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8월 11일 금요일

내 아들아 주의 징계하심을 경히 여기지 말며 그에게 꾸지람을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라

  

고난을 인내해야 할 이유

 

성 경: [12:4-13] 너희가 죄와 싸우되 아직 피흘리기까지는 대항하지 아니하고

5) 또 아들들에게 권하는 것 같이 너희에게 권면하신 말씀도 잊었도다 일렀으되 내 아들아 주의 징계하심을 경히 여기지 말며 그에게 꾸지람을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라

6)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가 받아들이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라 하였으니

7)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버지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8)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친아들이 아니니라

9) 또 우리 육신의 아버지가 우리를 징계하여도 공경하였거든 하물며 모든 영의 아버지께 더욱 복종하며 살려 하지 않겠느냐

10) 그들은 잠시 자기의 뜻대로 우리를 징계하였거니와 오직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그의 거룩하심에 참여하게 하시느니라

11)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단 받은 자들은 의와 평강의 열매를 맺느니라

12) 그러므로 피곤한 손과 연약한 무릎을 일으켜 세우고

13) 너희 발을 위하여 곧은 길을 만들어 저는 다리로 하여금 어그러지지 않고 고침을 받게 하라.

 

 

[12:4] 너희가 죄와 싸우되 아직 피흘리기까지는 대항하지 아니하고 본절은

앞절과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의 고난과 수신자들의 고난에 대한 비교이다.

 

저자는 이 비교를 통해서 그리스도께서 당하신 고난이

수신자들이 당하는 고난보다 훨씬 극심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인내하신 것과 같이 수신자들도 그래야 함을 시사한다.

 

'죄와 싸우되'는 수신자들의 공동체와 악의 세력과의 갈등을 나타내는 것으로

''1절에서 언급한 '죄 자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3절의 '죄인들'과 같이 악의 무리를 가리킨다(Lane).

 

한편 '피흘리기까지는 대항치 아니하고'는 수신자들이 죄에 대항하여 당한 고난이

순교에까지 이르지 못했음을 의미한다.

 

수신자들은 고난을 당할때 자신들보다 더 심한 고난을 당한

허다한 증인들과 수치와 죽음에도 인내하신 그리스도를 생각하며

결코 낙심해서는 안 되며 그들과 같이 인내하고 고난에 잘 대응해야 한다.

 

 

[12:5-6] 또 아들들에게 권하는 것 같이 너희에게 권면하신 말씀도 잊었도다 일렀으되 내 아들아 주의 징계하심을 경히 여기지 말며 그에게 꾸지람을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라

6)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가 받아들이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라 하였으니

 

또 아들들에게 권하는 것같이 너희에게 권면하신 말씀을 잊었도다 - 본문은

 

'아들들인 너희에게 말한 권면을 완전히 있었느냐?' 라는 의미의 수사학적 의문문이다.

 

이 물음을 통해서 저자는 수신자들이 훈련과 교육의 측면에서 부과된

고난의 바른 개념을 완전히 잊어버렸음을 확고하면서도 부드럽게 비난하고 있다.

 

다음에 언급되는 인용문을 통해서 저자는 수신자들이 인내해야만 했던 고난이

훈련의 성격을 띤 것임을 진술하고 있다.

 

내 아들아 주의 징계하심을 경히 여기지 말며 그에게 꾸지람을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라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자를 징계하시고 그의 받으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니라 - 본문은 잠 3:11,12의 인용이다.

 

(3:11-12 그들이 네게 말하기를 우리와 함께 가자 우리가 가만히 엎드렸다가 사람의 피를 흘리자 죄 없는 자를 까닭 없이 숨어 기다리다가

12) 스올 같이 그들을 산 채로 삼키며 무덤에 내려가는 자들 같이 통으로 삼키자)

 

이는 하나님의 징계하시는 행위에 대한 의도를 나타내는 바,

하나님께서는 자신과 더 밀접한 관계를 형성하기 위해서 그리스도인들을

개인적으로 혹은 집단적으로 고난을 통해서 훈련 시키심을 시사한다.

 

'징계하심'에 해당하는 헬라어 '파이데이아스'는 꾸짖음, 교정, 징벌과 같은

수단을 통해서 교훈하시며 교육하시는 것을 의미한다.

 

(8:5 너는 사람이 그 아들을 징계함 같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징계하시는 줄 마음에 생각하고).

 

하나님은 자식이 잘 되기를 바라는 부모와 같이 자기 백성을 지극히 사랑하셔서

고난을 통해서 자신의 뜻에 순종하도록 함으로 목표에 도달하도록 훈련시키신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징계와 책망은 하나님과 그리스도인 사이가

부모와 자식간의 관계임을 나타내어 '아들됨'을 강조하는 것이며

동시에 자식에 대한 하나님의 책임과 사랑을 시사한다(Bruce, Hewitt,Morris).

 

한편 본문의 '내 아들들아'에는 교사가 학생을 부를 때 사용된 표현이다(Lane, E.Ahlborn).

 

저자는 이러한 의미를 지닌 70인역에 그리스도인들이 새 언약을 이루신

그리스도의 중재를 통해 하나님의 아들됨을 강조하고 있다(Bertram, Bornkamm).

 

 

[12:7]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버지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 '너희가 참음은''너희는 징계를 참으라'

의미로 해석한다(Morris).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비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 본문은 아버지로서 자녀를 징계하는 것이 보편적인 것임을 말하는 수사학적 표현이다.

아들이 아버지와 징계를 받는다는 사실은

아버지가 그 아들을 진정한 아들로 인정한다는 의미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고난을 통해 징계를 하신다는 것은

아버지로서의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아들로 인정하고 계심을 시사한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은 이 땅에서 당하는 고난을 슬퍼하거나 좌절하는 것이 아니라

그 고난이 하나님의 징계로 하나님의 아들됨의 증거임을 깨달아 기뻐해야 한다.

 

 

[12:8]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친아들이 아니니라 저자는

본절에서 징계를 받지 않는 경우를 통해서 징계가 아들됨의 증거임을 반증한다.

 

'사생자'에 해당하는 헬라어 '노도이'는 노예나 첩의 아들을 나타낼 때

사용되는 단어로 모든 사생아를 의미한다.

 

또한 '친 아들이 아니니라'는 서자(庶子)를 가리킨다.

 

만약 그리스도인에게 하나님의 징계가 없다면 그는 서자이며 사생아이기 때문에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받지 못할뿐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상속자도 될 수가 없다.

 

반대로 그리스도인이 당하는 고난의 징계는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아들로서 아버지의 사랑과 상속자로서의

특권적 위치를 소유하고 있음을 나타낸다.

 

 

[12:9] 또 우리 육신의 아버지가 우리를 징계하여도 공경하였거든 하물며 모든 영의 아버지께 더욱 복종하며 살려 하지 않겠느냐 - '영의 아버지''육체의 아버지'와 대조되는 개념으로

하늘 세계가 복종하는 초월적인 분 즉 하나님을 가리킨다(Kuss, Lane).

 

하나님은 하늘과 땅을 다스리시는 주로서 그리스도인들을 훈련시키고

헌신을 요구할 수 있는 최고의 권위를 소유하신 분이시다.

 

저자는 최고의 권위를 소유하신 영의 아버지와 육신의 아버지틀 대조함으로

자녀들이 육신의 아버지보다 더 위대한 영의 아버지이신

하나님께서 징계하실 때 당연히 복종해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한편 '살려'의 헬라어 '제소멘'은 생명으로의 초대를 의미하는 것으로

 

(30:11-20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한 이 명령은 네게 어려운 것도 아니요 먼 것도 아니라

12) 하늘에 있는 것이 아니니 네가 이르기를 누가 우리를 위하여 하늘에 올라가 그의 명령을 우리에게로 가지고 와서 우리에게 들려 행하게 하랴 할 것이 아니요

13) 이것이 바다 밖에 있는 것이 아니니 네가 이르기를 누가 우리를 위하여 바다를 건너가서 그의 명령을 우리에게로 가지고 와서 우리에게 들려 행하게 하랴 할 것도 아니라

14) 오직 그 말씀이 네게 매우 가까워서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은즉 네가 이를 행할 수 있느니라

15) 보라 내가 오늘 생명과 복과 사망과 화를 네 앞에 두었나니

16) 곧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 모든 길로 행하며 그의 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 하는 것이라 그리하면 네가 생존하며 번성할 것이요 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가 가서 차지할 땅에서 네게 복을 주실 것임이니라

17) 그러나 네가 만일 마음을 돌이켜 듣지 아니하고 유혹을 받아 다른 신들에게 절하고 그를 섬기면

18) 내가 오늘 너희에게 선언하노니 너희가 반드시 망할 것이라 너희가 요단을 건너가서 차지할 땅에서 너희의 날이 길지 못할 것이니라

19) 내가 오늘 하늘과 땅을 불러 너희에게 증거를 삼노라 내가 생명과 사망과 복과 저주를 네 앞에 두었은즉 너와 네 자손이 살기 위하여 생명을 택하고

20)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의 말씀을 청종하며 또 그를 의지하라 그는 네 생명이시요 네 장수이시니 여호와께서 네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리라고 맹세하신 땅에 네가 거주하리라)

 

종말론적 구원을 즐기는 것과 연결된다.(Peterson).

 

(10:38-39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39) 우리는 뒤로 물러가 멸망할 자가 아니요 오직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니라)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께 징계를 받을지라도 좌절하여 배교하는 것이 아니라

인내하며 담대히 나아가 복종함으로 온전한 구원을 소유하여야만 한다.

 

 

[12:10] 그들은 잠시 자기의 뜻대로 우리를 징계하였거니와 오직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그의 거룩하심에 참여하게 하시느니라

 

본절은 '호이 멘 가르...호 데'('저희는 ...오직 하나님은')라는 단어의 대비를 통해

육신의 아버지와 영의 아버지의 비교를 나타내고 있다.

 

저희는 잠시 자기의 뜻대로 우리를 징계하였거니와 - '자기의 뜻대로'는 육신의 아버지의

징계가 자녀에게 유익을 끼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음을 암시하는 것으로

징계의 불확실성을 시사한다.

 

또한 '징계하였거니와'의 헬라어 '에파이듀온'은 미완료 시상으로

육신의 아버지의 징계가 불완전하여 반복되었음을 시사한다.

 

이처럼 '저희' 곧 육신의 아버지가 행한 징계는 불완전할 뿐만 아니라

자녀에게 유익을 끼치는지 조차도 불확실한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녀들은 육신의 아버지를 공경하였다.

 

(9 또 우리 육신의 아버지가 우리를 징계하여도 공경하였거든 하물며 모든 영의 아버지께 더욱 복종하며 살려 하지 않겠느냐).

 

오직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그의 거룩하심에 참여케 하시느니라 하나님의

징계는 육신의 아버지의 징계와는 전적으로 다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완전하시기 때문이다(Bruce).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인들을 징계하시는 목적을 나타내는 것으로

하나님께서 자신의 자녀들을 영적인 성숙과 거룩함에 이르도록 하심을 시사한다.

 

'거룩하심'에 해당하는 헬라어 '하기오테토스'는 그리스도의 대속을 통해 그리스도인이

공유하고 있는 하나님의 본질적인 성품을 나타내는 것으로(Morris, Procksch)

그리스도의 재림의 날에 완전하여진다(Bruce, Lane).

 

하나님은 그리스도인들에게 훈련의 성격을 띤 고난을 통해서

자신의 속성인 거룩함을 공유할 수 있도록 하신다.

 

한편 그리스도인이 온전한 성화를 이루는 데는 인내를 통해서 믿음을 보존함으로

하나님과 일치를 이루는 미래에 있다(Lane, Michel, Hughes, Peterson).

 

훈련의 성격을 띤 고난은 궁극적으로 하나님께서 주실 생명에 참여하는 것이며

종말론적 구원에 참여하는 것이다.

 

 

[12:11]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단 받은 자들은 의와 평강의 열매를 맺느니라 - 하나님의 징계가 그 당시에는 어려움과

슬픔을 가져다 주지만 궁극적으로 놀라운 의의 평강한 열매를

맺게 하는 것임을 강조한다.

 

'의의 평강한 열매'는 평강과 의로 이루어진 열매를 의미한다(Lane).

 

'평강과 의'는 종말론적 구원의 선물로서(Michel) 미래에 소유하게 될

하나님의 거룩함에 참여하는 흔적이다(Peterson).

 

 

[12:12] 그러므로 피곤한 손과 연약한 무릎을 일으켜 세우고 - 저자는 본문에서

35:3을 인용하여 고난으로 인해 소진(消盡)된 상태에 있는 수신자들에게

강하고 담대해질 것을 권면하고 있다.

 

(35:3 너희는 약한 손을 강하게 하며 떨리는 무릎을 굳게 하며)

 

'피곤한 손''불구가 된 손'(JB)으로 무용(無用)하여 아무것도 성취할 수 없는 것을

나타낸다.

 

따라서 본절의 '피곤한 손과 연약한 무릎'은 철저하게 소진되고

좌절한 사람을 나타내는 표현이다.

 

한편 '세우고''강하게 하다'라는 의미로 고난으로 인해 좌절에 빠져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일어서 담대해질 것을 나타내는 권면이다.

 

 

[12:13] 너희 발을 위하여 곧은 길을 만들어 저는 다리로 하여금 어그러지지 않고 고침을 받게 하라. - 본문은 잠 4:26의 인용이다.

 

(4:26 네 발이 행할 길을 평탄하게 하며 네 모든 길을 든든히 하라)

 

'곧은'에 해당하는 헬라어 '오르다스'는 하나님이 주시는 지혜 가운데

적절한 행동을 취하는 것으로 윤리적인 것을 의미하나 본절에서는

믿음의 시련을 통해서 도달하는 신앙의 궁극적인 목표를 의미한다(Lane).

 

그리스도인들은 시련에 의해서 좌우로 흔들리는 것이 아니라

최종적인 목표를 향해 곧은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

 

한편 '어그러지지'의 헬라어 '에크트라페'에 대한 견해는 두 가지이다.

 

(1) 혹자는 곧은 길로부터 떨어져나가는 것을 의미하여

'배교'를 시사한다고 주장한다. (Hughes, Kasemann).

 

(2) 혹자는'탈구(脫臼)하다'라는 의미로 믿음이 흔들리는 것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 (Morris,Bruce, Hewitt).

 

두 가지 견해 중 후자가 타당하다.

 

만약 전자의 경우처럼 배교를 의미한다면

'배교는 더 이상 속죄할 수 있는 제사가 없다'는 말과

 

(10:26 우리가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 짐짓 죄를 범한즉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고)

 

'고침을 받게 하라'는 명령과 부조화를 이루기 때문이다(Lane).

 

저자는 본절에서 시련과 위험 속에서 좌절하고 소진된 상태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서로 격려하고 위로하여 신앙의 최종적인 목표인

종말론적 구원만을 향하여 매진할 수 있도록 하라고 권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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