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8월 6일 일요일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의 유업으로 받을 땅에 나아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으며

  

아브라함의 신앙 2

 

히브리서 117-19: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이지 않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경외함으로 방주를 준비하여 그 집을 구원하였으니 이로 말미암아 세상을 정죄하고 믿음을 따르는 의의 상속자가 되었느니라

8)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의 유업으로 받을 땅에 나아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으며

9) 믿음으로 그가 이방의 땅에 있는 것 같이 약속의 땅에 거류하여 동일한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은 이삭 및 야곱과 더불어 장막에 거하였으니

10) 이는 그가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라

11) 믿음으로 사라 자신도 나이가 많아 단산하였으나 잉태할 수 있는 힘을 얻었으니 이는 약속하신 이를 미쁘신 줄 알았음이라

12) 이러므로 죽은 자와 같은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하늘의 허다한 별과 또 해변의 무수한 모래와 같이 많은 후손이 생육하였느니라

13)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임을 증언하였으니

14) 그들이 이같이 말하는 것은 자기들이 본향 찾는 자임을 나타냄이라

15) 그들이 나온 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라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16) 그들이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을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

17)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그는 약속들을 받은 자로되 그 외아들을 드렸느니라

18) 그에게 이미 말씀하시기를 네 자손이라 칭할 자는 이삭으로 말미암으리라 하셨으니

19) 그가 하나님이 능히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개역개정 한글)

 

혹은 또,

그에게 만약 신앙 없었다면 그는 그에게 임한 묵시를 해득치 못했으리라.

 

신앙은 하나님으로부터 묵시를 부르는 것이고 동시에 또 묵시를 해득하는 것이다.

 

조심하여경외심으로 움직인바 되었다는 뜻이다.

그에게 신앙 있었기 때문에 이 마음(생각)이 생긴 것이다.

그의 주위의 사람들은,

그에게 묵시가 임한 것을 듣고서 조소로서 그를 대했다(베드로전서 3:20 참조).

 

그 가족을 구원하기 위해애정에 끌려, 자기 가족만을 구하려 한 것은 아니다.

하나님의 성의에 따라, 성예(성가족)를 후세에 남기기 위해서이다.

그의 가족에 의해, 멸망된 세계 중에 거룩한 새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이다.

 

보통의 경우에 있어서, 가족을 사랑하는 마음이다.

먼저 자기와 자기 가족을 구원하려는 것은, 지정이라고는 하나,

저속한(낮은) 자아(이기)의 마음이다.

가족은 이것을 하나님 위해, 또 인류 위해 구원해야 할 것이다.

 

배를 마련하였다상자 배(방주 ark)를 준비했다는 뜻이다.

 

불신의 사람들이 그를 조소했다, 비방하고 있는 동안에,

구원의 기관을 예비했다는 것이다.

노아는 그 동안에, 심히 그의 신앙을 시험받았으리라(마태복음 24:38 참조).

 

이로 말미암아 세상 사람의 죄를 정하고

 

홍수가 올 때까지는,

세상 사람들은 지자(知者)이고, 노아 혼자 광인(狂人)이었다.

 

저 방대한 방주(ark) 이것 무엇위해서 인가고 그들은 비웃으며 말했다.

하지만 홍수에 의해, 의자로서 증거되고, 세상 사람은 그 죄 확정되었던 것이다.

홍수에 의해, 노아의 신앙은 사실로 되어 나타난 것이다.

 

노아의 경우에 있어서도 또 신앙은 희망이 기초, 아직 보지 못한 것의 증명이었다.

 

홍수가 임하기까지, 노아는 다만 신앙으로서

그의 희망을 유지하며, 신앙을 가지고서 미래에 대비했다.

 

국인 모두가 평안을 즐기며 안일에 잠기고 있는 동안에,

그 한 사람(물론 그의 가족과 함께) 신앙을 가지고서,

실로 임하려한 대이변에 대비했다.

 

신앙으로 받는 의

 

노아는 본래 의인이었다(창세기 6:9 참조).

 

그는 정의의 선전자였다(베드로후서 2:5).

그런데 대홍수에 처하여 그가 단행한 신앙적 행위에 의해,

그는 다시 신앙에 의한 의를 받는 자로 된 것이다.

 

신앙에 의한 의

 

신앙에 합한 의. 신앙의 결과로서 자신에 느끼는 정의의 자각이다.

 

바울의 이른 바 신앙의 의란 조금 뜻(취의)을 달리한다.

전자는 의의 자각인데 대하여 후자는 의의 은사이다.

 

이자 물론 한 가지로 하나님에게서 받은 은사임에 틀림없지만도,

이것을 자기가 획득한 획득물로서 느끼는 것과,

하나님에게서 주신 은사로서 느끼는 것과,

그 사이에 명백한 차위가 있다.

 

신앙에 의한 의는 신앙적 생애의 초기에 있어서 느끼는 것이고,

신앙의 의는 그 걸음을 더 나아가게 한 후에 실험하는 것이다.

 

받을 후사(상속자)로 되었다

 

용어(쓸데없는 말 redundant word)이다.

단지 받는 자로 되었다고 역할 것이다.

신앙을 실행하여, 그 결과인 정의를 감득하는 자로 되었다는 뜻이다.

 

노아는 확실히 신앙적 위인이다.

하지만, 그의 신앙은 홍수의 감퇴와 동시에 쇠해졌다.

홍수 이후의 노아의 생애는 실로 가련한 것이었다.

사실(기록)은 창세기 620절 이하에 자세하다.

 

노아의 신앙은 일시적이었다.

그는 바락, 기드온, 삼손 등과 흡사하여,

어떤 특별한 경우에 임해서만 위대했다.

 

마치 용사가 강적을 만나 그 용기 전부를 쏟음 같다.

그의 일생의 공적은 홍수내습의 때에 이룩된 것이다.

홍수 이전의 노아의 신앙에 불만한 것 없다.

이후의 그는 타락의 그분이다.

하지만 홍수 당시의 그의 공적은 영원히 덮어버릴 수 없는 것이다.

그 때에 있어서의 그의 용감적 행위에 의해 그의 이름은 영구히 썩지 않을 것으로 되었다.

 

세상의 조소의 면전에 서서 홀로 하나님의 정의를 가지고 선 일,

사람의 비방에 처하여 그의 신앙을 굽히지 않은 일,

세상은 일제히 하나님께 거역하고 섰는데,

그 혼자서 하나님과 함께 선 일

 

인류의 신앙 사상에 있어서의 노아의 행적은 위대하다. 용감하다.

사람은 누구이건, 그 일생 동안에 한번은 노아 따라,

홀로 정의를 가지고 서서, 세론에 항거하고,

전국을 상대로 신앙의 선전을 싸울 것이다.

그리고 아브라함에게도 또한 이 신앙이 있었던 것이다.

 

모든 믿는 자의 아버지인 그는,

 

그의 신앙의 생애를 시작하는데 있어서 노아의 신앙으로서 시작했던 것이다.

용행, 과단, 정실의 배척, 이 세상과의 절연,

하나님을 친구로서 가지기 위해 모든 사람을 적으로 가짐의 각오,

하나님의 명 따라, 이웃의 비방을 무릅쓰고,

단연 구고를 떠나서 사막의 저편에 새 홈(home)을 구한 일

 

아브라함은 신앙의 생애의 출발에 있어서, 노아에 따라, 구를 버리고 새 것에 임한 것이다.

 

신앙에 의해, 아브라함은, 그 상속받을 땅으로 가라는 명을 받았다, 이에 따라, 그 가는 곳을 모르고서 떠났다’(8일역)

 

사실(기록)은 창세기 제12장에 자세하다.

아브라함은 나이 75세로서, 그 아내 사라, 그 조카 롯을 데리고,

하란 땅을 떠나서 가나안 땅으로 향했다고 있다.

 

그는 그 때 갈 곳을 지시받지 못했으나, 하나님의 명을 믿어,

일가(一家)를 데리고 고향을 떠나 이향을 향해 여로에 오른 것이다.

이것은 확실히 신앙이다.

다만 가라는 명이었다. 이 부패의 땅을 떠나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어디로 갈 것인가?

그것은 지시되지 않았다.

여호와의 말씀에 이것을 증명할 빙거(evidence)는 없었다.

하지만 아브라함은 의심치 않고서 이것을 믿었던 것이다.

 

믿을 이유 없는데 믿었으므로 미신이라고 하면 그대로이다.

하지만, 신앙과 미신은 외부에서 이것을 구별할 수는 없다.

 

신앙은 사람에 따라서는 미신같이 보인다.

신앙은 확실히 일종의 모험이다.

이에 따라서, 혹은 실패로 끝날지도 모른다.

 

하지만, 믿는 자는 신앙이 미신 아닌 것을 안다.

신앙은 마음에 울려오는 하나님의 소리(음성)에 대한 신자의 응락이다.

그는 형체를 본 것 아니다. 또 증명을 가지지 못한다.

 

하지만, 그는 확실히 믿는 것이다.

옳다, 믿도록 된 것이다.

그에게 있어서는, 신앙 그것이 보이지 않는 바의 것의 증거로 되는 것이다.

그는 말하는 것이다. 내게 신앙이 생겼다,

그러므로 이에 응함의 실물 없을 수 없다고.

실물로서 신앙을 증명할 수는 없다. 신앙으로서 실물은 증명하는 것이다.

 

이것이 신앙의 힘이다.

이 힘없이, 신앙은 이것을 신앙이라 칭하기에 족하지 못한다.

 

실로, ‘신앙은 아직 보지 못한 것의 증거이다.

 

그리고 그러한 것이기 때문에,

신앙 있는 곳에는 반드시 희망이 있는 것이다.

희망은, 신앙에 응하는 사물의 실현을 가지는 일이다.

그러므로 말한다,

 

희망은 신앙의 자매라고.

 

또 말한다,

 

신앙은 바라는 것을 의심치 않는다.

 

말을 바꾸어 하면, ‘신앙은 희망의 기초이다라고.

 

아브라함은 그가 속한 옛 부패한 사회를 탈출하라는 여호와의 명을 받고,

여기서 큰 희망을 가지고서, 행선의 목적 없으나,

단연 뜻을 결하여 하란의 토지를 떠났던 것이다.

 

그의 구고는 그에게 향하여 말했으리라,

 

너 떠나 어디로 가려는가?

달할 목적 없이 고향을 떠나는 것은 모험의 극(극도) 아니랴?

먼저 갈 곳을 정하고, 그런 후에 떠나라.

네가 일컫는 여호와의 명이란 네 자신의 망상이 아니랴?.

 

아브라함은 이에 대답하여 말했으리라,

 

나는 믿는다. 여호와의 말씀이 확실하게 내 마음에 임한 것을.

나는 너희에게 제공하는데 증거로써 할 수 없다.

하지만 내게 있어서는 신앙 그것이 가장 확실한 증거이다.

나는 너희의 조소를 개의치 않는다.

나는 이미 너희의 불신 부패의 사회에 견딜 수 없다.

나는 지금부터 새로운 향토를 구하고,

거기서 새로운 마음으로서 내 여호와 하나님께 쓰이고자 한다. .

 

아브라함의 경우에 있어서는, 노아의 경우에 있어서와 같이,

신앙은 과단이었다. 용감적 행위였다.

그리고 오늘이라 해도 신앙에 이 행위가 없어서는 안 된다.

 

신앙은 신뢰라고 하여, 다만 의뢰할 줄만 알고,

결단하고 행할 줄을 모르는 자는,

아직 신앙이 무엇인지를 모르는 자이다.

 

아브라함에게 강한 신뢰의 마음이 있었다.

하지만 그는 생애의 출발에 있어서 신앙을 그 가장 단순한 의미에 있어서 실행했다.

 

신앙에도 또 그 초보와 오의가 있다.

그리고 많은 신자는 신앙의 초보를 배우지 않고서 곧 그 오의에 달하려 한다.

아브라함의 신앙이 완전했음은,

그가 신앙의 초보에 있어서 잘못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용맹, 과단, 확신의 실행. 종교는 도덕이 아니라고 하여

보통 도덕마저 실행할 수 없는 자는, 도저히 종교를 알 수는 없다.

 

신앙의 일면은 용행이다. 과단이다.

사람의 정실을 물리치고서 하나님의 명령에 따르는 일이다.

노아의 신앙은 이것이었다. 그리고 아브라함도 또 노아에 배워,

신앙을 이 방면에 있어서 발휘했다.

 

그도 또한 바울과 한 가지로, 하나님의 성소(聖召)를 입어,

혈육과 꾀(도모)하는 일을 하지 않았다.

 

그는 하나님과 함께 있기 위해,

처음 그 아버지 데라와 함께 갈대아 우르르 나와,

뒤에 또 아버지와 이별하고 하란 땅을 떠났다.

 

신앙의 발단은 탈출이다.

먼저 이 세상과 끊지 않고서는, 신앙은 시작되지 않는다.

아브라함은 고향을 떠나고 구고를 떠나 신앙의 생애에 들어갔다.

 

그리고 신앙의 전도는 인생의 그것과 한 가지로 요원(remoteness)이다.

신앙의 목적은 자기에 죽고 하나님으로 사는데 있다.

 

그러므로 이것을 성취하는데 장시간을 요한다.

결의, 단행, 그리하여 신앙의 생애에 들어갈 수는 있으나,

그러나 들어가서 이것을 완성하기까지에, 오랜 단련과 끊임없는 인내를 요한다.

 

이에 있어서 신앙은 그 제2기로 들어가는 것이다.

즉 에녹의 신앙으로서 대표되는

 

하나님과 함께 걸음의 시기에 들어가는 것이다.

 

에녹, 300, 하나님과 함께 행(동해)하고, 남자 여자를 낳았다,

에녹, 하나님과 함께 행(동행)했는데, 하나님, 그를 데려가시므로, 그는 있지 않았다’(창세기 5:22, 24 일역)고 있다.

 

 

행한다(걷는다)는 것은 고요히 걷는다(생활한다)’의 뜻이다.

날아가는 것이 아니라, 달려가는 것이 아니라,

걷는다는 것이다.

웅비라는 것, 질주라는 것, 절규라는 것 등을 않고서,

인내로서 하나님께 의뢰하고,

그 명하심따라 고요히 나날의 생애를 보내는 것이다.

 

특별히 대사업을 하려 않고, 대 전도를 시도하지 않고,

대 기적을 행하려 않는다.

다만 하나님의 명() 이를 중히 여기고, 그의 말씀 이에 따르며,

하나님을 믿는 이것 사업이라 믿고서, 무위와도 비슷한 생애를 보내는 일이다.

 

신앙의 생애의 대부분은 인내이다. 정숙이다. 대망이다.

그러므로 화려하게 눈부신 비약을 사랑하는 이 세상과

이 세상의 교회에는 칭찬받지 못하는 생애이다.

하지만 이는 하나님과 함께 걷는 (생활의) 생애이다.

이 세상과 교회에는 칭찬받지 못하나 하나님께 칭찬받는 생애이다.

 

하나님의 깊으심 같이 깊은 생애이다.

그의 고요함 같이 고요한 생애이다.

하나님 안에서 자기로 족함의 생애이다.

아무런 사업을 올리는 일 없대도 조금도 불만을 느끼지 않는 생애이다.

또 하나님에게서 아무것도 받는 일 없대도, 그 자신을 주신 까닭에,

그 나머지를 요구치 않는 생애이다.

 

그리고 에녹은 그러한 생애를 보낸 까닭에,

 

하나님, 그를 데려가시므로, 그는 있지 않았다고 있다.

 

히브리서 기자의 말에 의하면,

 

신앙에 의해, 에녹은 죽지 않고서(죽지 않기 위해) 옮겨졌다. 하나님 이를 옮기셨기 때문에, 사람, 찾아낼 수 없었다. 그는 아직 옮겨지기 전에, 하나님께 기뻐하시는 자로 증명되었다’(5일역)고 있다.

 

데려가시므로, 물론 죽으매라는 것이다.

신자의 죽음은 하나님께 안기어 가는 일이다.

 

있지 않았다는 것은, ‘보이지 않았다고 하는 것으로서,

사람, 찾아낼 수 없었다는 것과 같은 것이다.

사람은 누구도 그의 죽음을 몰랐다고 하는 것이다.

 

에녹의 생애가 평정하고 무애했음이랄지,

그에게 죽음의 고통이 없었음은 물론의 일,

그는 마치 땅에서 하늘로 옮겨짐 같이 평안히 이 세상을 떠났다.

 

죽음의 강을 도섭(wading)하는 일 없이,

날개를 펴서 그 위를 날아서 건너 감 같다.

신앙에 의해, 에녹은 오인이 말하는 죽음이라는 것을 면했다.

죽음은 그에게 있어서는 옮겨지는 일이었다.

사람에게 알려진 일없이 산 그는,

사람에게 알려진 일없이 죽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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