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8월 19일 월요일

블레셋 사람이 그를 잡아 그 눈을 빼고 놋줄로 매고 그로 옥중에서 맷돌을 돌리게 하였더라

  

사로잡힌 삼손

 

성 경: [16:18-23] 들릴라가 삼손의 진정을 다 토함을 보고 보내어 블레셋 사람의 방백들을 불러 가로되 삼손이 내게 진정을 토하였으니 이제 한 번만 올라오라 블레셋 방백들이 손에 은을 가지고 여인에게로 올라오니라

19) 들릴라가 삼손으로 자기 무릎을 베고 자게 하고 사람을 불러 그 머리털 일곱 가닥을 밀고 괴롭게 하여본즉 그 힘이 없어졌더라

20) 들릴라가 가로되 삼손이여 블레셋 사람이 당신에게 미쳤느니라 하니 삼손이 잠을 깨며 이르기를 내가 전과 같이 나가서 몸을 떨치리라 하여도 여호와께서 이미 자기를 떠나신 줄을 깨닫지 못하였더라

21)  돌리게 하였더블레셋 사람이 그를 잡아 그 눈을 빼고 끌고 가사에 내려가 놋줄로 매고 그로 옥중에서 맷돌을 돌리게 하였더

22) 그의 머리털이 밀리운 후에 다시 자라기 시작하니라

23) 블레셋 사람의 방백이 가로되 우리의 신이 우리 원수 삼손을 우리 손에 붙였다 하고 다 모여 그 신 다곤에게 큰 제사를 드리고 즐거워하고,

 

 

[16:18] 들릴라가 삼손의 진정을 다 토함을 보고 보내어 블레셋 사람의 방백들을 불러 가로되 삼손이 내게 진정을 토하였으니 이제 한 번만 올라오라 블레셋 방백들이 손에 은을 가지고 여인에게로 올라오니라

 

이제 한 번만 올라오라 - 이것으로 볼 때 들릴라는 블레셋 방백들에게 거의 신임을 잃고 있었던 것 같다.

뿐만 아니라 블레셋 인들도 더 이상 삼손의 비밀을 알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여 거의 포기 상태에 있었던 것 같다.

 

결국 이번 게임이 삼손에게는 마지막 승부에서 돈에 대해 강한 욕망을 가진 들릴라가 삼손을 이긴 것이다. 결국 삼손은 육욕에 눈이 어두워 신앙을 저버린 것이다.

 

 

[16:19] 들릴라가 삼손으로 자기 무릎을 베고 자게 하고 사람을 불러 그 머리털 일곱 가닥을 밀고 괴롭게 하여본즉 그 힘이 없어졌더라

 

괴롭게 하여본즉 그 힘이 없어졌더라 - 지금까지 들릴라는 삼손이 가르쳐 준 대로 그의 힘이 사라지게 하는 방법을 사용하면서도 스스로는 한 번도 정말 그의 힘이 없어졌는지 확인하지 않았다.

그런데 본 구절에서는 또 한 번의 실수를 범하지 않기 위해 자신이 직접 삼손을 시험하여 그의 힘이 없어졌는가를 확인하는 신중성을 나타냈다.

 

한편 삼손의 힘은 외적인 머리카락에 있었던 것이 아니다.

그것은 단지 나실인 으로서의 성별(聖別)의 상징이며 증거일 뿐이었다.

 

그러므로 그의 힘이 사라진 때는 그의 머리카락이 잘리운 때가 아니라, 오히려 그가 들릴라에게 진정을 토하여 하나님의 사람이 되기를 거부한 때에 사라졌다고 할 것이다(Lange, Matthew Henry).

 

 

[16:20] 들릴라가 가로되 삼손이여 블레셋 사람이 당신에게 미쳤느니라 하니 삼손이 잠을 깨며 이르기를 내가 전과 같이 나가서 몸을 떨치리라 하여도 여호와께서 이미 자기를 떠나신 줄을 깨닫지 못하였더라

 

여호와께서 이미 자기를 떠나신 줄을 깨닫지 못하였더라 - 구약 성경에서 이보다 슬픈 장면을 묘사한 구절은 없다.

 

14:40-45에는 이와 유사하게 모세가 자기 민족에게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너희 중에 계시지 아니하니 올라가지 말라 너희 대적 앞에서 패할까 하노라'(42)고 한 장면이 나온다.

 

아무튼 나실인의 상징인 머리털을 깎이운 삼손은 하나님의 종으로서의 자격을 상실하였으며,

따라서 하나님의 권능도 더 이상 그에게 머물지 않고 떠나 버렸다.

 

그러나 그런 사실도 모르고 위기에 처한 삼손은 예전의 힘을 과시해 보려고 하였다.

 

하지만 그는 무기력해진 자신과 사랑했던 여인으로부터 철저히 배신당하고 이방 대적들의 능욕거리로 전락한 스스로를 발견하고 절망과 회한 가운데 빠져들 수밖에 없었다.

 

무엇보다도 그를 절망케 만든 것은 하나님의 손길이 떠났다는 사실이었다.

 

따라서 우리는 본 장면을 통해, 다음 몇 가지 사실을 생각해 볼 수 있다.

 

(1) 성도들이 타락의 길로 들어서면 불신자들보다 더욱 비참한 형벌을 경험하게 된다.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이방 나라 백성들보다 더 높은 도덕 수준의 행실이 요구되었는데 특권에는 반드시 그에 상응하는 의무가 따르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2) 모든 사람은 죄 가운데 나서 자라고 죽기 때문에 하나님께로 부터 '버리심을 받아 마땅한 존재'들이다.

 

(51:5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

 

3:23 저에게 의로 여기셨다 기록된 것은 아브라함만 위한 것이 아니요).

 

그러나 죄인들을 대신하여 버림을 받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으로 말미암아,

 

(27:46 제 구 시 즈음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질러 가라사대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성도들은 거룩한 나라의 시민들로 인정받게 되었다.

 

3:20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서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3) '구원받은' 성도들은 더 이상 '개가 토했던 것을 다시 먹는' 식으로 구습(舊習)을 반복할 것이 아니라,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구원을 '이루어 나가야'하는 것이다.

 

(26:11 개가 그 토한 것을 도로 먹는 것 같이 미련한 자는 그 미련한 것을 거듭 행하느니라;

 

3:13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16:21] 블레셋 사람이 그를 잡아 그 눈을 빼고 끌고 가사에 내려가 놋줄로 매고 그로 옥중에서 맷돌을 돌리게 하였더라

 

 

그 눈을 빼고 - 고대 근동 지역에서는 승리자가 패한 자에게 이같이 잔인한 형벌을 내리는 것이 관례였다.

 

(16:14 이뿐 아니라 네가 우리를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지도 아니하고 밭과 포도원도 우리에게 기업으로 주지 아니하니 네가 이 사람들의 눈을 빼려느냐 우리는 올라가지 아니하겠노라;

 

왕하 25:7 시드기야의 아들들을 저의 목전에서 죽이고 시드기야의 두 눈을 빼고 사슬로 결박하여 바벨론으로 끌어갔더라).

 

유다의 마지막 왕 시드기야(Zedekiah), 느부갓네살에게 잡혔을 때 두 눈을 뽑히고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 간 일이 있다.

 

(왕하 25:7 시드기야의 아들들을 저의 목전에서 죽이고 시드기야의 두 눈을 빼고 사슬로 결박하여 바벨론으로 끌어갔더라).

 

한편으로 삼손이 당한 이런 형벌은 그가 눈으로 여인을 '보므로' 죄악에 빠진 당연한 결과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14:1 삼손이 딤나에 내려가서 거기서 블레셋 딸 중 한 여자를 보고;

 

16:1 삼손이 가사에 가서 거기서 한 기생을 보고 그에게로 들어갔더니).

 

예수님께서는,

 

"만일 네 오른 눈이 너로 실족케하거든 빼어 내버리라"(5:29)고 하셨다.

 

그리고 바울은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3:5)고 하였다.

 

 

맷돌을 돌리게 하였더니 - 본래 조그마한 맷돌은 가정에서 여인들이 돌리었다.

그러나 가축을 사용하여야만 돌릴 수 있는 정도의 큰 맷돌을 돌리는 일은 대개 노예가 맡아 하였는데 이는 노예의 사역 중에서도 가장 고된 일로서 천히 여기던 것이었다.

 

특히 이러한 형벌은 로마와 헬라 시대에 유행하였다.

(Lange, Hervey, Keil & DelitzschCommentary, Vol, 2, pp, 423 f).

 

 

[16:22] 그의 머리털이 밀리운 후에 다시 자라기 시작하니라

 

다시 자라기 시작하니라 - '시작하다'라는 단어는 이미 13:5에서도 나온 적이 있다.

 

(13:5 보라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머리에 삭도를 대지 말라 이 아이는 태에서 나옴으로부터 하나님께 바치운 나실인이 됨이라 그가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시작하리라)

 

그때와 마찬가지로 본 구절에서도 본서 기자는, 이 단어를 통하여 삼손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서 이스라엘의 구원이 다시 시작되었음을 보여 주고 있다.

 

그리고 또 육의 눈을 잃고 옥중에서 맷돌을 돌리는 중에 삼손이 서서히 영의 눈을 뜨기 시작하였음도 암시해 주고 있다.

 

 

[16:23] 블레셋 사람의 방백이 가로되 우리의 신이 우리 원수 삼손을 우리 손에 붙였다 하고 다 모여 그 신 다곤에게 큰 제사를 드리고 즐거워하고,

 

 

그 신 다곤에게 큰 제사를 드리고 - 다곤(Dagon)은 블레셋의 주신(主神)으로서 '날씨의 신'이라고 하기도 하고 '곡물의 신'이라고 하기도 한다.

 

그 명칭은 곡물을 뜻하는 '다간'에서 온 것이다(Philo).

 

그런데 중세 율법학자들은 가사(Gaza) 지역이 해안 지방인 것으로 보아 다곤은 '바다의 신'이며 그 명칭은 물고기를 뜻하는 '다그'에서 유래했다고 주장한다.

그 같은 주장도 상당히 일리가 있는바 오늘날에도 그런 견해를 추종하는 학자들이 일부 있다(Hervey, Cassel, Keil).

 

그러나 블레셋 사람들이 자기들의 토지를 황폐화시킨 삼손을,

 

(15:4-5 삼손이 가서 여우 삼백을 붙들어서 그 꼬리와 꼬리를 매고 홰를 취하고 그 두 꼬리 사이에 한 홰를 달고

5) 홰에 불을 켜고 그것을 블레셋 사람의 곡식 밭으로 몰아 들여서 곡식 단과 아직 베지 아니한 곡식과 감람원을 사른지라)

 

다곤 신이 자기들의 손에 붙였다고 찬양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다곤은 곡물 신임이 분명하다.

 

한편 이 다곤 숭배는 이스라엘 백성 중에서도 널리 유행되었는데,

 

벧산 지역에서 특히 많았고

 

(삼상 5:2-7 블레셋 사람이 하나님의 궤를 가지고 다곤의 당에 들어가서 다곤의 곁에 두었더니

3) 아스돗 사람이 이튿날 일찍이 일어나 본즉 다곤이 여호와의 궤 앞에서 엎드러져 그 얼굴이 땅에 닿았는지라 그들이 다곤을 일으켜 다시 그 자리에 세웠더니

4) 그 이튿날 아침에 그들이 일찍이 일어나 본즉 다곤이 여호와의 궤 앞에서 엎드러져 얼굴이 땅에 닿았고 그 머리와 두 손목은 끊어져 문지방에 있고 다곤의 몸둥이만 남았더라

5) 그러므로 다곤의 제사장들이나 다곤의 당에 들어가는 자는 오늘까지 아스돗에 있는 다곤의 문지방을 밟지 아니하더라

6) 여호와의 손이 아스돗 사람에게 엄중히 더하사 독종의 재앙으로 아스돗과 그 지경을 쳐서 망하게 하니

7) 아스돗 사람들이 이를 보고 가로되 이스라엘 신의 궤를 우리와 함께 있게 못할지라 그 손이 우리와 우리 신 다곤을 친다 하고)

 

다곤의 이름을 딴 도시도 있었다.(벧 다곤)

 

(19:27 꺾여 해 돋는 편을 향하여 벧 다곤에 이르며 스불론에 달하고 북편으로 입다 엘 골짜기에 미쳐서 벧에멕과 느이엘에 이르고 가불좌편으로 나가서).

 

 

즐거워하고 - 이에 해당하는 '사마흐''원기를 돋우다'는 뜻으로 대개 종교적 축제와 연관되어 사용되는 말이다.

 

이로 보아 블레셋 인들은 다곤에게 제사를 한 후, 축제를 베풀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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