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8월 5일 토요일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의 유업으로 받을 땅에 나아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으며

  

아브라함의 신앙

 

히브리서 111-19: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2)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

3)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

4)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언하심이라 그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지금도 말하느니라

5)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겨졌으니 하나님이 그를 옮기심으로 다시 보이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는 옮겨지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

6)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7)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이지 않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경외함으로 방주를 준비하여 그 집을 구원하였으니 이로 말미암아 세상을 정죄하고 믿음을 따르는 의의 상속자가 되었느니라

8)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의 유업으로 받을 땅에 나아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으며

9) 믿음으로 그가 이방의 땅에 있는 것 같이 약속의 땅에 거류하여 동일한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은 이삭 및 야곱과 더불어 장막에 거하였으니

10) 이는 그가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라

11) 믿음으로 사라 자신도 나이가 많아 단산하였으나 잉태할 수 있는 힘을 얻었으니 이는 약속하신 이를 미쁘신 줄 알았음이라

12) 이러므로 죽은 자와 같은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하늘의 허다한 별과 또 해변의 무수한 모래와 같이 많은 후손이 생육하였느니라

13)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임을 증언하였으니

14) 그들이 이같이 말하는 것은 자기들이 본향 찾는 자임을 나타냄이라

15) 그들이 나온 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라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16) 그들이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을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

17)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그는 약속들을 받은 자로되 그 외아들을 드렸느니라

18) 그에게 이미 말씀하시기를 네 자손이라 칭할 자는 이삭으로 말미암으리라 하셨으니

19) 그가 하나님이 능히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개역개정 한글)

 

 

사람이 구원되는 것은 신앙에 의한다. 행위에 의하지 않는다.

그 의미에 있어서의 신앙은 신뢰이다.

어린아이의 마음으로서 하나님께 신뢰하고,

의심치 않고서 그 은혜에 참여하는 일이다.

 

하지만, 신앙의 의미는 신뢰로서 다그치지 않는다.

신앙은 또 확신이다. 내인(인내 patience)이다.

 

바울은 주로 신뢰의 의미에 있어서의 신앙을 부르짖었다.

그리고 신약성서의 다른 기자에 의해,

신뢰 이외의 의미에 있어서의 신앙이 주창된 것이다.

히브리서 기자에 의해 주창된 신앙은,

바울이 말한 그것과는 조금 뜻을 달리한다.

 

그는 말했다.

 

대저 신앙은 바라는 바를 의심치 않고, 아직 보지 못하는 것을 진실로 하는 것이다’(1일역)라고.

 

이는 퍽 난해의 일절이다.

 

의심치 않는다고 있는 것은 기초로 한다로도 역할 수가 있다.

 

진실로 한다고 있음은 증거의 뜻이다.

 

그러므로 밥티스트(침례) 교회역의 신약성서 따라,

 

대저 신앙은 바라는 바의 것의 기초이고, 아직 보지 못한 것의 증거이다라고

역할 수가 있다.

 

만약 오늘의 말로서 한다면,

 

신앙은 희망의 기초, 영계의 확인이라고 간약해도 지장 없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렇게 역한대서, 히브리서 기자가 일컫는

신앙이 무엇인지를 자세히 할 수는 없다.

11장 전체가 이 일절의 주석인 것이다.

옛 사람 이(믿음)에 의해 미칭을 얻었다’(2일역)

옛 사람고로(노인)의 뜻이다.

아벨, 에녹, 노아, 아브라함을 가리켜 말한다. 열조라고 하는 말과 같다.

 

미칭을 얻었다고 있음은, 4절에 있어서와 같이

증거(증명) 되었다고 역해야 할 것이다.

의자(義者)로서 증거(증명) 되었다는 것이다.

 

갈라디아서 36절에

 

아브라함, 하나님을 믿어, 그 신앙에 의해 의롭다함을 얻었다’(일역)고 있음은 이것이다.

 

의자로서 인정된 것이다, 의자임의 미칭을 얻었다고 해석할 수가 있다.

그러나 미칭은 승인의 결과이다.

승인(증명) 그것은 아니다.

 

이스라엘의 열조(선조)가 하나님께 그 의를 인정받는 것은

그들의 신앙에 의해서인 것이다.

무용(武勇)에 의해서가 아니다, 재지(才智)에 의해서가 아니다,

기타의 위훈, 공적에 의해서가 아니다,

신앙에 의해서이다.

 

이스라엘은 신앙으로서 위대한 국민이다.

이스라엘에서 그 신앙을 제할 때,

그들은 취할 것 못되는 국민이다.

이스라엘의 공적을 칭양하고자 하면 그 신앙을 칭양하는 외에 길은 없다.

이스라엘은 인류에게 신앙의 대가(authority)를 제공하여,

지금도 그 정신적 지도자의 지위에 있는 것이다.

 

우리는, 신앙에 의해, 온 세계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은바 되고, 그렇듯 보이는 바의 것은 볼 수 있는 것에 의해 지은 바 되지 않음을 안다’(3일역)

 

온 세계우주 만물.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지어졌다’.

 

창세기 1, 시편33:6, 9. 베드로후서 3:5등 참조.

 

말씀은 언어에 한하지 않는다.

모든 안에서 밖으로 나타나는 것은 말이다.

하나님은 그 자신의 속에 무한하게 보유하신 힘(능력)을 밖으로 나타내시어,

천지와 그중에 있는 만물을 창조하셨다는 것이다.

 

보이는 바의 것’, ‘보이지 않는 바의 것

철학의 말로서 한다면, 현상(phenomenon)과 실체(noumenon)이다.

 

우주 만물은 실체가 밖에 나타난 것으로서,

현상의 위에, 혹은 그 속에, 감관으로서는 느낄 수 없는 바의 실체가 있다는 것은,

그리스 철학이 주창한 것이다.

 

그리고 비철학적이었던 이스라엘인은, 현상실체라 하지 않고서,

보이는 바의 것, 보이지 않는 바의 것이라고 했다.

보이는 바의 것은 온 세계였다.

 

바울의 이른 바 수조물’(피조물)이었다.

눈으로서 보고, 손으로서 만질 수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에 대하여 보이지 않는바의 것이 있다.

그것은 즉 하나님이었다. 영이었다. 생명이었다.

영의 세계인 내세였다. 바울은 이자를 대조하여 말했다.

 

대저 보이는 것은 잠시이고, 보이지 않는 바의 것은 무궁하기 때문이다’(고린도후서 4:18일역)라고.

 

보이는 바의 것은 보이는 바의 것에 의해 창조된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바의 것에 의해 창조되었다는 것은,

우리들이 신앙에 의해 아는 일이다.

 

우리들은 그 일에 관하여 증명을 제공할 수는 없다.

그러나 우리들은 본능적으로 그것을 안다.

우리들은 사람의 개인성이란, 보이는 그의 육체에 있어서가 아니라,

보이지 않는 그의 영에 있어서임을 안다.

 

보이는 만물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었다는 것은,

우리들이 학자의 증명을 기다리지 않고서 믿는 바이다.

 

그런데서, 신앙은 이스라엘 백성에 한정된 능력이 아니라,

인류통유의 본능성이다.

 

히브리서 기자가 여기서 신앙의 미를 칭양하고,

특히 이스라엘인의 특성을 칭양하는 것은 아니다.

인류통유의 본능성인 신앙의 미에 대하여 말하려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제1절에서,

 

신앙은 보지 못하는 것의 증명이다라고 했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인류 전체의 인정하는 바라고,

그는 제3절에 있어서 말하고 있는 것이다.

 

사람 혹은 말하리라.

옛 사람은 그렇게 믿었을 것이나 지금의 사람은 그렇지 않다,

지금의 사람은 물질의 원인을 물질 이외에 있어서 구하지 않는다,

물질은 물질 존재의 가장 확실한 증명이라고.

 

하지만 대철학자는 오늘이라 해도 그렇게는 믿지 않는 것이다.

칸트(7141)를 비롯하여 스펜서(272)에 이르기까지

물질의 궁극적 원인은 이것을 물질 이상의 힘에 있어서 구하지 않을 수 없었다.

 

혹은 신이라 하고, 혹은 제1원인이라 하나,

그것이 물질 이상적인 점에 있어서는 틀림없다.

혹은 원자(atom)라 하고, 혹은 전자(electron)이라 하나,

그 보이지 않는 점에 있어서는 하나이다.

 

근세의 가장 진보된 학설에 의해도, 1900년 전의 옛날,

히브리서의 기자에 의해 제출된

 

그렇게 보이는 바의 것은, 볼 수 있는 것에 의해 창조된 것이 아니다라는 명제는

움직일 수는 없는 것이다.

 

기자는 제1로 신앙이 무엇인가에 대하여 말했다.

이르기를,

 

신앙은 희망의 기초, 보이지 않는 것의 증명이라고.

 

그는 제2, 신앙이야말로,

이스라엘국 건국의 정신임을 말했다.

이르기를,

 

이스라엘의 고로(열조), 신앙에 의해 의자로서 증명되었다.

 

그는 제3으로, 신앙이야말로,

인류의 통유성임을 말했다.

이르기를,

 

우리들(이스라엘인에 한하지 않고, 그리스인도, 에집트인도 인류 전체는), 신앙에 의해, 우주만물이,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 지은 바 되었다.

 

그리하여 그는 신앙개론을 진솔하여 마쳤다.

그는 이제부터 이스라엘 역사에 나타난 신앙의 실례,

및 그 제 방면에 대하여 말하려 하는 것이다.

 

이스라엘인의 신앙사에 있어서 많은 신앙적 영웅이 있었다.

아벨이 있었다. 에녹이 있었다. 노아가 있었다.

아브라함이 있었다. 이삭이 있었다. 야곱이 있었다.

요셉이 있었다. 모세가 있었다. 여호수아가 있었다.

기드온이 있었다. 삼손이 있었다. 사무엘이 있었다. 다윗이 있었다. 아모스가 있었다.

호세아가 있었다. 이사야가 있었다. 예레미야가 있었다.

에스겔이 있었다. 다니엘이 있었다. 기타 매거 하기에 겨를이 없다.

 

실로 신앙적 영웅의 성라(성군)라고 일컬어야 할 것이다.

신앙을 그 모든 방면에 있어서 대표하고, 이스라엘의 역사를 장식한다.

인류의 신앙 역사로서 이스라엘의 그것같이 풍부한 것은 없다.

 

이스라엘의 신앙은 가장 균제적(균형적)으로 아브라함에 있어서 나타났다.

아브라함은 가장 원만한 신앙가이다.

그러므로 그를 칭하여

 

모든 믿는 자의 아버지’(로마서 4:11일역)라고 한다.

 

그는 즉 모범적 신자이다.

그리고 그보다 전에 세 신앙적 위인이 있었다.

 

아벨, 에녹, 노아, 이들이다.

 

그들 3인은 신앙의 3 방면을 대표하고,

각자 그 방면에 있어서 우수했다.

 

아벨은 그 승(우승)한 제물로서,

에녹은 그 평정한 신앙적 생애로서,

노아는 그 신앙적 파단으로서,

잘 신앙의 세 방면을 대표했다.

 

그리고 아브라함에 이르러 이들 세 방면은 그 한 사람에 있어서 나타난 것이다.

 

마치 천연물의 진화에 있어서, 다른 능력은 다른 생물에 있어서 발달하여,

마침내 우수한 생물에 있어서,

모든 능력이 동시에 또는 잇달아(연달아) 나타나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의 신앙에 대하여 배움에 있어서,

우리들은 아벨, 에녹, 노아 세 사람 각자의 신앙에 대하여 배움의 필요가 있다.

 

그리스도는 침례 요한이 있어서 그의 선구로 된 것 같이,

아브라함에게 3인의 선구 있어서, 그 위해 신앙의 길을 예비한 것이다.

만약 연대에서 말하면, 아벨이 제1이고, 그 다음이 에녹, 나중이 노아이다.

하지만, 만약 신앙의 성질에서 말한다면,

노아의 신앙이 가장 단순하고, 에녹의 신앙이 이에 다음가고,

아벨의 신앙이 최후, 즉 최상에 위치하는 것이다.

 

우리들은 또 같은 일을 천연계에서 보는 것이다.

천연계에 있어서도, 최초에 나타난 것은 최하등의 것은 아니다.

이른 바 유형은 비교적 상등식물 또는 동물로서 나타나고,

이에 이어서 열등의 것이 나타나고, 그런 후에 다시 진화의 정도를 진전하는 것이다.

 

이같이 신앙발달의 순서도 또 진화의 상도에 어긋나지 않았다.

성서 기자는 오늘의 이른 바 진화론자가 아니었지만,

그들은 충실하게 사실 그대로를 기록했기 때문에,

그 기사는 절로 천연적이었다.

 

성서와 과학과의 친밀한 관계는 이 부근에서 구해야 할 것으로 생각한다.

사실이 그러하매, 우리들은 아브라함의 신앙에 대하여 배우고자 하는데 있어서,

노아를 먼저하고 에녹과 아벨을 뒤로하지 않으면 안 된다.

 

즉 제7절을 먼저하고, 4절 이하 6절까지를 뒤로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 이유는, 아브라함에 있어서는, 신앙은 최초에 그 가장 단순한 상태,

즉 노아로서 나타나 상태에 있어서 나타났기 때문이다.

 

신앙에 의해, 노아는, 아직 보지 못한 일의 계시를 받고, 조심하여, 그 가족을 구원하기 위해 방주를 마련했다. 이것으로 세상 사람의 죄를 정하고, 또 신앙에 의한 의를 받을 사자(상속인)로 되었다. ’(7일역)

 

아직 보지 못한 일보이지 않는 일이다.

미래에 올 하나님의 재판이다.

 

노아의 경우에 있어서는 홍수이다.

계시를 받았다묵시를 받은 일이다.

신언(神言) 그에게 임했다는 것이다.

노아에게 신앙 있으매, 묵시는 그에게 임한 것이다.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