 끊어지지 아니하게 함에 너희가 오늘 증인이 되었느니라 하니).

 

그러므로 사람들이 이렇게 간주했던 것이다.

한편 이 아이의 이름 '오벳'

'섬기다'에 해당하는 '아바드'의 분사형으로서 곧 '섬기는 자'를 의미한다.

 

이에 따라 탈굼 역(the Targums)에서는

'오벳''여호와의 종'으로 번역하였다.

그러나 이런 의미의 히브리어로 '오바댜'가 있으므로 그렇게 의역될 필요는 없다.

 

단지 여기서 '오벳'이란 이름은 늙은 나오미를 봉양하고

섬기는 자라는 의미에서 그처럼 불려진 것으로 추정된다(Matthew Henry, Hervey).

 

(15이는 네 생명의 회복자이며 네 노년의 봉양자라 곧 너를 사랑하며 일곱 아들보다 귀한 네 며느리가 낳은 자로다 하니라)

 

그는 다윗의 아비인 이새의 아비였더라 - 본서의 저자가 다음에 이어지는

다윗의 족보를 열거하기 전,

본서의 이야기를 마무리 하면서 특별히 본 구절을 삽입시킨 것은

저자가 본서를 기록한 목적을 보여 주기 위함이다(Kei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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