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8월 27일 화요일

그들을 치러 올라가자 우리가 그 땅을 본즉 매우 좋더라

  

정탐꾼들의 보고

 

성 경: [18:7-10] 이에 다섯 사람이 떠나 라이스에 이르러 거기 있는 백성을 본즉 염려 없이 거하여 시돈 사람 같이 한가하고 평안하니 그 땅에는 권세 잡은 자가 없어서 무슨 일에든지 괴롭게 함이 없고 시돈 사람과 상거가 멀며 아무 사람과도 상관하지 아니함이라

8) 그들이 소라와 에스다올에 돌아와서 그 형제에게 이르매 형제들이 그들에게 묻되 너희 보기에 어떠하더뇨

9) 가로대 일어나서 그들을 치러 올라가자 우리가 그 땅을 본즉 매우 좋더라 너희는 가만히 있느냐 나아가서 그 땅 얻기를 게을리 말라

10) 너희가 가면 평안한 백성을 만날 것이요 그 땅은 넓고 그 곳에는 세상에 있는 것이 하나도 부족함이 없느니라 하나님이 너희 손에 붙이셨느니라.

 

 

[18:7] 이에 다섯 사람이 떠나 라이스에 이르러 거기 있는 백성을 본즉 염려 없이 거하여 시돈 사람 같이 한가하고 평안하니 그 땅에는 권세 잡은 자가 없어서 무슨 일에든지 괴롭게 함이 없고 시돈 사람과 상거가 멀며 아무 사람과도 상관하지 아니함이라

 

라이스에 이르러 - 라이스(Laish) 또는 레센(Leshen)이라고도 하는 이곳은 오늘날의 '텔 엘 카디'(Tell el Qadi)에 해당된다.

 

(19:47 그런데 단 자손의 지경이 더욱 확장되었으니 이는 단 자손이 올라가서 레센을 쳐서 취하여 칼날로 치고 그것을 얻어 거기 거하였음이라 그 조상 단의 이름을 따라서 레센을 단이라 하였더라)

 

팔레스틴 최북단에 위치한 이곳은 헬몬 산에 가려 아람과 단절되어 있고, 레바논 지역에 의해서 페니키아와도 단절되어 있어서 외침(外侵)을 받을 염려가 거의 없는 안전한 곳이었다.

 

그리고 요단 강에서 흘러나오는 물로 인하여 용수(用水) 또한 충분했기 때문에 힘이 약한, 단 지파의 정착지로서는 안성맞춤 이었다.

 

더욱이 원주민들은 이러한 천연적인 조건에 타성이 젖어 외침에 대해 무방비 상태일 뿐만 아니라 군사력도 빈약했으므로 단 지파가 정복하기에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곳이었다.

 

시돈 사람같이 한가하고 - 여기서 '한가하다'에 해당하는 '쉐케트''풍족한 가운데 여유를 즐기는 상태'를 의미한다.

 

실제로 시돈인들은 동서 교역의 중개지로서 또한 상아 제품 제조 산업 따위로 많은 부()를 벌어 들여 풍족한 경제생활을 구가하였다.

 

따라서 라이스 거민들이 이러한 시돈 사람 같은 경제생활을 누렸다함은 그들이 상당히 여유 있는 생활을 즐겼음을 의미한다(Goslinga, Pulpit Commentary).

 

권세 잡은 자가 없어서 - 여기서 라이스 사람이 한가하고 평안했던 이유 중의 하나로 권세 잡은 자가 없음을 들고 있다.

당시 고대 근동 지역의 왕들은 대체로 세습에 의한 독재자들이었고 이들은 외침을 막고 부강한 나라를 만든다는 이유로 많은 세금을 징수하고 사람들을 징용에 끌어넣었다.

 

그러나 라이스는 천연적인 요새(要塞)에 가까웠기 때문에 이러한 고통에 시달리지 않았던 것이다.

 

시돈 사람과 상거가 멀며 - 당시 라이스는 시돈의 통치하에 있었다.

그러나 시돈은 레바논 산맥의 장애로 인해 라이스를 관리하는 데 있어서 어려움을 겪었고, 또한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안정세를 누렸으므로 굳이 라이스에까지 간섭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였다.

 

따라서 라이스는 천연 방벽을 의지하여 사실상 독립된 생활을 누리고는 있었으나 자체 내의 방어 체제를 구비하지 못한 상태였으므로 뒤에 가서 단 자손의 침입을 막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28그들을 구원할 자가 없었으니 그 성읍이 베드르흡 가까운 골짜기에 있어서 시돈과 상거가 멀고 상종하는 사람도 없음이었더라 단 자손이 성읍을 중건하고 거기 거하며).

 

 

[18:8-9] 그들이 소라와 에스다올에 돌아와서 그 형제에게 이르매 형제들이 그들에게 묻되 너희 보기에 어떠하더뇨

9) 가로대 일어나서 그들을 치러 올라가자 우리가 그 땅을 본즉 매우 좋더라 너희는 가만히 있느냐 나아가서 그 땅 얻기를 게을리 말라.

 

일어나서 그들을 치러 올라가자 우리가 그 땅을 본즉 매우 좋더라 - 본 구절에서는 단 지파가 라이스를 공격하게 된 직접적인 동기가 무엇인가를 보여 주고 있다.

 

그 동기는 여호수아와 갈렙이 제시한 가나안 정벌의 신앙적 동기와 비교해 볼 때, 완전히 대조적인 것이었다.

 

(14:6-9 그 땅을 탐지한 자 중 눈의 아들 여호수아와 여분네의 아들 갈렙이 그 옷을 찢고

7)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 일러 가로되 우리가 두루 다니며 탐지한 땅은 심히 아름다운 땅이라

8) 여호와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면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시고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시리라 이는 과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니라

9) 오직 여호와를 거역하지 말라 또 그 땅 백성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은 우리 밥이라 그들의 보호자는 그들에게서 떠났고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 하시느니라 그들을 두려워 말라 하나)

 

그들은 일단 외형적으로 보기에 좋기 때문에 그 땅을 정벌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와 같이 신앙이 없는 자들은 안목의 정욕을 따라 자신의 행동 방향을 결정하게 되는 것이다.

 

 

[18:10] 너희가 가면 평안한 백성을 만날 것이요 그 땅은 넓고 그 곳에는 세상에 있는 것이 하나도 부족함이 없느니라 하나님이 너희 손에 붙이셨느니라

 

평안한 백성 - 이에 해당하는 '암보테하''방심한 백성'이란 뜻이다.

이는 라이스 거민들이 물질적 풍요와 천연적 방어벽을 과신하여 안이한 심경에 젖어 있었음을 나타내 준다.

 

하나님이 너희 손에 붙이셨느니라 - 일반적인 성전(聖戰)의 구호에서는 하나님의 명칭을 '여호와'로 사용하고 있다.

 

(1:2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유다가 올라갈지니라 보라 내가 이 땅을 그 손에 붙였노라 하시니라;

 

2:13 곧 그들이 여호와를 버리고 바알과 아스다롯을 섬겼으므로;

 

2:24 또 여호수아에게 이르되 진실로 여호와께서 그 온 땅을 우리 손에 붙이셨으므로 그 땅의 모든 거민이 우리 앞에서 간담이 녹더이다;

 

6:2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여리고와 그 왕과 용사들을 네 손에 붙였으니;

 

10:8 때에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그들을 두려워 말라 내가 그들을 네 손에 붙였으니 그들의 한 사람도 너를 당할 자 없으리라 하신지라;

 

삼상 7:8 사무엘에게 이르되 당신은 우리를 위하여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쉬지 말고 부르짖어 우리를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구원하시게 하소서)

 

그러나 여기서 단 사람들은 '엘로힘'이라는 명칭을 사용하고 있는데 그것은 아마 레위 소년에게 신탁을 구한 것과 관계있을 것이다.

 

(5그들이 그에게 이르되 청컨대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께 물어보아서 우리의 행하는 길이 형통할는지 우리에게 알게 하라).

 

따라서 본 구절에 기록된 성전 구호는 단순히 형식만 따랐을 뿐, 그 내용에 있어서는 본래의 성전 구호와 비길 수 없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단 지파의 전쟁이 하나님의 뜻과는 상관없이 자신들의 정욕을 쫓아 행하는 전쟁임을 분명히 알 수 있다.

 

즉 그들은 기업으로 받은 땅을 저버리고.

 

(11단 지파 가족 중 육백 명이 병기를 띠고 소라와 에스다올에서 출발하여)

 

심지어 우상 숭배에 깊이 젖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30-31단 자손이 자기를 위하여 그 새긴 신상을 세웠고 모세의 손자 게르손의 아들 요나단과 그 자손은 단 지파의 제사장이 되어 이 백성이 사로 잡히는 날까지 이르렀더라

31) 하나님의 집이 실로에 있을 동안에 미가의 지은바 새긴 신상이 단 자손에게 있었더라)

 

마치 하나님의 성전(聖戰)을 수행하고 있는 양, 행동하였던 것이다.

 

한편,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Soli Deo Gloria!)라는 표어는

 

모든 성도들에게 영원히 적용되어야 마땅하다.

 

(고전 10:31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그러나 현실의 복잡 다양한 제반 상황들에 적응하다 보면, 그러한 표어가 한낮 공허한 추상적 원리로 머물 때도 있으며 심지어는 그와 전혀 상반되는 일을 하면서도 그 표어대로 살고 있는 양, 착각하는 경우마저 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늘 스스로를 돌아보아 그러한 표어가 실제적이고도 구체적인 측면에서 자신의 존재 근거가 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렇게 할 때, 하나님의 크신 권능이 함께 하사 모든 대적들을 성도의 손에 붙이게 될 것이다.

 

(고후 10:4 우리의 싸우는 병기는 육체에 속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 앞에서 견고한 진을 파하는 강력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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