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히 변치 않는 예수
히브리서 13장 8절 :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도 오늘도, 언제까지도 변치 않으신다’(히브리서 13:8일역)
때는 변합니다. 세월은 가고 다시 돌아오지 않습니다.
사람은 변합니다.
거년(last year) 있었던 사람으로 금년 없는 이가 있습니다.
거년 친구였던 이가, 금년은 적이 되어 있는 이가 있습니다.
세상은 변합니다.
오늘의 세계를 십년 전의 그것에 비교하여 볼 때,
전혀 별세계의 느낌이 있습니다.
‘이 세상의 상태는 지나가는 도다’(고린도전서 7:31일역)라고 바울이 말했는데,
실로 그대로입니다.
내년의 오늘까지에 세계에 어떠한 대변동이 올른지 모릅니다.
실로 불안한 것은 인생입니다.
내가 알고 있는 사람으로,
작년 말에는 대부호였던 사람이,
오늘은 나보다 훨씬 가난한 사람이 있습니다.
대은행, 대회사라 해도, 망할 때에는 잠깐 사이에 망합니다.
백 년 전의 부호로서 그 부를
오늘까지 유지하고 있는 자는 실로 요요(극소수)한 것입니다.
안심이란 단지 비교적인 것입니다.
그것을 생각할 때,
크리스마스도 신년도 경사스럽지가 않습니다.
그러면 인생은 불안한 것이라고 채념하여 그것으로 안심할 수 있을지요?
어떤 사람은 될 수 있다고 합니다.
무슨 일이건 체념(단념) 하나라고 합니다.
그러나 체념은 망강(oblivion)입니다.
우리들은 단념하여 기뻐할 수는 없습니다.
참된 안심은 잊어버리는 일은 아닙니다.
상기하는 일입니다.
어떤 하나의 확실한 사실이 있어,
그것을 믿고,
그것을 상기(생각)함으로서 참된 안심은 있는 것입니다.
변하여 가는 세상에 있어서,
어떤 하나의 변하지 않는 이에 의뢰하여,
비로소 참된 안심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안심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그는
‘오늘도 어제도, 언제까지도 변치 않는다’고 있습니다.
그것은,
단지 그의 말씀하신 진리는 영구히 변치 않는 진리라는 것은 아닙니다.
혹은 또 그를 가지고서(그에 의해) 실현된 이상은
영원히 변치 않는다는 것도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영원한 존재자로서,
그 사랑과 의와 성실로서 영원히 변치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신자에게 있어서,
그리스도는 단지 일개의 역사적 인물은 아닙니다.
그는 죽었다가 부활하여,
하늘에 올라가,
지금은 아버지의 오른 편에 앉아 영원히 세상을 다스리는 분이십니다.
그 의미에 있어서,
그는 어제도 오늘도,
언제까지든 변치 않으시는 것입니다.
그는 알파요 또 오메가,
옛적에 계시고,
지금 계시며, 후에 계실 이 십니다.
즉 우리들 신자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히 변치 않는 구주를 가지는 자입니다.
‘내가 살았으매, 너희도 살 것이다’(요한복음 14:19일역)라고
그는 말씀하시어,
그의 영원토록 변치 않으시는 것이
우리들도 또한 변치 않는 자일 수 있는 이유로 되는 것입니다.
내 생명의 주는 변치 않으십니다.
그러므로 무엇이 변한대도 우리들은 안전합니다.
‘나는 산 자라, 전에 죽었었노라, 보라, 나는 세세토록 살아 있을 것이다’(계시록 1:18일역 참조)라고 하신 이,
그 그리스도가 내 구주이심을 알 때,
세월은 가고 세월은 오며,
사람과 세상은 끊임없이 변하여 간대도,
우리들은 주와 함께 변치 않는 것입니다.
잇뀨우가쇼우(일휴화상 1394-1481 일본의 승려)의
‘가도마쯔(문송일신년장식 소나무)는 저승길(명도여)의 이정표,
기쁘기도 하고, 기쁘지 않기도 하다’는 것은 인정 그대로를 노래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 안에 영생을 바라는 마음이 담겨져 있다는 것은 누구나 알 수가 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불변적 생명을 요구합니다.
이는 사람에게 영원성 있는 무엇보다도 좋은 증거입니다.
그런데 우주만물 모두가 변해가는 것입니다.
거기에 인생의 적적함이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아들은 사람의 모양을 취하여 나타나,
죽음에 이기시고, 영생을 획득하여,
또 이것을 사람에게 주시는 길을 여셨습니다.
‘그리스도, 죽음을 멸하시고,
복음으로서, 생명과 썩지 않은 것을 분명히 보여주셨도다’(디모데후서 1:10일역)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인생의 적막은 완전히 제거된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믿어, 제야의 종은 그 슬픈 가락을 잃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기쁨으로서 옛 것을 보내고 새 것을 맞이합니다.
(1922년 12월 31일 금정관에서).
*내촌감삼의 (1923년 3월 ‘성서지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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