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9월 10일 토요일

제가 누구인가에게 은혜를 입으면, 그 사람의 뒤를 따라서 이삭을 주우렵니다

 섭리의 교도, 정녀의 겸퇴

 

룻기 2:1-16:

 

1) 나오미에게 그 남편의 친족(지기)이 있었다. 즉 엘리멜렉의 일족으로서, 크게 유력한 사람이다. 그 이름을 보아스라고 했다.

 

친족(지기)이 있었다’ - 보아스는 엘리멜렉이 아는 사람일 뿐 아니라,

또 그의 친족이었음은 뒤에 분명해진다.

 

보아스활발한 자라는 뜻이다.

크게 유력한 자란 호가(부호)를 말함이다.

 

 

2) 이때, 모압 여인 룻이 나오미에게 이르기를 바랍니다. 나로 하여금 밭에 가게끔 해 주셔요. 제가 누구인가에게 은혜를 입으면, 그 사람의 뒤를 따라서 이삭을 주우렵니다. 나오미가, 그에게 딸아, 가거라고 하니,

 

이삭을 주우렵니다’ - 레위기 199절에 이르기를,

 

너희 땅의 곡물을 벨 때에 너는 밭 모퉁이까지 다 거두지 말고 너의 떨어진 이삭도 줍지 말며

 

또 신명기 2419절에 이르기를,

 

네가 밭에서 곡식을 벨 때에 그 한 뭇을 밭에 잊어버렸거든 다시 가서 취하지 말고 객과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버려두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손으로 하는 범사에 복을 내리시리라’.

 

가난한 자는 밭에 가서, 이삭 줍기를 하여 식료로 했다.

국법에 이 제도를 만들어 둔 것이다.

모세 법률의 자선적이란, 살펴 알고도 남음이 있다.

 

 

3) 곧 가서, 드디어 이르러, 베는 자(추수하는 자)의 뒤를 따라, 밭에서 이삭을 주웠다. 그는 뜻밖에도 엘리멜렉의 일족인 보아스의 밭에 이르렀다.

4) (마침) 그때에 보아스가, 베들레헴에서 와서 그 베는 자들에게 말했다. ‘원하옵기는, 여호아께서 여러분과 함께 계실찌어다라고. 그들은 곧 대답하여 원하옵기는 여호와께서 당신을 축복할찌어다라고 했다.

 

 

원하옵기는 여호와께서 여러분과 함께 계실찌어다’ - 또는 당신을 축복할지어다’.

모두 유대인의 인사하는 말이다.

 

그 진실(심실)하고 경신적이란, 헤아리고도 남음이 있다,

근래의 유대인도 일상 인사로

Salom aleychem(살롬 알레이헴)이라는 말을 쓴다.

평화(하나님의)가 당신에게 있을지어다라는 말이다.

 

이는 사도가,

그 서한에 종종 쓴 어조로서 유대인 특유의 어조이다.

각국에 각각의 인사말이 있다.

하지만, 이처럼 신실하고, 경외로 찬 것은 없다(역주 참조).

 

 

5) 보아스는 그 베는 자들을 감독하는 종에게 말하기를, ‘이는 누구의 딸이냐?’

6) 베는 자를 감독하는 자 대답하여 말했다. ‘이는 모압 여인으로서, 모압 땅에서 나오미와 함께 돌아온 인데,

7) 말했습니다. “원합니다. 나로 하여금 베는 이들의 뒤를 따라 가며 단 사이에서 이삭을 줍게하여 주셔요라고. 그리고 와서 아침부터 지금까지 여기 있었습니다. 그가 집에서 쉰 것은 잠시일 뿐’.

8) 보아스는 룻에게 이르기를 딸아 들으라. 다른 밭에 이삭을 주우러 가지 말라. 또 여기서 떠나지 말라. 나이 여종들을 떠나지 말고 여기 있으라.

9) 그들이 베는 밭을 주의(주목)해 두었다가, 그 뒤로 따라가라. 내가 청년들에게 네게 접촉하지 말라고 명한 것이 아니냐, 너는, 목이 마를 때는 그릇에 가서 청년들이 길어온 것을 마시라.

10) 룻은 곧 땅에 엎드려 절하며, 보아스에게 이르기를, ‘내가 어찌 당신에게 은혜를 입을 수 있게 되었는지요? 당신이 이방인인 나를 돌보아주실 줄이야라고.

 

당신이 이방인인 나를 돌보아 주실 줄이야’ - 룻은 이방인으로서

자기가 천시되고 있음을 알았다.

이는 실로 열등국의 국민이 우등국에 이른 때에 가지는 소감이다.

 

 

11) 보아스가 대답하여 그에게 이르기를, ‘네가 남편이 죽은 후부터 이때까지, 시어머니에게 애써 한 일, 네가 부모 및 출생국을 떠나, 보지도 알지도 못하던 백성에게로 온 일, 모두 내게 전해졌도다. 원하기는 여호와께서 네 행위에 보답해 주실지어다.

12) 원하기는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 즉 내가 그 날개 아래 몸을 의지코저 온 분께서, 네게 온전한 상을 주시기를

13) 그가(룻이) 이르기를, ‘주여 나로 하여금 당신에게서 은혜를 입게 하소서. 나는 당신의 자녀의 한 사람만도 못한데, 당신이 그처럼 나를 위로하시고, 그렇듯 시녀로 친밀하게 말해주시나이다.

14) 보아스는 그에게 이르기를, ‘식사 때는, 여기 와서 이 빵()을 먹고, 또 네 식물을 이 초에 찍도록 하라. 그가(룻이) 곧 곡식 베는 자의 곁에 앉으니, 보아스는 볶은 곡식을 그에게 주었다. 그는(룻은) 배불리 먹고, 그 남은 것을 간직했다.

15) 그리고 그가(룻이) 또 이삭을 주우러 일어나니, 보아스는 청년에게 명하여 말했다. ‘그로 하여금 곡식단 사이에서도 이삭을 줍게끔 하라. 그를 부끄럽게 하지 말라.

16) 또 손에서 이삭을 일부러 뽑아 떨어뜨려 두어, 그로 하여금 줍게 하라. 욕하지 말라

 

 

 

* 룻기 2:1-16절의 정신

 

하늘(위로부터의) 은혜는, 앉아서 기다려서는 안 된다.

희망은 일하는데(노동에)만이 있다.

 

비탄에 잠겨, 다만 불행을 탄식하는 자는,

하나님의 교도에 참여할 수가 없다.

 

민면(黽勉)한 룻은, 거의 거지 행동이나 다름없지만

그녀의 시어머니를 위해 즐거이 이에 종사했다.

 

그리고 보라, 황천은 효녀를 그 갈 곳으로 인도하셨다.

 

너 불행 중에 신음하는 자여,

우고를 뒤에 두고서 일하러 가라.

하나님은 너를 위해 길을 열어주시고,

필경 네 눈물을 씻어주시리라.

 

이국인으로서 와서

이스라엘중에 있는 자(특히 빈곤(貧困)류랑의 사람),

간곡함과 자애로써 대우해야 한다는 것은,

모세율의 긴요한 조항이다.

 

레위기 1933-34절에 이르기를,

 

타국인이 너희 땅에 우거하여 함께 있거든 너희는 그를 학대하지 말고 너희와 함께 있는 타국인을 너희 중에서 낳은 자 같이 여기며 자기 같이 사랑하라 너희도 애굽 땅에서 객이 되었더니라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라’.

 

또 신명기 1018-19절에 이르기를,

 

(여호와)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신원하시며 나그네를 사랑하사 식물과 의복을 주시나니 너희는 나그네를 사랑하라 전에 너희도 애굽땅에서 나그네 되었음이니라

 

기타, 열거할 수 없을 정도이다.

이들, 그 이웃 여러 나라에 있어서,

이방인은 곧 포로로 하여 노예로 삼고,

또는 동양제국에 있어서와 같이,

항상 오만(五萬)가혹(苛酷)으로써,

외인을,

특히 열등국민에 대하는데 비하면,

삼천 년 전의 유대 국민의 풍속이,

보다 군자(君子)적이고, 우미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부호 보아스는, 한 천부(賤婦),

자기 밭에서 이삭을 줍는 것을 문책치 않고,

도리어 유화(온화)로써 그녀를 동정했다.

 

아버지 하나님의 실재를 아는 자에게 있어서는 빈부귀천의 구분이란 없는 것이다.

보라. 고용인이 그 고용주에 대함이, 얼마나 다정하고,

고용주가 고용인에 대함도 또한 얼마나 은근(태도의 겸손 정중)한가를 (4-).

 

고용주 고용인의 관계를,

사는 사람 파는 사람의 관계처럼 되게 하고,

후자는 전자의 노예로서,

전자는 더욱더 오만해져 후자로 하여금 더욱 더 비굴케 하는 것은,

진실로 일신교를 믿는 나라에 있어서는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여기서 근세 경제학상의 대문제인

자본가와 노동인과의 알력은

현연한 도덕의 결핍에서 온 것임을 알 수가 있다.

 

부자는 겸비하게 가난한 자에게 접하고,

귀인이 비천한 자에 대함에 예와 진실로써 한다면,

사회상 경제상의 난문으로 해결되지 못할 것 얼마 있으랴이다.

 

보아스의 겸손에 대하여

룻의 겸퇴에 주목하라.

 

룻은 사해형제, 남녀동권을 이용하여,

보아스에게 보호와 친절을 요구하지 않았다.

 

천여(天與)의 특권을 이용하여, 자기의 이욕을 채우고,

쾌락과 안전을 얻고자 하는 자는,

이 특권에 참여할 자격을 가지지 못한 자이다.

 

그리스도교가 남편 된 자에게 명하여,

아내 된 자를 사랑하라는 말을 가지고서,

아내 된 자가 그 남편의 자애를 입는 것을 당연한 일로 생각하고,

도리어 불손으로써 남편에게 강요하고,

친절의 부족을 가지고서,

그를 책하는 일 등은 무식을 보이는 것으로서,

이러한 아내는, 그리스도 신도로서의 대우를 받을 자격이 없는 자이다.

 

상스러운 자가 보아스의 행한 일을 가지고서

그 주인에게 강요하여,

룻이 받은 대우를 자기에게도 해 주기를 요구하는 때는,

전연 이것을 거절하여 가한 것이다.

 

룻은 신분에 당치도 않는 접대로써 보아스의 친절에 대했었다.

 

(10 룻은 곧 땅에 엎드려 절하며, 보아스에게 이르기를, ‘내가 어찌 당신에게 은혜를 입을 수 있게 되었는지요? 당신이 이방인인 나를 돌보아주실 줄이야라고,

 

13 그가(룻이) 이르기를, ‘주여 나로 하여금 당신에게서 은혜를 입게 하소서. 나는 당신의 자녀의 한 사람만도 못한데, 당신이 그처럼 나를 위로하시고, 그렇듯 시녀로 친밀하게 말해주시나이다).

 

즉 그녀는 이 접대에 값어치가 있는 자일뿐 아니라,

마침내는 호가의 부인될 수 있는 참가치를 가진 자였다.

 

솔로몬은, 잠언 1618절에 말했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

 

룻의 정절은 이미 보아스의 귀에 달해져 있었다.

 

(11-12 보아스가 대답하여 그에게 이르기를, ‘네가 남편이 죽은 후부터 이때까지, 시어머니에게 애써 한 일, 네가 부모 및 출생국을 떠나, 보지도 알지도 못하던 백성에게로 온 일, 모두 내게 전해졌도다. 원하기는 여호와께서 네 행위에 보답해 주실지어다.

12 원하기는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 즉 내가 그 날개 아래 몸을 의지코저 온 분께서, 네게 온전한 상을 주시기를).

 

하늘에 입이 없다. 사람으로 하여금 말하게 한다.

하늘에 귀 없다. 사람으로 하여금 듣게 한다.

 

하늘의 사자란 특종의 영을 말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믿음을 가진 보통 인간을 말함이다.

 

보아스 같은 이,

이는 진정한 하늘이 사자 아니랴!

 

영어의 Missionary(선교사), Minister(교법사, 목사) 등이라는 말은 모두,

보내심을 받은 자라는 뜻이다.

 

즉 사람을 구조하기 위해, 보내심을 받은 자를 말함이다.

 

그리고 마음을 다하고, (의향)을 다하여,

하나님께 쓰이는 자(섬기는 자)

누구나가 선교사이다. 목사이다.

즉 하늘의 사자이다.

 

선인이란,

의무로서 특별하게 선을 행하는 사람을 말함이 아니다.

직업적인 자선과 직업적인 전도란,

오인이 가장 싫어하는 것이다.

 

참된 선인의 선은, 그의 상성으로서,

누구에 대해서나, 때와 장소에 관계없이,

발표하는 것이다.

 

보라 보아스의 선행이

얼마나 자연스럽고,

얼마나 단순한가를.

 

그러므로 우리는 기회 있는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되 더욱 믿음의 가정들(신앙도)에게 할지니라(갈라디아서 6:10)’.

 

선을 행함에 있어서,

때와 사람과 장소를 가리지 말라.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마태복음 5:7)’.

 

잘 남편에게 쓰이는(섬기는) 참된 자,

잘 시어머니를 섬겨 순한 자,

어찌 긍휼을 입지 않으랴!

 

*내촌감삼의 글을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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