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할 곳을 찾는 단 지파
성 경: [삿 18:1-6]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었고 단 지파는 이 때에 거할 기업의 땅을 구하는 중이었으니 이는 그들이 이스라엘 지파 중에서 이때까지 기업의 땅 분배함을 얻지 못하였음이라
2) 단 자손이 소라와 에스다올에서부터 자기 온 가족 중 용맹 있는 다섯 사람을 보내어 땅을 탐지하고 살피게 하며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가서 땅을 살펴보라 하매 그들이 에브라임 산지에 가서 미가의 집에 이르러 거기서 유숙하니라
3) 그들이 미가의 집에 가까이 올 때에 레위 소년의 음성을 알아듣고 그리로 돌이켜 가서 그에게 이르되 누가 너를 이리로 인도하였으며 네가 여기서 무엇을 하며 여기서 무엇을 얻었느냐
4) 그가 그들에게 이르되 미가가 여차여차히 나를 대접하여 나를 고빙하여 나로 자기 제사장을 삼았느니라
5) 그들이 그에게 이르되 청컨대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께 물어보아서 우리의 행하는 길이 형통할는지 우리에게 알게 하라
6) 그 제사장이 그들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너희의 행하는 길은 여호와 앞에 있느니라.
[삿 18:1]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었고 단 지파는 이 때에 거할 기업의 땅을 구하는 중이었으니 이는 그들이 이스라엘 지파 중에서 이때까지 기업의 땅 분배함을 얻지 못하였음이라
▶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었고 - 17:6에 이어 본서 기자는 여기서 또다시 왕정제도의 필요성을 시사하고 있다.
(17:6 그 때에는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마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그러나 이 둘 간에는 강조점의 차이가 있다.
즉 앞서 17:6에서는 개개인의 종교적 타락을 방지하기 위해서 왕정 제도의 필요성을 시사했었다.
반면 본 구절에서는, 자기 기업을 지키지 못하고 외세에 밀려나는 약한 지파를 왕정제도에 의해 강대하게 함으로써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를 온전케 보존 할 필요성이 있음을 시사하고 있다.
▶ 기업의 땅 분배함을 얻지 못하였음이라 - 본래 단 지파는 여호수아 생존 시에 기업을 분배 받았었다.
(수 19:40-46 일곱째로 단 자손의 지파를 위하여 그 가족대로 제비를 뽑았으니
41) 그 기업의 지경은 소라와 에스다올과 이르세메스와
42) 사알랍빈과 아얄론과 이들라와
43) 엘론과 딤나와 에그론과
44) 엘드게와 깁브돈과 바알랏과
45) 여훗과 브네브락과 가드 림몬과
46) 메얄곤과 락곤과 욥바 맞은편 경계까지라).
그러나 가나안 정착 초기에 분배받은 땅을 차지하지 못하고, 도리어 아모리 족속에 의해 쫓겨난 타 지파의 땅에 분산 거주하거나 새로운 정착지를 떠도는 신세가 되었던 것이다.
(1:34 아모리 사람이 단 자손을 산지로 쫓아들이고 골짜기에 내려오기를 용납지 아니하고).
한편 1:34에서 본서 기자는 단이 분배받은 기업을 차지하지 못한 것은 요셉 족속이나 유다 지파처럼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했기 때문임을 암시했었다.
그런데 본 구절에서는 그 이유를 왕이 없는 것과 연관시키고 있다.
따라서 왕정 제도의 필요성에 대한 주장은 단순히 본서 기자의 주석이 아니라
그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지고 있던 보편적인 견해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삿 18:2] 단 자손이 소라와 에스다올에서부터 자기 온 가족 중 용맹 있는 다섯 사람을 보내어 땅을 탐지하고 살피게 하며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가서 땅을 살펴보라 하매 그들이 에브라임 산지에 가서 미가의 집에 이르러 거기서 유숙하니라
▶ 단 자손이 소라와 에스다올에서부터 - 삼손의 고향이자 단 지파의 기업이던,
(13:2-5 소라 땅에 단 지파의 가족 중 마노아라 이름하는 자가 있더라 그 아내가 잉태하지 못하므로 생산치 못하더니
3) 여호와의 사자가 그 여인에게 나타나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가 본래 잉태하지 못하므로 생산치 못하였으나 이제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4) 그러므로 너는 삼가서 포도주와 독주를 마시지 말지며 무릇 부정한 것을 먹지 말지니라
5) 보라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머리에 삭도를 대지 말라 이 아이는 태에서 나옴으로부터 하나님께 바치운 나실인이 됨이라 그가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시작하리라,
24 여인이 아들을 낳으매 이름을 삼손이라 하니라 아이가 자라매 여호와께서 그에게 복을 주시더니)
소라와 에스다올은,
(수 19:41 그 기업의 지경은 소라와 에스다올과 이르세메스와)
유다 지파와 단 지파의 경계 지역이다.
이 중 소라는, 예루살렘 동쪽 약 65km 지점에 위치한 성읍이며
에스다올은, 소라의 동북쪽 약2.5km 지점에 위치한 성읍이다.
한편 본래 이 소라와 에스다올은 유다 지파의 기업이었는데,
(수 15:33 평지에는 에스다올과 소라와 아스나와)
훗날 기업을 재조정하면서 단 지파에게 분배되었다.
그러나 단 지파는 이곳에 안주(安住)치 못하고 많은 수가 새로운 정착지를 찾아 이주하였는데,
(11절 단 지파 가족 중 육백 명이 병기를 띠고 소라와 에스다올에서 출발하여)
전술(前述)한 바와 같이 아모리족의 침입 때문이었다.
(1:34 아모리 사람이 단 자손을 산지로 쫓아들이고 골짜기에 내려오기를 용납지 아니하고).
▶ 다섯 사람을 보내어 땅을 탐지하고 - 단 지파는 그들이 정착하기에 적합한 땅을 찾기 위해 그들의 씨족 가운데서 용맹한 다섯 사람을 미리 정탐꾼으로 파견하는 등 나름대로 치밀한 계획을 세웠다.
아마도 단 지파는 이러한 준비를 하면서 마치 여호수아의 가나안 정복을 재현하는 듯한 꿈에 젖었는지도 모른다.
(수 2:1 눈의 아들 여호수아가 싯딤에서 두 사람을 정탐으로 가만히 보내며 그들에게 이르되 가서 그 땅과 여리고를 엿보라 하매 그들이 가서 라합이라 하는 기생의 집에 들어가 거기서 유숙하더니).
하지만 약속의 유업조차 제대로 간수하지 못한 자들이, 신개척지를 얻는다 하여 거기서 신실한 언약 백성의 모습을 존속시킬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강한 의구심으로 남겨질 수밖에 없다.
사실상 의구심 그대로 그들의 불순하고 패역한 자태는 본장에 확연히 기록되고 있다.
(5 그들이 그에게 이르되 청컨대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께 물어보아서 우리의 행하는 길이 형통할는지 우리에게 알게 하라,
30절 단 자손이 자기를 위하여 그 새긴 신상을 세웠고 모세의 손자 게르손의 아들 요나단과 그 자손은 단 지파의 제사장이 되어 이 백성이 사로 잡히는 날까지 이르렀더라).
한편 단 지파의 북쪽 이주에 대한 기사를 요약하고 있는 수 19:47에서는 이 사건으로 인하여 단 지파의 지경이 확장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수 19:47 그런데 단 자손의 지경이 더욱 확장되었으니 이는 단 자손이 올라가서 레센을 쳐서 취하여 칼날로 치고 그것을 얻어 거기 거하였음이라 그 조상 단의 이름을 따라서 레센을 단이라 하였더라)
[삿 18:3] 그들이 미가의 집에 가까이 올 때에 레위 소년의 음성을 알아듣고 그리로 돌이켜 가서 그에게 이르되 누가 너를 이리로 인도하였으며 네가 여기서 무엇을 하며 여기서 무엇을 얻었느냐
▶ 레위 소년의 음성을 알아듣고 - 정탐꾼들은 소라와 에스다올에서 북쪽으로 가던 도중 에브라임 산지에 있는 미가의 신당 옆을 지나게 되었는데,
(17:1 에브라임 산지에 미가라 이름하는 사람이 있더니,
5 이 사람 미가에게 신당이 있으므로 또 에봇과 드라빔을 만들고 한 아들을 세워 제사장을 삼았더라)
이때 레위 소년의 음성을 듣고 발을 멈추게 되었다.
이들이 어떻게 레위 소년의 음성을 금방 알아들었는지는 분명치 않으나
다음 두 가지 경우로 추측해 볼 수 있다.
(1) 이 레위 소년이 베들레헴을 떠날 때,
(17:8 이 사람이 거할 곳을 찾고자 하여 그 성읍 유다 베들레헴을 떠나서 행하다가 에브라임 산지로 가서 미가의 집에 이르매)
소라와 에스다올 지역을 지나쳐 왔기 때문에 정탐꾼들과 친분이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Wycliffe, Matthew Henry).
(2) 에브라임의 방언은 특색이 있는데,
(12:6 그에게 이르기를 십볼렛이라 하라 하여 에브라임 사람이 능히 구음을 바로 하지 못하고 씹볼렛이라 하면 길르앗 사람이 곧 그를 잡아서 요단 나루턱에서 죽였더라 그 때에 에브라임 사람의 죽은 자가 사만 이천 명이었더라)
이 소년은 에브라임 방언을 쓰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이상하게 여겨졌을 가능성도 있다(A.C. Hervey).
한편 이 밖에도 혹자는 단 사람들이 밤에 미가의 집에서 유숙하고 아침에 일어났을 때 제물을 드리는 제사장의 종소리를 듣고,
(출 28:35 아론이 입고 여호와를 섬기러 성소에 들어갈 때와 성소에서 나갈 때에 그 소리가 들릴 것이라 그리하면 그가 죽지 아니하리라)
레위인이 거기에 있다는 것을 알았을 것으로 추측한다(Cassel).
그러나 본 구절은 분명히 단 사람들이 미가 집을 발견하고선 그곳에 유숙하러 가다가 레위 소년을 만났음을 보여주고 있다. 따라서 그 같은 추측은 개연성(蓋然性)이 없다.
▶ 네가 여기서 무엇을 하며 여기서 무엇을 얻었느냐 - 이 구절로 볼 때 단 사람들은 레위 소년이 생계 수단을 구하기 위해 떠돌아 다녔던 사정을 잘 알고 있었던 듯하다.
이는 정탐꾼들이 레위 소년을 금방 알아본 이유가 이전에 이미 안면이 있었기 때문일 가능성을 한층 짙게 해준다.
[삿 18:4] 그가 그들에게 이르되 미가가 여차여차히 나를 대접하여 나를 고빙하여 나로 자기 제사장을 삼았느니라
▶ 나를 고빙하여 - 여기서 '고빙하다'에 해당되는 '사카르'는 임금을 주고 고용하는 것을 가리킨다.
즉 본 구절에서 레위 소년은 자신이 삯을 받고서 제사장으로 고용된 것을 자랑스럽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당시 종교인들이 얼마나 부패했던가를 보여 주는 단적인 증거이다.
즉 제사장이라는 직분은, 하나님께로 부터 세우심을 받는 성직(聖職)인데도 불구하고, 레위 소년은 이에 대하여 천박한 직업의식을 드러내었던 것이다.
한편 오늘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성도들 또한 왕 같은 제사장들로서 복음을 증거하고 그 안에서 서로 교제하는 성스러운 일을 감당해야 할 사명이 있다.
(마 28:19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침례를 주고;
벧전 2:9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그리고 이러한 사명을 감당함에 있어서 상업적 이해관계가 개입되어서는 아니 되며, 다만 서로 사랑하는 마음에서 피차의 부족함을 채우는 일이 요청된다.
(고후 8:14 이제 너희의 유여한 것으로 저희 부족한 것을 보충함은 후에 저희 유여한 것으로 너희 부족한 것을 보충하여 평균하게 하려 함이라).
왜냐하면 성도들이 누리는 복음은 값없이 은혜로 주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고전 9:18 그런즉 내 상이 무엇이냐 내가 복음을 전할 때에 값없이 전하고 복음으로 인하여 내게 있는 권을 다 쓰지 아니하는 이것이로라).
특히 교회의 교직자(敎職者)들은 자칫 천박한 직업의식에 빠져 거룩한 복음 사역에 차질을 빚지 않도록 주의해야 하며 삯꾼이 아니라 선한 목자로 봉사하기를 힘써야 한다.
(요 10:11-12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12) 삯꾼은 목자도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니라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나니 이리가 양을 늑탈하고 또 헤치느니라).
그리고 교회에 소속된 모든 성도들은 교직자로 하여금 복음 사역에 전무할 수 있도록 적극 협조하여야 한다.
(행 6:4 우리는 기도하는 것과 말씀 전하는 것을 전무하리라 하니).
[삿 18:5] 그들이 그에게 이르되 청컨대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께 물어보아서 우리의 행하는 길이 형통할는지 우리에게 알게 하라
▶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께 물어보아서 - 1:1에서는 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와'께 신탁을 구했는데
(1:1 여호수아가 죽은 후에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묻자와 가로되 우리 중 누가 먼저 올라가서 가나안 사람과 싸우리이까)
본 구절에서는 단 사람들이 '엘로힘'께 신탁을 구하고 있다.
그것은 아마 이 레위 소년이 에봇과 드라빔을 사용하고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Cassel).
(17:5 이 사람 미가에게 신당이 있으므로 또 에봇과 드라빔을 만들고 한 아들을 세워 제사장을 삼았더라)
한편 단 사람들이 하나님을 '엘로힘'으로 호칭한 것으로 보아 그들은 이 레위인이 섬기는 신이 이스라엘의 언약의 하나님 여호와가 아닌, 가나안의 어떤 신인 것으로 생각했는지도 모른다(Goslinga).
[삿 18:6] 그 제사장이 그들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너희의 행하는 길은 여호와 앞에 있느니라.
▶ 너희의 행하는 길은 여호와 앞에 있느니라 - 단 사람들과 달리
이 레위 소년은
'여호와'라는 명칭을 사용하고 있다.
이것은 그가 간접적이나마 단 사람들에게
자신이 여호와께 신탁을 구할 자격이 있는
합법적인 제사장임을 강조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한편 여기서 '그 길이 여호와 앞에 있다'는 말은
여호와께서 그 길을 주장하고 계시니 모든 것이 형통할 것이라는 뜻이다.
(Matthew Henry).
KJV 성경은 이를 그 제사장이 그들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너희가 가는 길이 주 앞에 있느니라'로 번역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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