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8월 28일 일요일

며느리와 시어머니의 복음

  

정조(情操)미담(美談) 룻기

 

 

서언,

 

-일명 며느리와 시어머니의 복음-

 

유명한 벤자민·프랭클린(1296, 303p참조)

일찍이 사신으로서, 불국(France)의 조정에 있을 무렵,

혁명시기(1138, 281p 프랑스 대혁명 참조)를 앞두고 있어서,

무신론, 무종교가 한창(가장) 유행하는 때였다.

 

프랭클린 그 자신도,

당시의 그리스도교에 대해서는,

그리 열심 있는 사람이 아니었고,

그의 본국에 있을 때는,

그는 언제나 무종교가로서 취급된 사람이었다.

 

그런데 불국에 이르러,

당시의 학자라 칭하는 자가,

함부로 그리스도교를 조롱함을 듣고서

때로는 그들의 천박불경을 분내지 아니치 못한 일이 있었다고 한다.

 

어떤 날, 이런 무리()의 학자,

즉 그들 자신 철학자라 자칭하는 몇 명과,

어떤 여관에 회동하게 된 때,

철학자는 입을 모아,

 

바이블 Bible(성서)’의 야비스럽고도 문학적인 취미에 부족되어 있음을 조소했다.

 

고언매도(대성비난),

실로 사람으로 하여금 듣고서 견디기 어렵게끔 했다.

 

프랭클린,

그리스도교에 냉담했지만도,

지금은 그의 부모의 종교 위해 일종의 변호를 시도하지 않을 수 없음에 이르렀다.

 

따라서 곧 동숙의 한 여우(여배우)에게 청하여,

이들 철학자 앞에서 구약 성서 중 룻기를 읽게 했다.

 

그렇지만,

먼저 그 책이 어떤 것인지를 밝히 말하지 않고,

다만 학자들에게 일러 말하기를

 

나는 요즈음 동양의 구기에서 한 아름다운 이야기(일가화)를 얻었는데,

이제 여우 아무개의 친절에 의해,

이것을 여러분 앞에 낭독해 드리련다.

 

만좌 숙연해졌다.

여우는, 정신과 감정을 살려가며, 룻기를 읽었다.

 

철학자들은,

그 문의의 고묘함과 그 취향(의사)의 단순 청렴함을 상탄하여 마지않았다.

독료 후 만장의 학자들은 깊이 프랭클린의 후의를 감사하며,

또 물어 이르기를

 

아니 그런 아름다운 이야기(가화 a beautiful story),

선생님(그대)은 어디서 얻었습니까?

 

그 아름다움, 그 묘함,

이때까지 일찍이 우리가 맛보지 못했던 것입니다라고.

 

프랭클린은 상탄이 그치기를 기다려,

숙연히 서서 고하여 말했다.

 

이는 실로 귀공들이, 나쁘게 깍아 내리면서 말하고,

비웃으며(폄시 조매)하여 마지않던 옛 성서 중에 기재되어 있는 룻기입니다’.

 

그러고 나서, 가만히 있었다.

철학자 무리는, 그러자 부끄러운 얼굴을 붉히면서 할 말을 찾지 못하고,

한 사람가고 두 사람 물러가,

잠시 동안에 실내에는 프랭클린과 여우를 제외한 외에, 아무도 없게 되었다고.

 

프랭클린의 재치(기지),

철학자의 무학,

룻기의 절묘,

모두 이 하나의 소화에,

흠잡을 데 없이 수록하고 있다.

 

성서를 비난하는 사람은 성서를 읽지 않는 사람이다.

성서를 단순히 엄격한 윤리만을 교시하는 것으로 믿는 사람은,

아직 성서를 모르는 사람이다.

 

모세율(율법)아래서 생장한 국민은

그저 엄숙한 여호와의 명만을 알고,

온아한 가족의 기풍,

우미한 대객의 습관을 경시하는 자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직 유대 국민의 내부를 모르는 사람이다.

 

참담한 전사 중에,

당당한 예언과 함께,

우아한 이기사가 삽입되어 있다.

 

이는 실로 유대국민 하층의 상태로서,

저 시인 다윗을 양성케 한 것,

저 예언자(선지자) 사무엘을 사람 되게 한 것,

또 때가 차서,

세상의 큰 빛, 세상에 임하려하자,

나사렛 벽촌 일소공(목공)의 모옥(초가집 a thatched cottage) 내에 있어서,

샤론의 장미 같은 영웅을 만들어낸 것은,

실로 룻기에 기재되어 있는 가정생활이,

그렇게 만든 것이 아니고 무엇이랴!

 

이 룻기에 기재한 것은,

다만 유대 인민가족의 상태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을 료리학상에서 논한다면,

섭리에 관한 문제,

출가한 자의 그 시어머니에 대한 의무,

신도 미신도간 결혼문제-특히 신애신택의 불편부당을 가르치기에 이르러서는,

모름지기 성서중 이 기사같이,

가장 명석(clearness)하고,

가장 미묘한 것은 없을 것이다.

 

문장에서 허식 없고,

그 기사에 은폐(concealment)의 흔적(traces)도 없다.

 

오인(I, we)은 이를 의심하려 해도, 할 수가 없다.

 

만약 칼라일(Carlyle, T. 1182p 참조)이 말한 대로

 

역사는 실례로써 가르치는 철학이다라고 한다면,

 

룻기 같은 것은,

겨우(근근) 수천자 안에 무량의 깊은 뜻(심의)을 포함하는 철학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그 기사의 명료 담백함이란

최소량의 상식을 가진 사람도 이것을 알 수 있고,

그 교훈의 심원함이란,

국민의 양심을 자극하기에 족하다.

 

꾸밈없이 간단하게 기재된 사실보다 나은 희곡 없다.

하나님께서 고절(정조)를 인도하시는 길은,

평이하고도 기적 같고,

자연스럽고도 시가와 같다.

 

이 기사는, 본래는 사사기의 일부로서 있었지만도

후에 일서로서 여기에 붙이기에 이르렀다.

 

우리는 이 기사가 처음으로 이룩된 연월을 판연하게 정할 길 없다.

또 그 기자 같은 것도, 다만 억측으로 그칠 뿐이다.

 

그것이 다윗왕의 혈통에 관한 것임을 보면,

혹은 예언자(선지자) 사무엘의 손으로 된 것일지?

 

그렇지만, 수많은 세계문학과 함께,

이 글()이 수일한 문학상의 가치를 지니고 있음의 사실은,

이를 즐겨 읽는데 있어서,

그 연대와 저자의 소상(자세)함을 필요로 하지 않는 것이다.

 

그렇지만, 문학상의 수일함에서가 아니라,

또 교리학상의 공용 있음에 있어서가 아니라,

그것이 우리나라 오늘의 실제 문제에 대 관계를 가지고 있는 까닭에,

오인은 이글(), 무상의 가치를 두는 자로서,

여기서 이를 세상에 소개함의 노고를 취한 것이다.

 

내가 이 책()을 절반 끝날 무렵,

경운옹이라는 이가 있어,

정조라는 제목의 일편을 기독교 신문에 투고했다.

 

그 유려(graceful)한 문자 중에,

잘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썼으므로,

 

나는 다음에 그 전문을 싣는다.

 

정조는, 여자의 가장 결여해서는 안 될 것으로서 사람의 아내 된 자,

남편이 요리집(채옥)에 미쳐 다닌다고 해서 자기도 질세라,

음식점에 출입하고, 연극장(극장) 및 흥행장에서 밤을 새우며,

남자가 창녀(유녀)에게 빠진다고 해서,

그것을 간하려고도 않고,

자기도 군것질 위해 돈을 쓰며(spend money on sweets),

남자를 끌어들이고, 남편이 한마디 하면 아내도 대답질하며,

너 한 대 치면 나도 한 대,

활발하다면 좋은 것 같지만 잇뀨우(일휴)가 즐겨 읽었다는

원숭이 남편에 아내는 개.

원숭이와 개와의 싸움같은 것이다.

 

남존여비는 본래 야만국의 특유물이지만도,

결국 여자는 순성의 것이므로,

너무 정도를 넘는 것보다,

 

밟혀도 피는 민들레의 웃음 짓는 얼굴’,

동정이야말로 갸륵할진저.

 

일본에서 정조 있는 여성의 귀감이라고 하면,

게사고젱(가사어전)이라든가,

혹은 그 누구라고 이름을 든다.

 

그러나 자기 남편이 소중한 것으로 생각된다면,

어찌 남편의 어머니인 시어머니만이 밉다고 할 수 있으랴?”.

 

그렇다고는 하지만,

며느리와 시어머니 사이는,

어느 세계에서도 사이가 좋지 않은 것으로 보여,

어렵고 읽기 어려운

(시어미니고)”자로 부르게 되었다는 속담까지 생겨나게 되었다.

 

-일본어의 요미니꾸이”(읽기 어렵다라는 음사),

요메()니꾸이”(며느리 밉다)와 발음이 비슷하다-

 

이는 며느리 밉다는 뜻이라는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본래 무거운 침구 위에,

자기 아내 외에, 다른 처,

즉 앞치마에 걸친 것을 덧걸치는 격의 어리석은 일을 해서는 안 된다는 말은,

 

이미 오늘의 세상에서는 맞지도 않는다고 하여,

훌륭한 자기의 남편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중 삼중으로,

즉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의 사내와 정을 통하는 불미한 여자도 있다.

 

-이상의 글은 난해의 글이어서 편자에게 직접 문의하여 얻은 해석임을 밝혀둡니다. -역자-

 

 

만일 남편이 죽으면 다른 남자에게 갈지라도 음부가 되지 아니하느니라(로마서 7:3 -)’

한 대서,

남편의 장례식 저녁,

재혼 상담을 받고,

전약(前約) 있다고 거절했다고 하지만도 너무 지나친 일이 아니랴!

 

성서에도 정조 있는 여자를 기록하고 있다.

 

옛날 엘리멜렉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죽고 그 아내 나오미는 두 아들 말론과 기룐 남았다.

두 아들은 각각 모압 여자를 아내로 맞았다.

한 사람의 이름은 오르바요, 한 사람은 룻이다.

 

이렇게 10년 남짓 함께 살았으나,

말론과 기룐도 또 죽었다.

 

나오미는 먼저 남편을 여의고,

지금 또 두 아들과 사별하여, 실망하는 나머지,

두 며느리를 불러, 그 본가로 돌아갈 것을 명했다.

 

오르바는 돌아갔으나,

룻은 아무리해도 나오미의 곁을 떠나지 않는다.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 장사될 것이라고하여,

그 후 오랫동안 충실하게 시어머니 나오미를 섬겼다.

 

자세한 것은, 구약성서의 룻기를 읽어 알도록 할 것이다.

그렇듯 정조 있으매,

이방의 여자이면서도 구주의 선조(先祖)일수 되었으리라.

4장 뿐인 짧은 이야기니, 부인들 읽고 음미하시라.

 

룻기는 실로

성서의 여대학(온나다이가꾸 여대학 293p 참조) 이라고도 해야 할 것이다.

저자의 10여 년 간의 성서공구(연구),

아직 오늘 세상에서 일컫는 그리스도교 부인들의 사상과 행위를,

성서가 권유하는 길이라고는 믿을 수 없다.

 

오늘날 세상에서 일컫는 여권이란 것은,

성서의 그리스도교의 도움으로 발달된 것이냐 아니냐는,

식자간의 대문제로하고,

현재 유명한 여권확장자 엘리자베스(일리저버드) 스탠튼 부인(원문),

교회 역사의 태두 프랜시스·뉴먼 등,

그리스도교를 여권신장의 대방해물로 보는 이 적지 않다.

 

남녀 동권론을 유지하기 위해,

바울, 베드로의 말에서 성어를 인용하려는 것은 부득한 일이다.

(성서를 여권 확장의 대방해물로 삼는 의론의 한 부분을 알려고 하는 이는

“Has Christianity Benefitted Woman?”by

Elizabeth C. Stanton’North American Review; May 1886을 보라).

 

성서의 이상적 부인은 순종의 부인이다.

즉 권리를 다투지 않는 부인이다.

 

그리고 내가 보는 대로 하면,

동양의 이상적 부인은 도리어 성서의 이상과 서로 얼마쯤

우리나라에 수입된 서양부인의 이상 같은 것은,

명료히 성서의 교훈과 어긋나는바 많은 것 같다.

 

오인(I, we)이 이를 말함은,

억지로 그리스도교의 주의를 굽혀,

우리나라 재래의 습관과 꼭 맞게(투합 agreement)하려 애씀이 아니다.

 

오늘날 세상에 편벽한 충효론자 있어서,

국인을 오도하고 있음은, 부인 할 수 없는 사실이다.

 

오인은 이들 논자와 화해하기를 애쓰는 자가 아니다.

구미의 풍습이 반드시 성서의 이상이 아니다.

우리나라의 고속 반드시 반성서적이 아니다.

우리들은 사실과 진리 있는 데를 살펴,

시세의 유설에 방황(float)할 것이 아니다.

 

*내촌감삼의 글을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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