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윗 왕의 혈통
(내촌감삼의 주석 4회 중, 두 번째)
유대인의 도덕적 관념에서 평하는 때는,
다말의 행위는,
정당한 것으로 간주한 것 같다.
그렇지만 라합과 룻에 관하여서는,
조금도 삼가거나 주저하는 일 없이,
복음 기자의 붓에 오른 듯이 보인다.
신앙 정절의 모범으로서,
그들은 유대 부인 중 가장 유명한 자였다.
그들은
사라, 리브가, 미리암, 드보라 등과 한가지로,
역사적 부인으로서,
국민의 찬예하는 바였다.
그리고 복음 기자가 그렇듯,
대담하게 명백히 이 두 부인의 이름을,
이 특별한 족보 중에 기입한 것은,
하나의 대 이유 있어서 그렇게 한 것 아니랴!
라합이란 누구인가?
이향국(異鄕國) 가나안의 한 부인으로,
더구나 오인이 언제나 보고서 금수(禽獸)처럼 취급하는 기생이었다.
그렇지만 그녀의 용(용감)과 진실은
사사 여호수아의 영관(좌관) 살몬의 눈에 든바 되고,
택함을 입은 하나님의 국민이 요단(요르단)의 피안에
주소를 정한 후에는 그녀는 이 용장의 아내로 되었다.
그녀는 가나안의 천부였지만도,
하나님이 가장 축복하시는 국민 중
쟁쟁한 이름 있기에 이르렀다.
바울은 그녀의 신앙을 상찬했다.
야곱은 그녀의 행위를 예찬했다.
하나님은 외형적인 성정을 구하시지 않는다.
그녀가 이교도였던 사실,
그녀가 기생이었던 일(독자는 숙려하라)은,
그녀가 하나님께 수납되고,
아브라함의 진정한 자녀로 꼽히는데(계수되는데) 있어서,
하나의 방해도 되지 않았다.
누가 말하는가?
우리들의 선조에 아브라함이 있다고.
하나님은 얼마든지 하나님께 저주받은 자로 여기는
가나안국의 부인,
더구나 기생을 취하여,
아브라함의 자녀 되게 하시랴.
누가 말하는가?
우리들은 사도 베드로에게서
연속하는 정통의 감독, 또는 목사에게서 침례를 받았으니
진정한 그리스도 신도라고.
하나님은 자신의 성령을 부어 주시어,
감독도 교회도 필요로 하지 않는
참 그리스도 신도를 만드시는 것이다.
기생 라합과 함께
다윗왕의 조모로 들게 되고,
‘구세주의 어머니’됨의 영예에 참여한 이는,
이 모압 부인 룻이다.
이 이교국의 천부로서,
특종의 선택을 입고,
마침내 다윗 대왕의 증조모되기에 이른 것은,
여호와는 심덕을 돌아보시는 하나님으로서,
인종 종교 등의 구별은,
그 앞에서는 지소한 가치도 없는 것임을
세상에 보인 것이 아니고 무엇이랴!
오인이, 복음서를 읽건대,
그리스도의 공격의 소점이 된 것은,
‘바리새’의 사람임을 본다.
방자한 사마리아 부인에 대하여,
현행범으로써 인치된 음부(淫婦)에 대하여,
가나안 부인에 대하여
언제나 온량하고,
마음 너그러우셨던 그리스도도,
외면의 행위에 있어서는 엄격,
또는 여호와의 거룩하신 이름을
존숭하는데 있어서는
가장 열심했던 ‘바리새인’에게 향해서는,
언제나 적대의 위치를 취하시고,
그들을 책망하시고, 비난 하시고,
그들을 노하시고, 그들을 저주하시고,
조금도 그들을 용서하는(돌보아주는) 일이 없으셨다.
그는 위선자의 예를 들려함에 있어서,
‘바리새’인을 지적하셨다.
그는 ‘바리새인의 의’라는 말을 만드시고,
그의 제자들로 하여금,
이를 뱀과 전갈처럼 비난하셨다.
학자와 제사장과 ‘바리새’인과 죄인은
언제나 서로 연속하여 그리스도의 심중에 있었던 듯하다.
그리고 이 매리를 입은 ‘바리새’사람,
어찌 그리스도를 용서할 것이랴!
그들은 그의 종생의 적이 되었다.
그들은 그를 넘어뜨리지 않고서는 마지않았다.
그리고 마침내 그를 넘어뜨렸다.
주의하라.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은 것은,
그리스도와 인종 종교를 달리한 자가 아니라,
그의 동국(同國)인으로서,
더구나 그가 그의 아버지라 부른
여호와 하나님의 명예 위해서는
가장 열심이었던 ‘바리새’인이었음을.
그리스도로 하여금 그렇게도
‘바리새’인과 적대케 한 이유는 무엇인가?
동일한 하나님을 섬기고(높이고),
동일한 나라를 사랑하는
그리스도와 ‘바리새’인은,
무엇 때문에 화해할 수 없는 적이 되었는가?
‘바리새’주의란 다른 것이 아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특선에 참여한 자로 자신하고,
그들 이외의 사람은, 열등인종으로 보고,
그들의 아버지로서 아브라함을 가지는 까닭에,
그들의 조부가 하나님의 계시에 참여한 까닭에,
그들은 진리의 전유권을 가지는 것으로 생각하여,
마침내 스스로 일개의 심령적 계급을 만들고,
종교적 귀족을 편성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그리스도로 하여금
그의 예봉(the brunt)을
오로지 ‘바리새’주의로 겨냥하게 한 것은,
그들에게 이 귀족적인 종교 관념이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만인의 하나님으로서,
한 종족, 한 국민, 한 계급의 신이 아니다.
하나님 직접으로 우리들의 하나님으로서,
하나님과 우리들의 사이를 그 누구도 격절(격리 isolation) 시킬 수 없다.
아브라함의 자녀란,
그의 혈통의 아들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행위와 마음을 가진 자이다.
하나님의 대오에 비전(특정인에게만 보이는 오묘한 기술 a secret)이란 없다.
영과 참으로서, 진리를 구하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은 곧 그 자신을 보여 주신다는 것.
이는 그리스도의 복음의 원의(근본주의)로서,
‘바리새’교의 토대를 파쇄(smash)하는 것이다.
이는 즉 석가로 하여금,
당시의 바라문종(파라문종)에 반대케 한 이유이다.
이는 즉 루터(2권 277p참조)로 하여금 로마의 삼층관에 대하여,
가책(책망 torture)의 탄환을 퍼붓게 한 이유이다.
이는 실로 디오더 파커로 하여금
자칭 정통파 교사들의 마음(심담 heart)을 서늘케 한 진리이다.
*내촌감삼의 글을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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