룻기서 대의
룻기는 사사기의 부록,
또는 사무엘상의 서문으로도 볼 수가 있다.
이스라엘의 와정을 사사정치에 연결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군기가 아니고, 정치사가 아니라,
전원시이다.
그 서명부터가 부인의 이름이고,
정답고 부드러운 데가 있다.
이 책(글) 외에, 부인의 이름으로써 불리는 책이,
성서 안에 하나 더 있다.
그것은 에스더기(서)이다.
룻기에 에스더서,
하나는 이방(異邦)부인이 이스라엘에 출가한 책이고,
다른 하나는 이스라엘 부인이 이방인에 출가한 기사이다.
그리고 그 우아한데 있었다,
룻기는 훨씬 에스더서(기) 이상이다.
룻기는 어느 방면에서 본대도, 놀라운 글이다.
부인의 행위를 기록한 것만으로 이례이다.
그러면서도 더구나 그 부인이
사라, 미리암, 드보라와 같은
이스라엘 부인이 아니라,
이교(異敎) 모압의 부인이었다.
그리고 이 부인이,
남편이 아닌 남편의 어머니의 뒤를 따라서,
부모의 나라를 떠나,
망부의 고향으로 돌아왔다고 하는 것이다.
그 사상이 전연 그리스도교적이면서,
더구나 동양적이다.
그리고 성서 중에 이방의 부인의
전기가 실려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 이방인과 부인의 구원이 예언되어 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택하셨다고 하지만도,
그를 위해,
그들을 택하신 것은 아니다.
그들로써 이방인을 구원하기 위해,
그들을 택하신 것이다.
또 부인은 결코 부정한 자는 아니다.
남자와 함께 구원되도록 정해져 있는 자이다.
성서는 처음부터,
부인을 구원에서 빠진(누락된)자로서 취급하지 않았다.
하나님은 부인을 남자와 대등한 자로서, 취급하셨다.
그러므로 때가 이를 때, 부인의 권리는
이 세상에 있어서도, 인정되지 않을 수 없었다.
구약성서 안에서 룻기를 보고,
‘남녀동권’, ‘만인평등’주의가 일찍이 이미 확인되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룻기는 어디까지나,
동양풍이다.
룻은 결코 근대부인은 아니었다.
그녀는 권리를 요구하지 않았다.
그는 유화(gentle)하고, 온순(순종)하고,
근면한, 모범적 동양부인이었다.
그녀는 자기에게 귀가를 권하는 그녀의 시어머니
나오미에게 대답하여 말했다.
‘나로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유숙하시는 곳에서
나도 유숙하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 장사될 것이라
만일 내가 죽는 일 외에 어머니와 떠나면
여호와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하나이다(1:16-17)’고.
며느리가 시어머니에게 향하여 발한 말로서,
이것보다 더 절실한 것은 없다.
이는 의무가 아니라, 사랑이다.
의무에서 생긴 사랑이다.
여기에 있어서,
나오미와 룻은
부모와 자식(parent and child) 이상의
깊은 관계에 들어간 것이다.
나오미는 이향 모압들(지방)에서
남편과 두 아들을 잃고,
며느리 룻과 같이,
나라를 나서서부터 10년,
쓸쓸하게 고향인 베들레헴으로 돌아왔다.
유대인으로서 그녀의 집에,
세습재산은 있었으나,
남자 없으므로,
이것을 되찾을 길이 없었다.
며느리, 시어머니 두 사람은,
지금은 빈자의 권리를 이용하여,
타인의 밭에 가서 떨어진 이삭(gleanings)을 줍는 길 외에
생활의 길이 없었다.
그러나 여호와는 충실한 며느리를 인도하여,
나오미의 남편 엘리멜렉의 친족(인척되는 사람 a relative)
보아스의 밭으로 가게 하셨다.
여기서 기이한 섭리 하에,
모세율의 규정에 따라,
보아스는 엘리멜렉 가(家)의 책임을 짊어지기에 이르렀다.
*참조 : (창세기 38장, 신명기 25장).
(마태복음 22:23-27 부활이 없다 하는 사두개인들이 그 날 예수께 와서 물어 이르되
24) 선생님이여 모세가 일렀으되 사람이 만일 자식이 없이 죽으면 그 동생이 그 아내에게 장가 들어 형을 위하여 상속자를 세울지니라 하였나이다
25) 우리 중에 칠 형제가 있었는데 맏이가 장가 들었다가 죽어 상속자가 없으므로 그 아내를 그 동생에게 물려 주고
26) 그 둘째와 셋째로 일곱째까지 그렇게 하다가
27) 최후에 그 여자도 죽었나이다)
이것을 일컬어 Levirate Law라고 한다.
죽은 남편의 형제에게 출가하여,
사자(대를 이을 아들 an heir)를 얻음의 법률이다.
룻의 신앙과 정절은 충분히 보답되었다.
그녀는 스스로 안식을 얻고,
또 그녀의 사랑하는 시어머니 나오미에게 안식을 주었다.
아름다운 옛 베들레헴 마을에 있어서의 신가정의 희락상이다.
제4장 13절 이하는,
소설보다 나은 사실이다.
‘너를 사랑하며 일곱 아들보다 귀한 자부가 낳은 자로다’란다.
룻의 기쁨,
나오미의 만족,
마을사람 모두가 중심으로 하는 동정축하,
옛 이스라엘에 이러한 일이 있었다.
오늘의 세계에는 없다.
효도로써 자랑하는 일본에도 없다.
옳도다. 후년에 이르러,
인류의 구주가, 이 마을에서 나셨다는 것은,
그것도 이 정숙한 모압 부인 룻의 원손으로서 태어나셨다는 것은,
‘베레스의 계보는 이러하니라
베레스는 헤스론을 낳았고 헤스론은 람을 낳았고 람은 암미나답을 낳았고
암미나답은 나손을 낳았고 나손은 살몬을 낳았고
살몬은 보아스를 낳았고 보아스는 오벳을 낳았고
오벳은 이새를 낳았고 이새는 다윗을 낳았더라. (4:18-22)’
이상은 마태복음 1장 3-6절과 동일하다.
(마태 1:3-6 유다는 다말에게서 베레스와 세라를 낳고 베레스는 헤스론을 낳고 헤스론은 람을 낳고
4) 람은 아미나답을 낳고 아미나답은 나손을 낳고 나손은 살몬을 낳고
5) 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스를 낳고 보아스는 룻에게서 오벳을 낳고 오벳은 이새를 낳고
6) 이새는 다윗 왕을 낳으니라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고)
다만 살몬, 라합에 의해 보아스를 낳고,
보아스, 룻에 의해 오벳을 낳았다고 하여,
두 부인의 이름을 기록한 점에 있어서 다르다.
즉 보아스의 어머니는 여리고의 기생 라합이었고,
그는 또 이방 여자 룻에 의해 오벳을 낳은 것이다.
보아스가 룻을 동정한 이유의 일면은, 여기에 있었다.
그리고 라합도 룻도,
몸은 이방(異邦) 부인이지만도,
신앙에 의해 ‘그리스도의 어머니’인 영광에 참여했다.
피(血)로는 아니다. 영(靈)으로이다.
기부(妓夫)도, 이교(異敎)부인도,
영에 의해,
그리스도의 조상인 특권에 참여했다.
실로 대담하기 그지없는, 선언이다.
(1927년 2월 ‘성서지연구’)
*내촌감삼의 글을 참조.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