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8월 31일 목요일

전도서에 대하여

  

전도서에 대하여

 

욥기와 잠언과 아가와 전도서는,

성서중에 있어서 별도로 일부분을 형성한다.

 

이것을 일컬어 지혜문학이라고 한다.

참된 지혜는 무엇인가에 대하여 논하는 글이기 때문이다.

전도서, 이를 히브리어로는 코헤레스의 말이라고 한다.

코헤레스는 고유명사인지, 보통명사인지, 잘 알 수 없다.

 

만약 고유명사이며, 인명이라면,

전도서는 코헤레스 선생의 훈계집이라고도 칭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만약 보통명사라면, 코헤레스는 토론자란 의미이므로,

이 책()은 이를 토론자집이라고도 칭해야 할 것이다.

 

영역성서에서는 이 책()을 칭하여 Ecclesiates (에클레지아테스)라고 한다.

Ecclesiastes란 교회자로 역해야 할 것이리라.

그리고 만약 전도서는 교회자(교회인)의 말이라고 한다면,

어쩐지 감독의 교서처럼 들려, 그 진가가 아주 의심스럽게 생각된다.

 

그러나 에클레지야란 원래 교회로 번역되어야 할 말은 아니다.

단순히 회합 또는 회중이란 뜻이다.

 

그러므로 에클레지아스테스는 회합자로 역해야 할 것으로서,

회중의 한 사람을 가리켜 말하는 말로 보아 좋은 것이다.

 

이렇게 해석할 때,

전도서는 지혜를 배우기 위해 회합한 자의 한 사람이(혹은 몇 사람이),

그 석상에서 진술한 말을 모아,

일서(一書)로 한 것이라고 볼 수가 있다.

 

이것을 어찌하여 전도서라고 역했는가 하면,

이는 루터의 독일역 성서인

Die Reden des Predigers를 그대로 역한 것으로서,

루터 자신의 오역을 그대로 채용한 것이다.

 

위인의 권위도 또한 대단히 크도다이다.

그의 오역까지가 참으로써 전해지는 것이다.

그런데 서명은 어떻대도 좋은 것이다.

 

우리들이 알고자 하는 것은,

그 전하려는 진리이다.

 

전도서는 무엇을 가르치려 하는가?

그 취급하는 주요 제목은 무엇인가?

 

전도서는 지혜문학 중의 일서이다.

그리고 그 주로 논하고자 하는 바는 선이란 무엇인가? 그것에 대해서이다.

도덕적인 선에 대해서 뿐 아니다. 보다 넓은 의미의 선에 대해서이다.

 

저자 자신의 말로써 하면,

 

'세인은 하늘아래에서 생애 어떠한 일을 하면 좋을 것인가'(2:3 일역). ,

그 문제에 대하여 논하고자 하는 것이다.

 

오늘의 학자의 말로써 하면,

사람의 지상선이란 무엇인가,

(What is the summum Bonum of man)

그 문제에 대하여 논하고자 하는 것이다.

 

사람은 무엇을 하면 가장 행복한가,

무엇을 함이 인생 최대의 목적인가,

쾌락의 방면에서 보고,

도덕의 방면에서 보아 무엇을 선이라고 칭해야 할 것인가?

 

코헤레스는 이 글()에 있어서,

이 대문제에 대하여 논구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벽두에 말한 것이다.

 

'헛되고 헛됨, 헛되고 헛되도다, 모두 헛되도다'(1:2 일역)라고.

 

그리고 그는 서중(書中) 몇 번인가 거듭하여 말한 것이다.

 

'아아 모두 헛되어 바람을 잡음 같다'(1:14; 2:26: 4:16 등 일역)라고.

이로써 안다.

 

사람의 지상선 무엇인가의 문제에 대하여,

저자는 그 무엇이 아닌지를 아는 바 많으면서,

그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아는 바 아주 적었었다는 것을,

 

즉 이 대문제에 대하여,

그는 소극적 해답을 주는데 성공하고,

적극적 해답을 주는 데는 아주 빈약했던 것이다.

 

전도서의 이 성질을 알지 못할 때, 그 평가를 그르치는 것이다.

전도서는 사람의 지상선이 무엇이 아닌지를 보여 주는데 명확하다.

하지만 그것이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는데 미약하다.

우리들은 이 대 문제에 대하여, 이글()에서 전부를 배울 수는 없다.

 

사람의 지상선은 무엇인가, 그것에 대해서는,

이것을 성서의 다른 책에서 배우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을 4복음에서, 또는 로마에서, 배우지 않으면 안 된다.

내가 영생을 얻기 위해, 어떠한 선을 할 것입니까' 라는 어떤 사람의 질문에 대하여,

 

예수는 대답해 말씀하셨다.

'어찌하여 내게 선에 대해 묻는가. 한 분 외에 선이란 있을 수 없다. 즉 하나님이시다.'(마태복음 19:16-17 일개역)라고.

예수는 여기서 전도서가 제공하는 문제에 대해, 명확한 적극적 해답을 주신 것이다.

 

코헤레스도 이에 비슷한 해답을 주지 못한 것은 아니다.

그는 권말에 이르러 드디어 말했던 것이다.

 

'일의 전체의 귀결을 듣도록 하라. 즉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계명(훈계)을 지키라.

이것은 모든 사람의 본분이다'(12:13 일역)라고.

 

하지만 그는 겨우 이 결론에 달한 것이다.

그는 지상선을 하나님 이외의 여러 가지 것에 구하고, 이에 실망하여,

마침내 부득불 이에 달했던 것이다.

 

예수와 코헤레스와는 비교할 것도 못된다.

 

하지만 사람의 지상선이 무엇인가를 고조하는데 있어서는,

전도서보다 이상의 글(), 성서 이내에 있어서,

또 그것 이외에 있어서, 이것을 발견할 수는 없다.

 

전도서는 하나님을 떠나서

인생에 참된 행복이 없음을 가르치는데 있어서 천하일의 선이다.

 

이 글()만큼, 세찬(강한) 말로서, 굳은 확신을 가지고서

모든 사람이 선이라 행복이라 인정하는 것을 배척하는 것()은 없다.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도다, 모두 헛되도다'고 한다.

 

이는 세차고 중한(심한) 말이다.

 

헤이께모노가다리의 기온쇼우자(신원정사)의 종소리.

같은 것,

아무리 해도 이에 비교할 수는 없다.

 

성자필쇠는 아니다. 헛되고 헛되도다 이다.

'용맹스런 사람도 결국은 명하도다'는 아니다. 헛되고 헛되도다.

 

모두 헛됨이다.

지혜도 지식도, 부도 위(위계)도 행복한 가정까지도,

모두가 헛되고 헛되다는 것이다.

 

헛되고 헛되도다고 한다.

 

히브리어의 habal의 역자로써, 부적당한 것은 아닐 것이다.

'(사라져) 없어지는 것'이란 뜻이다.

 

그러므로 만약 ''(호흡)이라고 역한다면, 보다 적절하리라.

입에서 내뿜는 숨이다.

전혀 없는 것은 아니나, 금방 없어지는 것이다.

근화일조의 꿈이라는 말과 같은 것이다.

그러나 근화보다도 더 짧은 것이다. (호흡)이다. 탕기이다.

오르는가 하면 곧 없어지는 것이다.

 

헛되고 헛되도다라고 함으로써,

공허, 무가치의 뜻을

아주 세차게 나타낼 수가 있다.

나는 이 역자를 바꾸기를 원치 않는다.

 

'바람을 잡음 같다'(바람을 잡으려는 것-한글 역)이라고 있다.

 

'같다'는 글자는 삭제(없이) 하는 것이 낫다.

'바람을 잡음이라'이다.

공허의 뜻을 다른 말로써 나타낸 것이다.

 

또 원어의 뜻은 '잡음'이 아니다. '먹음'이다.

지식을 얻고, 지식을 쌓음(간직함, 비축함), 이는 바람을 먹는 것이라는 뜻이다.

'눈은 보아도 족함 없고, 귀는 들어도 차는 일 없다' (1:8 일역)고 있는 그 뜻을,

식물(食物)에 비유해서 말한 것이다.

 

즉 지혜도 지식도 이것을 먹어 족할 수 없고,

위는 이로 말미암아 차는 일 없다는 뜻이다.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도다, 모두 헛되도다. 바람을 먹는 일이라고 한다.

 

그리고 지혜도 지식도, 부도 위도,

모든 사람이 선 또는 행복이라면서 추구하는 것은,

모두 이것이라고 하는 것이다.

 

인류의 다수가, 인생의 지상선으로서 추구하는 것은, 학문이다.

이 글()의 저자가 말하는 소위 지혜와 지식이다.

 

지식은 사물에 관한 지식이고,

지혜는 그 응용이다.

지금 사람이 말하는 소위 과학과 철학이다.

널리 알고, 현명하게 행하는 일이다.

 

그리고 코헤레스도 또한 일시는,

지식 만능을 표방하여, 전력을 이에 경주했던 것이다.

 

'내 마음을 다하고 지혜를 써서, 하늘 아래 행해지는 모든 일을 궁구하며, 또 살폈다'(1:13 일역)고 한다.

 

그런데 그 결과란, 어떠했던가?

그는 마음에 만족을 얻었던 것일까? 가 아니라.

 

'눈은 보아도 족함이 없고, 귀는 들어도 차는 일 없다'(1:8)

 

'대저 지혜가 많으면 분노(번뇌) 많다. 지식을 더하는 자는 걱정을 더 한다'(1:18 일역).

 

우주와 인생을 알면 아는 만큼, 비탄과 불평은 더(증가)하는 것이다.

 

독일인은 이것을 일컬어 우주탄이라고 한다.

이것은 학자 독특의 비탄이다.

 

뉴톤에게도 이 비탄이 있었다. 괴테에게도 있었다.

이 점에 있어서 무학(無學)은 행복이다.

지혜와 지식은 결코 인생의 지상선은 아니다.

 

우주와 인생은 선전 중복(거듭)에 지나지 않는다.

하늘 아래 절대적으로 새로운 것이라고는 없다.

모두 옛 것의 되풀이(반복)이다.

역사는 반복(되풀이) 된다는데, 반복되는 것은 역사에 그치지 않는다.

 

해의 출입, 또 그 자리에서 솟는 일등,

바람이 북에서 불어 남으로 돌아, 전과 같이 북에서 부는 일등,

또 강물이 바다로 들어가 영구히 그치지 않음 같은 일등,

만사 만물 모두가 다 천편일률의 중복이다.

 

가령 세상에 신발견이라는 것이 있어서, 한 때 세계를 놀라게 한 대도,

누가 알랴,

이것 과연 참된 신발견인지를 태고의 이집트인은

지금 사람이 알지 못하는 많은 기술을 가지고 있었다.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피라미드 같은 대건축은,

그들의 손에 의해 이룩되지 못했으리라.

 

철학의 제 문제는, 이미 모두 그리스(헬라)인에 공구되어,

근세철학은, 그리스철학 이상으로 신해결을 제공할 수 없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신발견은 곧 구발견으로서 경원된다.

증기는 전기로 대신 하는 바 되고,

자유정치는 사회정치로 바뀌는 바로 되고 있다.

 

가령 또 물질이라든가 정치에 관해서는 다소의 혁신 있대도,

고쳐지지 않는 것은 사람의 마음인 것으로서,

이 일에 관해서는

 

'구부러진 것은 곧게 할 수 없고, 결여된 것은 메울 수 없다. '(1:15 일역)

코헤레스의 말은 문자 그대로 참이다.

 

알렉산더가 한 일을 시저는 행하고 시저가 한 일을 나폴레옹은 행하고,

나폴레옹이 한 것을 카이제르는 행하려하고 있는 것이다.

 

시대는 변해도, 사람은 변치 않는 것이다.

일찍이 독일과 동맹하여 불국을 격파한 영국은,

이제는 불국과 동맹하여 독일을 치고 있는 것이다. (참조-세계대전 난).

 

시대는 변해도 그 마음은 변하지 않는 것이다.

 

'해 아래서는 새것이 없도다'(1:9 일역)이다.

 

'아아 헛되고 헛되어 바람을 먹는 것이로다'(1:14 일역)이다.

 

'대저 지혜 많으면 분(한글 역은 번뇌) 많다. 지식을 더하는 자는 근심을 더한다'(1:18 일역)이다.

 

학문 학문하고, 신지식 신지식 하면서,

많이 배우면 많이 행복이 온다고 생각하는 자는,

아직 지식, 학문이 무엇인지를 모르는 것이다.

 

코헤레스는 지혜와 지식에 인생의 지상선을 구하다 실망했다.

이에 있어서 그는 자기에게 향해 말한 것이다.

 

'오라, 내가 시험 삼아 너를 즐겁게 하려 한다. 그대(), 낙을 마음껏 누릴지어다'(2:1)라고.

그리하여 그는 이스라엘 왕으로서 누릴 수 있는 만큼의 낙을 누렸던 것이다.

대 건축을 했던 것이다. 대 과원을 만들었던 것이다. 대 연못을 팠던 것이다.

그리고 이에 더하여, 미술로써 했던 것이다. 진보를 마련(축적)했던 것이다.

음악을 들어오게 했던 것이다.

그리고 다만 이를 즐기는 것으로써 만족하지 못해,

 

'사람의 낙인 처첩을 많이 얻었다. (한글역은 두었다)고 있다. 그런 후 그는 말했다.

'무엇이든지 내 눈이 좋아하는 것은 내 이것을 금하지 않았다.

대개 내 마음을 기뻐하는 것은 나는 이것을 금치 않았도다'(2:10 일역).

 

그리하여 즐길 수 있을 만큼 즐기고서 그 결국은 어떠했던가?

 

'이것도 또한 헛된 것'이라고 그는 말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내 손으로 한 모든 사업(건축, 식립, 개착)

내가 수고하여 일한 그 노고-마음의 신로를 말한다.

재산의 모음, 처첩의 빙초(등을 위해 소비한 것)를 돌아 보건대,

모두 헛된 것으로 바람을 먹는 일이었다. 해 아래서는 유익한 건 없도다.

 

'코헤레스가 일락추구에서 배워 얻은 대 교훈이었다.

그는 이것을 일컬어, 망령됨(광망)과 우치(어리석음)라고 했다.

광망이란, 본능적인 소욕대로 하는 일로서, 오늘 사람의 소위 자연주의 실행이다.

'우치'란 무지이다. 지혜의 반대이다.

지식에 의해 행하지 않고서 감정에 의해 행하는 일이다.

 

코헤레스는 지혜와 지식의 무익을 알아, 범부와 마찬가지로,

인생의 행복을 육의 쾌락에 구했던 것이다.

이것은 학자가 왕왕 취하는 길로써,

그들의 어리석음도 또한 동정해야 할 바이다.

 

* 내촌감삼의 (“191511'성서지연구'”)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