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삭의 헌상(獻上)
(히 11:17-19) 그 외아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그는 약속들을 받은 자로되 그 외아들을 드렸느니라
18) 그에게 이미 말씀하시기를 네 자손이라 칭할 자는 이삭으로 말미암으리라 하셨으니
19) 그가 하나님이 능히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
신앙에, 용행과단,
세상과 끊고, 죄악과 끊고,
하나님과 정의에 가담하는 것이 있다.
노아의 신앙은 이 신앙이었다.
그리고 아브라함에게도 또 이 신앙이 있었다.
신앙에, 오래 대망에 견디며, 무위와도 비슷한 생애를 보내면서,
조금도 서두르지 않고, 약속의 집행으로서 하나님께 다가서는 일없이,
고요히 그와 함께 행하며 하늘의 묵시를 받는 것이 있다.
에녹의 신앙은 이 신앙이었다.
그리고 아브라함에게도 또 이 신앙이 있었다.
하지만, 신앙은 과단 정숙에 그치지 않는다.
더 나아가 최선을 하나님께 드리려 한다.
신앙의 종극은 희생이다.
아벨의 신앙은 이 신앙이었다.
그리고 모든 믿는 자의 아버지인 아브라함은,
이 신앙에 있어서 완전에 가까운 모범을 후세에 남겼다.
‘신앙에 의해, 아벨은 가인보다도 나은 제물을 하나님께 드렸으므로,
의자(義者)의 증거를 받았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 제물에 대하여 증거하셨기 때문이다.
이에 의해, 그는, 죽었으나, 그대로 말하고 있는 것이다’(4일역)
일(기록)은 창세기 제4장에 자세하다.
아벨은 잘 희생(제사)의 뜻을 알고,
하나님의 의로운 요구에 응하여,
의로운 마음으로서 이를 드렸다.
제물을 드리는 점에 있어서는, 형인 가인과 조금도 다를 바 없었으나,
그 동기에 이르러서는, 이자 사이에 천지의 차가 있었다.
가인은 하나님의 노를 제하기 위해, 공포의 마음에서 드린데 대하여,
아벨은 하나님의 의를 알아, 종순한 마음에서 이 일을 했다.
그러므로 ‘하나님, 그 제물에 대하여 증거하시었다’고 있다.
이것을 가납하셨다는 것이다.
그리고 마음에 하나님을 증오한 가인은,
하나님께 의롭다함을 얻은 아벨도 미워하고,
마침내 그를 죽었였으므로, 그 아벨은 죽어,
지금도 여전히 하나님의 의와 희생의 의무를 부르짖어 마지않는다는 것이다.
하지만, 아브라함에 이르러, 희생은 아벨의 그것보다도 훨씬 높고,
또 훨씬 나은(승한) 형태로서 나타났다.
아브라함은 아벨 따라, 그 신앙의 희생으로서 나타냈다 하나,
그러나 그 희생은, 아벨의 그것보다도 훨씬 귀한 것이었다.
신앙을 모든 방면에 있어서 현저히 발휘한 아브라함은,
희생의 신앙에 있어서 그의 신앙의 정상에 달했다.
‘신앙에 의해, 아브라함은, 시험받은 때, 이삭을 바쳤다’(17일역)
‘신앙에 의해’
옳다, 신앙에 의하지 않고서 그는 이 일을 할 수 없었다.
신앙에 의해서만, 그는 이것을 할 수 있었다.
만약 사람의 사고로서 했다면,
만약 상식에 의해 이해득실을 생각했더라면,
옳다, 만약 단지 윤리사상에 지배되어 그의 양심의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면,
가령 아브라함이라 해도, 이 일은 할 수 없었음에 틀림없다.
신앙에 의해, 옳다, 신앙에 의해,
그는 사람으로서 하기에 가장 어려운 이 일을 한 것이다.
‘시험받은 때’
그의 신앙을 시험받은 때, 그것이 과연 참 신앙인지 아닌지,
그는 과연 자기 아들보다도 주 하나님을 사랑하느냐 아니냐를 시험받은 때,
그 아브라함은 이 신앙의 시험에 낙제하지 않고서 급제한 것이다.
하나님은 실로 사람의 신앙을 시험하신다.
이는 그가 사람의 마음을 아시지 못하기 때문은 아니다.
사람의 신앙을 강하게 하기 위해서이다.
그에게 신앙의 시련을 주어, 그를 보다 높은 신앙에 인도하기 위해서이다.
신앙의 시련이다. 시유는 아니다.
악마는 신자를 유혹하는데 반하여 하나님은 그를 연단하신다.
하나님은 끝까지 그 사랑하는 자녀를 시험하시어,
그로 하여금 자기에게 가까이하게 하신다.
‘이삭을 바쳤다’
그의 외아들 이삭을 바쳤다.
바쳤을 뿐으로 했다는 prosenenochen, hath offered up, 과거 완료동사이다.
바쳐 끝냈다는 뜻이다.
아낌없이 바치고, 뒤에 다시 자기 것으로서 인정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그의 한 아들을 요구받고,
단연 뜻을 결하여(아무리 고통스럽다 해도!),
아주 바치는 것으로서 그를 바쳤다는 뜻이다.
아브라함의 이삭 헌상은 반신반의하는 중에 행해진 행위는 아니었다.
그는 그때 그곳에 그를 바쳐버린 것이다.
‘그는 기쁘게 약속을 받은 자이나, 그 외아들을 바쳤다’(17하 일역)
이 희생을 바친 자 누군가? 아브라함이다.
그는 백년 기도하여 약속의 것을 얻은 그것을 바친 것이다.
즉 그 한 아들을 바친 것이다.
세상에 아들보다 더 귀한 것은 없다.
더구나 기도에 의해 노년에 이르러 얻은 아들이다.
더구나 외아들이다. 귀한 위에 더 귀한 것이다.
금보다도, 은보다도, 보옥보다도, 전 세계보다도,
옳다, 나 자신보다도, 귀한 것이다.
그렇지만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요구되어, 이것도 아낌없이 바친 것이다.
얼마나 한 희생인가?
얼마나 한 헌신인가?
얼마나 한 신앙인가?
인간이 바칠 수 있는 희생(제사)으로서 이보다 이상의 것은 없다.
하지만 아브라함은 신앙에 의해 시험받은 때, 이것도 바친 것이다.
위대하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신앙!
‘이 아들에 대해서는 헤아려 말씀하시었다.
“네 후손은 이삭에 의해서 되었다고 불린 것이다”라고’(18일역)
사실(기록)은 창세기 17장 19절, 동 21장 12절의 기사에 의한다.
아브라함은 그 외아들 이삭을 바쳤다고 한다.
그러나 그에게 아직 달리 수명의 아들이 있었다.
하갈이 낳은 이스마엘이 있었다(16:15).
그두라가 낳은 5인의 아들이 있었다(동 25:1).
하지만, 이삭 하나가 약속의 아들이었다.
그에 의해 아브라함의 후에는 불리 우리라는 것이었다.
즉 선민은 아브라함의 후예 또는 이삭의 후예로 불리 울 것이었다.
하늘의 별같이 바닷가의 모래같이 번식할 아브라함의 자손은,
이삭에 의하지 않고서는 태어나지 않으리라는 것이었다.
이 약속을 입은 이 아들이었다.
그리고 이 아들을 바치라는 명령이 내린 것이다.
약속 중한가?
명령 중한가?
약속과 명령 그 경중 여하?
약속은 폐지될 수 없다. 명령은 거스릴 수 없다.
가련하다, 아브라함은 여기서 하나님께로 부터 커다란 수수께끼가 주어진 것이다.
그는 어떻게 하여 이 수수께끼를 풀 것인가?
그는 이때, 마음에 생각했으리라, 신앙의 생애는 어렵기도 하다,
신앙의 생애에 들어서지 않으면 이러한 문제에 조우하는 일 없다.
세상 사람은 그러한 문제 있는 것조차 모른다.
하나님은 무익하게 사람을 괴롭히시는 것 아니랴,
하나님은 신자가 신앙 문제로 번민하며 괴로워하는 것을 보고 기뻐하시는 것 아니랴?
아브라함은 이때 욥과 함께 외쳤으리라.
‘나는 생명을 싫어하나이다. 나는 오래 살기를 원치 않나이다.
나를 버려두소서. 내 날은 숨 같이 되었나이다.
주, 사람을 무엇으로 보시며, 아침마다 그를 감시하시고,
때를 가리시는 일 없이 이를 시험하시는지요?’(욥기 7:16이하 일역)라고.
하나님께 유의된 자는 행복이면서 또 불행이다.
그에게 세인이 알지 못하는 기쁨이 있다.
동시에 또 세인이 알지 못하는 슬픔이 있다.
신자가 해석에 괴로워하는 문제는 세상의 상상 이외이다.
‘그는 생각하기를, 하나님은 죽음에서 이것을 부활시킬 수 있는 것이라고’(19상 일역)
수수께끼는 풀기에 어려운 바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목적 없이 이 난제를 아브라함에게 가져온 것 아니다.
수수께끼는 그 가운데 커다란 진리를 간직하고 있었다.
이 수수께끼를 통하여 아브라함은 커다란 묵시에 접할 것이었다.
그는 부활의 진리를 배우고 있었던 것이다.
전에는 약속의 땅을 대망하여 얻지 못하고,
종생유랑의 생애를 계속하여, 하늘에 도성이 예비 되어 있음을 안 것 같이,
지금은 또 여기서 약속의 아들을 드리라는 풀기 어려운 명에 접하여,
부활의 진리를 계시 받은 것이다.
‘그는 생각하기를’이라고.
그는 문제에 재촉되어 부득이 이 결론에 달했던 것이다.
하나님의 묵시는 밖에서 오지 않고서 안에서 생긴다.
하나님은 그 진리를 사람의 사상으로서 전하신다.
아브라함은 고투 번민 끝에 드디어 이 결론에 달한 것이다.
‘그는 생각하시기를, 하나님은 죽음에서 이것을 부활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이렇게 해석치 않고서, 이 수수께끼는 풀리지 않았던 것이다.
이 해석에 의해, 약속과 명령은 일치했던 것이다.
이삭에 의해 선민은 일어날 것이다, 이는 약속이다.
희생(제물)으로 이삭을 드리라, 이는 명령이다.
그리고 약속도 명령도 동일한 하나님께서 나은 것이매,
그 사이에 조화 일치가 없어서는 안 된다.
그리하여 부활의 신앙에 있어서만 이 조화를 볼 수가 있는 것이다.
귀하다. 이 발견. 신앙은 그렇게 하여 얻어지는 것이다.
서재에 들어앉아 서적 중에 묻혀 얻어지는 것은 아니다.
교사의 설교를 듣고서 얻어지는 것은 아니다.
인생의 실제 문제에 조우하여, 피와 눈물로서
이 해석을 구하여, 마침내 얻어지는 것이다.
‘부활의 신앙’,
아브라함은 그 외아들 이삭을 바쳐 이 신앙을 얻었다.
신학자에게서가 아니다. 철학서를 펴서가 아니다.
그 외아들을 바치는 고통스러운 실험에 의해,
인생 최대의 오의인 부활신앙에 달한 것이다.
귀하다, 환난. 귀하다, 시련. 귀하다,
시련을 거쳐 내게 임한 커다란 광명,
실로 사도 야고보가 말한 대로이다.
‘내 형제여, 만일 너희가, 여러 가지 시련을 만나거든,
이것을 기쁜 일로 여기라’(야고보서 1:2일역)고.
또 사도 베드로가 말한 대로이다.
‘너희의 신앙을 시련 받는 것은, 썩을(없어질) 금이
불로 연단되는 것보다도 귀하다’(베드로전서 1:7일역)고.
아브라함은 몸을 불태우는 것보다도 고통스러운 신앙의 시련에 의해,
금보다도 귀한 부활의 신앙을 획득한 것이다. ‘
즉 죽음에서 그를 받은 것 같이 이다’(19하 일역) 이는 일본역 성서의 역사이다.
그러나 원어의 의의를 통하게 하는 데는 아주 불완전하다.
그리스어의 en parabole(영어의 in a parable)는,
그저 일본어의 ‘같이’로서 통할 수는 없다.
파라볼레는, 복음서에 있어서는 비유로 역(譯) 된 말이다.
파라볼레(영어의 패러블 parable)는 비유이기도 하고, 또 모형이기도 하며,
또 비교(비유 Comparison)이기도 하다.
같은 히브리서의 9장 9절에
‘이 장막은 그 때 위해 마련된 표식(모형)이다’라고 있는
그 ‘표식’(symbolic 표상, 상징)이라는 말이,
그 경우에 있어서의 패러블의 역사이다.
즉 황야에 마련된 장막은 성전의 지성소의 표식 즉 모형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제11장 19절의 이 경우에 있어서도, 패러블은 이에 유사한
의의로 해석되지 않으면 안 된다.
‘즉 표식으로서, 혹은 닮게, 죽음에서 그를 받았다’고.
하지만, 어떤 표식으로서, 무엇 닮게,
아브라함은 이삭을 죽음에서 받았던 것인가?
이는 더욱 연구를 요하는 문제이다.
여기서 ‘받았다’고 있는 것은 ‘되찾았다’는 뜻이다.
아브라함은 어떤 자의 표식으로서, 혹은 어떤 일을 닮게,
이삭을 죽음에서 되찾았던 것이다.
그리고 말할 것도 없이 아브라함은 그리스도의 표식(표시)으로서
이삭을 죽음에서 되찾은 것이다.
여기서, 그리스도의 부활에 닮게, 이삭은 아브라함의 손에 되찾아진 것이다.
아브라함은 신앙에 의해, 그리스도 강세를 멀리하기 2천년 전에,
그 아들의 생환으로서 그리스도의 부활을 제시한 것이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유대인에 대해 아브라함에 관하여 증거하신 말씀에 의해 알 수 있다.
‘너희의 선조 아브라함은, 내 날(생애에 있는 날)을 보기를 기뻐하고,
또 이것을 보고 즐거워했다’(요한복음 8:56일역)고.
즉 아브라함은 그가 모리아 산에서 그 외아들 이삭을 하나님께 바친 때에,
그의 후손에서 태어날 그리스도의 생과 죽으심과 부활에 대하여
하나님께로부터 묵시를 받은 것이다.
그에게 있어서는 이삭의 생환은 그리스도의 부활의 표식이었다.
그 예조였다. 그는 이 최대의 희생(제사)에 의해,
하나님이 드디어 인류 위해 제공하실
최대의 희생에 대하여 예시 받은 것이다.
사람의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의 표식이다.
사람의 고통은 하나님의 고통의 표식이다.
그리고 또 사람의 희생은 하나님의 희생의 표식이다.
아브라함은 시험받아, 그 외아들을 하나님께 바쳐,
조금 하나님의 사랑과 그 고통과 그 희생과의 가치를 알 수가 있었다.
인생의 목적은 하나님을 아는데 있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긴 신앙의 생애 의해,
남보다도 깊이 하나님을 알 수가 있었다.
정실과 끊고 고향 갈대아를 떠나, 하나님의 정의를 알 수가 있었다.
오래 홀로 고요히 하나님과 동행하여,
하나님의 설계하여 만드신 기초 있는 하늘의 도성을 바랄 수가 있었다.
그리고 최후에, 그 외아들 이삭을 하나님께 바쳐,
하나님의 사랑, 즉 외아들 그리스도의 희생에 대하여 알 수가 있었다.
그리하여 아브라함의 경우에 있어서도, 사도 바울이 말한 대로,
‘하나님의 의는 나타나 신앙에서 신앙에 이르렀다’(로마서 1:17일역)는 것이다.
175년에 걸친 아브라함의 생애는,
신앙에 의해 광명에서 광명으로 향하여 나아가는 은혜의 생애였다.
모든 믿는 자의 아버지로서의 특권을 받은 그 아브라함은,
사람의 자녀 중에 있어서 가장 복된 자이다.
끝으로 한 가지 주의할 것이었다.
아브라함은 죽음에서 이삭을 되찾아,
다시 자기 아들을 되찾은 것은 아니다.
그는 이미 이삭을 바쳐버렸던 것이다.
(17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그는 약속들을 받은 자로되 그 외아들을 드렸느니라).
그 때 이미 그는 이삭의 아버지로서의 권리를 방기했던 것이다.
이삭은 이미 아브라함의 아들은 아닌 것이다.
그러므로 다시 이것을 되찾았다고 해서, 자기 아들을 자기에게로 되찾은 것은 아니다.
제물은 이미 완전하게 하나님에게 바쳤던 것이다.
이후의 이삭은 하나님의 소속인 것으로 아브라함의 소속은 아니다.
이삭을 아브라함에게 돌려주시어, 하나님은 이것을 그에게 맡기신 것이다.
가련하다! 아브라함은 의연히 자식 없는 자였다.
그러나 그는 자기 아들을 잃어, 모든 믿는 자의 아버지로 되었다.
한 아들을 잃고, 미래 영원에 이르기까지,
모든 믿는 자의 아버지로 되었다.
아아, 내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도 또한 은혜에 의해,
조금이라도 당신의 마음을 알 수 있어,
하나님께 감사하나이다.
*내촌감삼의 (1913년 10-12월 ‘성서지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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