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를 알려는 다니엘 3
(다니엘 12:5-13 그때에 나 다니엘이 보니, 보라, 다른 두 사람이 서 있는데 하나는 강둑의 이쪽에, 다른 하나는 강둑의 저쪽에 있더라.
6) 하나가 아마포 옷을 입고 강물 위에 있던 사람에게 이르되, 얼마나 있어야 이 이적들의 끝이 이르겠느냐? 하매
7) 내가 들었는데 아마포 옷을 입고 강물 위에 있던 사람이 자기의 오른손과 왼손을 하늘을 향해 올리고 영원토록 사시는 이를 두고 맹세하여 이르되, 그것은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에 관한 것이니 그가 거룩한 백성의 권세를 흩어 놓는 일을 이루게 될 때에 이 모든 일이 끝나리라 하더라.
8) 내가 듣고도 깨닫지 못하였으므로 그때에 이르되, 오 내 주여, 이 일들의 끝이 어떠하겠나이까? 하매
9) 그가 이르되, 다니엘아, 네 길로 가라. 주께서 끝이 임하는 때까지 그 말씀들을 닫아 두고 봉인하셨느니라.
10) 많은 사람이 정결하게 되고 희게 되며 단련을 받을 터이나 사악한 자들은 사악하게 행하리니 사악한 자들 중에서는 아무도 깨닫지 못하되 지혜로운 자들은 깨달으리라.
11) 날마다 드리는 희생물을 제거하며 황폐하게 하는 가증한 것을 세우는 때로부터 천이백구십 일이 있으리라.
12) 기다려서 천삼백삼십오 일까지 이르는 자는 복이 있도다.
13) 그러나 너는 끝이 이를 때까지 네 길로 가라. 네가 안식하다가 그 날들의 끝에 네 몫으로 정한 곳에 서리라. (KJV 한글)
여기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 수 있다.
[1] 안티오커스에 의해서
"매일 드리는 제사가 폐해지고" 멸망케 할 미운 물건,
즉 쥬피터의 신상이 제단 위에 세워지는 사건으로부터
재난의 때가 결정될 것이다.
그들은 공적 규례의 혜택을 빼앗기게 되었을 때,
그들의 재난이 시작된다는 것을 분명히 깨달아야만 했다.
그것은 그들에게 슬픔의 시작이었다.
그것은 그들이 가장 마음에 두었던 것이었다.
[2] 그들의 환란의 계속, 그 재난은 1290일 동안 계속될 것이다.
그것은 3년 7개월, 혹은 3년 6개월 15일이다.
그 뒤에 매일의 제사가 회복되고 멸망의 가증한 것이 제거되었을 것이다.
그 기념으로 봉헌의 축제가 우리 구세주의 때까지 준수될 것이다.
(요 10:22 예루살렘에 성전 봉헌절이 이르렀는데 때는 겨울이더라).
비록 날자까지 정확히 맞았다는 것이 역사적으로 나타나진 않지만,
재난의 시작이 셀류커스 왕조(Seleucidae)의 145년째에 있었고,
그 재난의 끝이 148년되는 해에 있었던 것으로 나타난다.
제사의 회복과 우상의 제거가 아주 많은 날이 지난 후였는지,
아니면 어떤 다른 이전의 사건들이 두드러졌는지도 기록되어 있지 않다.
성서의 예언 가운데서 많은 특정한 때가 나오는데
성속을 불문하고 역사상 사건이 그것과 일치했다는 확실한 증거는 알 수 없다.
그러나 그런 예언은 의심할 나위도 없이 그대로 응했을 것이다(사 16:14 의 경우처럼).
(사 16:14 이제 주께서 말씀하여 이르시되, 품꾼의 햇수대로 삼 년 안에 모압의 영광이 그 큰 무리 모두와 함께 경멸당하고 그 남은 자들이 심히 적어 미약하리라, 하셨도다)
[3] 그들의 구원의 완성, 혹은 구원을 향한 최소한의 전진이 기록되어 있다.
그것은 이전의 때보다 45일이 더 경과 된다.
어떤 사람들은 안티오커스의 죽음을 지적하면서,
그가 성전을 더럽힌 후 1335일이 지난 때라고 생각한다.
"기다려서 1335 일까지 이르는 그 사람은 복이 있다.".
안티오커스는 희랍 제국의 149년 되는 해에 죽었다고 말해진다(마카비상 6:16).
그리고 그때에 마카비가
하나님의 지휘로 성전과 도성을 회복하였다고 말해진다(마카비하서 9:28; 1:1).
많은 선한 해석자들은 이것을 예언적 날들(즉 아주 많은해로)로 이해하며,
그것을 로마군에 의한 예루살렘의 파괴로부터 계산한다.
그러나 어떤 사건이 그들에게 임할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일치하지 않는다.
다른 사람들은 그때를 적 그리스도에 의한 복음숭배의 타락으로부터 추정한다.
적 그리스도의 통치는 계시록에서 1260일로 한정된다.
그때의 마지막에 그는 멸망하기 시작할 것이다.
그리고 30년 후, 즉 1290일의 마지막 날에 완전히 멸망할 것이다.
그리고 40년을 더 사는 사람은 누구나,
그래서 1335일까지 사는 사람은 진실로 영광스러운 날을 볼 것이다.
그것이 그토록 멀리까지 가리키는지 아닌지에 대해서는 나는 말할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것을 배울 수 있을 것 같다.
첫째, 교회의 재난을 종결시킬 때가 결정되어 있다.
그리고 교회의 구원의 때도 있다.
그리고 이 때는 정확하게 하루도 틀리지 않고 준수될 것이다.
둘째, 이때는 신앙과 인내로 기다려야만 한다.
셋째, 그때가 올 때,
그날은 우리의 오랜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풍부한 보상이 될 것이다.
오래 기다려 마지막까지 온 사람들은 복이 있다.
왜냐하면 그 때 그들은
"보라! 이분은 우리의 하나님이시며 우리는 그분을 기다렸다" 라고
말할 이유를 갖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Ⅱ. "이 모든일의 결국이 어떠하겠읍니까?" 라는 질문이 다니엘의 입에서 나왔다.
그리고 그 질문에 대한 답이 주어진다.
다음과 같은 점을 더 연구해 보자.
1. 왜 다니엘은 그렇게 물었는가?
그것은 다니엘이 천사에게 말씀하시는 것을 듣긴 했으나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8절 내가 듣고도 깨닫지 못하였으므로 그때에 이르되, 오 내 주여, 이 일들의 끝이 어떠하겠나이까?).
다니엘은 대단히 지혜있는 사람이었고,
환상과 예언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다니엘은 때의 의미를,
자기가 원한만큼 확실히 명확하게 이해하지 못했다.
가장 훌륭한 사람들도 때때로 신적 일에 대한 물음에서
당혹을 느끼며 이해하지 못할 일을 만나게 되기도 한다는 데 주목하자.
그러나 그들이 더 훌륭한 것을 그들이 그들 자신의
약함과 무지를 알고 기꺼이 인정한다는 점이다.
또 그것을 알려고 노력한다는 점이다.
2. 그 질문은 무엇이었는지를 살펴보자.
"오, 내 주여! 이 모든 일의 결국이 어떠하겠나이까?",
다니엘은 그의 질문을 천사들에게 말하지 않고 바로 그리스도께 말했다.
우리는 그리스도 외에 달리 누구에게 우리의 문제를 가지고 가야 하겠는가?",
이 사건들의 최후의 결과는 무엇이겠습니까?
그들은 어떤 경향을 나타낼 것입니까?
그들은 결국 어떻게 될 것입니까?
우리는 이 세상사와 세상에 있는 하나님 교회의 일들을 관찰할 때,
우리는 이 일들의 마지막이 어떻게 될 것인지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가 보기로는 사태가 하나님 나라의 파멸로 줄달음치는 것 같다.
우리가 악덕과 불경건의 성행을,
그리고 종교의 부패, 의인들의 고난,
그리고 불신자들의 승리를 보게 될 때,
우리는 이렇게
"내 주여! 이 모든 일들의 결국이 어떠하겠삽나이까? 하고 묻기 쉽다.
그러나 결국 최후에 가서는
만사가 잘 될 것이란 것은 우리를 만족시켜 준다.
진리는 위대하며,
결국은 승리할 것이며 영원히 존귀한 가운데 있을 것이다.
그 끝,
그런 결국이 올 것이다.
3. 이 질문에 무슨 답변이 주어졌는지 살펴보자.
때에 대한 것뿐만 아니라,
(11-12절 날마다 드리는 희생물을 제거하며 황폐하게 하는 가증한 것을 세우는 때로부터 천이백구십 일이 있으리라.
12) 기다려서 천삼백삼십오 일까지 이르는 자는 복이 있도다).
여기에는 다니엘에게 대한 몇몇 지시가 나온다.
그 지시에 의해서 다니엘은 앞으로의 봉사로부터 물러가게 된다.
(1) 다니엘은 그에게 알려진 것들로 만족해야만 한다.
그리고 더 이상 물어서는 안 된다.
"다니엘아! 너는 이제 가거라.
미래의 일을 예견하도록 허락된 것에 만족하고 여기에서 그치라!
다시 왕의 사업에 대한 너의 길로 가거라.
(8:27 나 다니엘이 기절하여 며칠을 앓다가 그 뒤에 일어나서 왕의 일을 행하였느니라. 내가 그 환상으로 말미암아 놀랐으나 아무도 그것을 깨닫지 못하더라).
너의 길로 가거라.
그리고 네가 보고들은 것을 후세의 구원을 위해서 기록하라.
그리고 지금은 더 많은 것을 보고 들으려고 갈망하지 말라.".
하나님과의 교제가 이 세상에서는 우리들의 계속적인 잔치가 아니라는 사실을 주목하자.
우리는 때때로 그리스도의 영광을 증거하기 위해서 선택되고,
그래서 "여기에 있는 것이 좋사오니" 하고 말한다.
그러나 우리는 산에서부터 땅으로 내려가야 한다.
우리는 거기에 영원한 도시를 가지고 있지 않다.
많은 것을 아는 사람들도 사실은 "부분밖에" 모르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자기들이 여전히 캄캄하게 모르는 일이 많으며
휘장이 찢겨지기까지는 그럴 것이라는 것을 안다.
여기까지는 그들의 지식이 갈 것이다.
그러나 그 이상 더 가지는 못할 것이다;
"다니엘아 너는 여기서 만족하고 가라.".
(2) 다니엘은 자기가 들었던 말씀을 그 성취 시기까지
완전히 이해하려고 기대해서는 안 되었다.
"이 말은 마지막 때까지,
이 일들의 끝까지 간수하고 봉함되며 혼란 속에 들어 있다.
아니, 만물의 마지막 때까지 봉해져 있다.".
다니엘은 이 책을 마지막 때까지 봉함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4절 그러나, 오 다니엘아, 너는 끝이 임하는 때까지 그 말씀들을 닫아 두고 그 책을 봉인하라. 많은 사람이 이리저리 달음질하고 지식이 증가하리라).
유대인들은 엘리야가 오면 모든 것을 말해 줄 것이라고들 말했다.
"그 말씀들은 덮어져서 봉인되었다.
즉 그 말씀으로 발견하도록 의도된 것은 이제 완전히 고정되고 끝이 났다.
아무 것도 거기에 참가되지 않을 것이며
아무 것도 거기에서부터 취해지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간수되고 봉인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후의 일에 대해서 더 이상 묻지 말라!".
Neescire velle qua magister maximus docre non vult erudita inscitia est-
즉 위대한 선생이 알리려고 하지 않는 일들을
기꺼이 알려고 하지 않는 자는 많은 것을 배운 사람이다.
(3) 다니엘은 이 세상이 계속되는 한,
우리가 지금 보는 것처럼
선한 것과 악한 것이 혼합되어 있다는 것을 고려해야만 했다.
(10절 많은 사람이 정결하게 되고 희게 되며 단련을 받을 터이나 사악한 자들은 사악하게 행하리니 사악한 자들 중에서는 아무도 깨닫지 못하되 지혜로운 자들은 깨달으리라).
우리는 하나님의 밭에서 가라지는 전혀 못 보고,
온통 밀만보며 그의 타작 마당에서 알곡만 보고
겨는 찾아보지 못하게 되기를 원한다.
그러나 추수의 때가 올 때까지,
키질하는 날이 이르기까지는 그렇지 못할 것이다.
두 가지 모두가 추수할 때까지 같이 자라야 한다.
과거에도 그랬듯이 지금도 그러하고 또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악한 사람은 악을 행할 것이나 지혜있는 자는 깨달으리라.".
사도 요한의 계시록은 다른 일에서처럼
여기서도 다니엘과 같이 끝맺고 있다.
"더러운 자는 그대로 더럽고, 거룩한 자는 그대로 거룩되게 하라." (계 22:11).
* 도표 시대와 경륜
출처 : 한글 킹제임스 흠정역, 마제스티 에디션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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