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브라함의 신앙 3
히브리서 11장 5-19절 :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겨졌으니 하나님이 그를 옮기심으로 다시 보이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는 옮겨지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
6)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7)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이지 않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경외함으로 방주를 준비하여 그 집을 구원하였으니 이로 말미암아 세상을 정죄하고 믿음을 따르는 의의 상속자가 되었느니라
8)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의 유업으로 받을 땅에 나아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으며
9) 믿음으로 그가 이방의 땅에 있는 것 같이 약속의 땅에 거류하여 동일한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은 이삭 및 야곱과 더불어 장막에 거하였으니
10) 이는 그가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라
11) 믿음으로 사라 자신도 나이가 많아 단산하였으나 잉태할 수 있는 힘을 얻었으니 이는 약속하신 이를 미쁘신 줄 알았음이라
12) 이러므로 죽은 자와 같은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하늘의 허다한 별과 또 해변의 무수한 모래와 같이 많은 후손이 생육하였느니라
13)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임을 증언하였으니
14) 그들이 이같이 말하는 것은 자기들이 본향 찾는 자임을 나타냄이라
15) 그들이 나온 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라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16) 그들이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을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
17)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그는 약속들을 받은 자로되 그 외아들을 드렸느니라
18) 그에게 이미 말씀하시기를 네 자손이라 칭할 자는 이삭으로 말미암으리라 하셨으니
19) 그가 하나님이 능히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개역개정 한글)
그는, 죽은 후에,
그의 이웃은 그를 찾았으나, 그는 이미 있지 않았다.
그들은 그를 찾아낼 수는 없었다.
그의 생애가 너무나 정숙하여 그의 죽음이 너무나 무통이었던 까닭에.
에녹은 이 세상과 교회에 칭양되지 못했다.
만약 사람의 가치가 세상의 비평에 의해 정해지는 것이라면,
에녹은 무위무능, 아무 가치 없는 자였다.
그는 거의 죽음마저 사람에게 알려지지 못한 채 망각의 무덤에 장사 된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의 가치를 인정하셨다.
‘그가 아직 옮겨지기 전에, 하나님께 기뻐하는 자로 증거 되었다’고 있다.
에녹은 무위와도 같은 고독 평정의 생애를 보내고 있는 사이에,
사람은 무능으로서 그를 불렀으나,
그는 마음에 하나님께 기뻐하는 자로서 증거 되었던 것이다.
에녹의 생애는 실로 사람을 떠나서의 생애였다.
사람과 사귐의 필요 없이, 사람에게 칭송됨의 필요 없이,
사람과 접촉하여 그 감화를 받음의 필요 없이 자급자족의 생애였다.
하지만 신앙의 생애는 실로 그러한 생애인 것이다.
하나님과 함께 걷기 때문에(동행하므로)
사람과 보조를 함께 함의 필요 없는 생애이다.
에녹은 태고 시대에 있어서의 모범적 신자였다.
그가 만약 지금 있을 것인가?
그는 사회에서 교회에서 ‘비사교적’이라는 비난을 입어 마지않았으리라.
하지만 그는 단연 그가 택한 길을 취하여 움직이지 않으리라.
그리하여 그는 하나님께 기뻐하시는바 되어, 기꺼이 망각의 무덤으로 내려갔으리라.
귀하다, 에녹, 그립다,
그! 오인은 오늘도 역시 에녹의 후예 많이 있기를 원한다.
그리고 또 이 세상과 교회가 아지 못하는 곳에
하나님의 많은 에녹을 감추어 두신 것을 믿는다.
그리고 ‘모든 믿는 자의 아버지’인 아브라함에게도 또 에녹의 이 신앙이 있었다.
그에게 용행과단, 하나님 위해서는 혈육과 끊는 신앙이 있었을 뿐 아니다.
또 하나님의 약속의 실행을 대망하고,
응답되지 않아도 동하는 일없이,
주어지지 않아도 변함없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보는 듯 오래 견디고 참는 신앙이 있었다.
아브라함에게 전투적인 신앙이 있었음과 함께 평화적인 신앙이 있었다.
즉 노아의 신앙에 더(가)하는데 에녹의 신앙이 있었다.
‘신앙에 의해, 그는 타국에 있듯 약속의 땅에 거하고, 같은 약속을 이어 받은 이삭, 야곱과 함께 장막에 있었다’. (9일역)
아브라함은 나이 75세에 가나안 땅에 왔다. 여호와는 여기서 그에게 나타나,
‘나는, 네 후손에게 이 땅을 줄 것이다’라고 서약(언약)하셨다.
전능자의 이 서약 있어서, 가나안 땅은 이미 아브라함가의 소속이다.
그런데 사실은 어떠했는가 하면.
가나안은 의연히 가나안인의 소속이었다.
아브라함은 약속의 땅에 왔지만, 하나님은 그 약속을 실행치 않으시고,
아브라함과 그 가족은 타국에 있는 듯이 약속의 땅에 기우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 한 사람에 그치지 않는다.
그의 뒤를 이은 이삭과 야곱도 또 하나님의 약속의 실행을 보지 못하고서,
그 오랜 생애를 천막에서 보내고, 부평초(duckweed)같이 유랑적 생활을 계속했다.
하지만 그들은 그것 때문에 여호와와 그 약속을 의심치 않았다.
아브라함은 75세에 약속의 땅에 와서, 175세에 그 땅에서 죽고,
막벨라굴에 장사되었다(창세기 25:7-9).
그리하여 그는 백 년 동안, 약속의 땅에 있으면서 기우자의 생애를 계속했다.
그는 은 400세겔을 치르고, 막벨라에 있는 헤브론 들과 그중에 있는 동굴을 사서,
이것을 자기 소유의 토지로 정했다.
그 외에, 넓은 가나안 중에 그의 소유라 일컬을 토지는 한 치도 없었다.
100년의 생애를 약속의 땅에서 보내고
그가 얻은 것은 일개의 묘지에 지나지 않았다(창세기 23장).
하지만 아브라함은 여호와 그 약속을 의심치 않았다.
그는
‘약속의 것을 받지 못했으나, 멀리 이것을 바라며 기뻐하고, 땅에 있어서는 나그네요 기류자였다’(13일역)고 하여,
조금도 하나님께 다가서는데 그 약속의 실행으로서 하지 않았다.
그는 100년 동안, 대망 인내의 생애를 계속했다.
그리고 약속의 것을 받지 못하고 죽었다.
신앙으로서 시작한 그의 생애는 끝까지 신앙의 계속이었다.
그는 다만 믿었던 것이다. 다만 바랐던 것이다.
그리고 다만 믿고 다만 바라고서, 약속의 것을 얻지 못하고서 죽은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설계하여 지으실 기초의 도성을 바랐기 때문이다’(10일역)
아브라함은 100년간, 약속의 땅에 있으면서,
일정한 주소를 얻지 못하고, 변전 그지없는 천막적 생애를 계속했다.
그러나 그의 인내는 무익했다.
하나님은 보상 없이 그 아들을 시험치 않으신다.
아브라함과 그 자손은, 지상에 하나님의 약속의 실행을 보지 못하고서,
눈을 천상으로 옮기기에 이르렀다.
지상에 천막적 생애를 계속한 그들은,
천상에 터(기초)있는 도성을 바라기에 이르렀다.
사람의 친 천막이 아니다. 하나님이 경영하시고 건조하신 도성이다.
볼드(bolt 전)로서 여러 곳에 못질하여 치는 천막 아니다.
견고한 기초 위에 축성한 도성이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지상의 약속을 실행하지 않으시고,
천상에 더 나은 것을 약속하시었다. 신앙의 보상은 희망이다.
‘인내는 연달을 낳고, 연달은 희망을 낳고, 희망은 부끄러움을 가져오지 않는다’(로마서 5;4-5일역)고 바울은 말했다.
아브라함은 백년의 장기에 걸친 하나님의 시련에 견디어 희망이 주어졌다.
땅의 것에 관한 그의 실망은 하늘의 것에 관한 희망을 낳았다.
하나님께서 그 약속의 생활을 지체하신 깊은 이유가 있었다.
그는 이에 의해, 아브라함의 마음에 하늘의 희망을 일으키려 한 것이다.
그리고 그 아브라함은 잘 하나님의 이 목적에 맞게,
인내 그 효능을 올려 희망을 낳기에 이르렀다.
그는 천상에 하나님이 설계하여 지으신 기초 있는 도성을 바라기에 이르러,
지상에 약속의 땅을 구하지 않기에 이르렀다.
가나안 무엇인가?
벧엘 무엇인가?
없어지지 않을 썩지 않을 도성이, 천상에 자기 위해 마련되어 있음을 알 때,
자신은 가나안의 소유자인 헷 사람, 여부스 사람들을 조금도 부러워 않기에 이른다.
아브라함과 그 자손은, 하나님께서 설계하여 지으신
기초 있는 하늘의 도성을 바라기 까닭에,
약속의 땅에 있으면서 천막에 살았대도,
조금도 불행이라 생각지 않았던 것이다.
‘신앙에 의해, 사라까지도, 씨(종)를 깃들게 할 능력(임신할 능력)을 얻어 나이 갔지만 아들을 낳았다. 이는 약속하신 자는 성심(진의)하신 분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이러므로, 죽은 자 같은 한 사람에게서, 하늘의 별같이 많게 바닷가의 모래를 셀 수 없듯 많이 태어나 왔다’(11-12일역)
‘사라까지도’ 신앙 약한 사라 마저도.
너는 아들을 낳을 것이라는 천사의 선고를 입을 때,
천막의 입구에서 웃었던 사라까지도(창세기 18:12).
여기에 ‘신앙에 의해서’라고 있음은 아브라함의 신앙에 의해서의 것이리라.
남편의 신앙, 아내에게 미쳤다는 것이리라.
신앙은 천상의 희망을 제공하고 지상의 행복을 가져온다.
신앙은 영안의 시력을 늘리고 육체의 능력을 증진시킨다.
달려가도 피곤치 않고 늙어도 쇠하지 않는 능력은,
신앙의 결과로서 신앙에 더해진다.
‘이들은 모두 신앙을 가지고서 죽었다. 아직 약속의 것을 받지 못했으나, 멀리 이것을 바라며 기뻐하고, 땅에 있어서는 스스로 나그네요 기류지라고 표백했다’(13일역)
‘이들은’
이스라엘의 열조(선조), 즉 아브라함, 이삭, 야곱들은.
‘신앙을 가지고 죽었다’ 신앙 중에 죽었다고 역할 것이다.
신앙의 실현을 보지 못하고서 죽었다.
약속의 것을 받지 못하고서 죽었다.
약속의 것을 받지 못하고서 죽었다는 것과 같다.
‘멀리 이것을 바라보고 기뻐하며’
신앙의 목적물에 도달치 못하고서, 원방에서 이것을 바라보며,
이미 이것을 얻은 것 같이 느끼며 기뻐했다는 것이다.
목적물에도 물론 둘 있었다.
일은 천상의 도성이다.
이는 지상의 가나안이다.
그들은 이자 어느 것도 획득치 못하고서 죽었다.
하지만 멀리 이것을 바라보며, 이미 얻은 것으로 믿고 죽었다.
신앙은 실로 희망의 기초이다.
신앙에 의해 희망은 현실로 화하고,
아직 얻지 못한 것도 이미 얻은 것으로서 느껴지는 것이다.
‘땅에 있어서는 나그네요…’ 신자는 글자 그대로 믿는 자이다.
아직 보지 못한 것을 보고,
아직 얻지 못한 것을 얻었다고 믿는 자이다.
그러므로 신자는 세인의 입장에서 보아 미상가이다. 신비가(mystic)이다.
하늘을 잡는 자이다.
하지만 신자로서 만약 믿지 못하면 그는 신자가 아니다.
이 세상의 세력을 잡았다고 해서 기뻐하는 교회는
신자라 일컫기에 족하지 못하다.
이미 얻은 것을 얻었다고 믿을 필요는 없다.
‘이미 보이는 것을, 어찌 또 이것을 바라랴’(로마서 8:24일역)이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 등의 고로는 약속의 것을 받지 못하고서 신앙 중에 죽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약속의 땅에 살았지만도, 나그네요 기류자였다.
단에서 브엘세바까지, 길르앗 언덕에서 지중해변까지,
토지는 그들에게 약속되어 있다해도 그들의 소유에 속한 토지란,
아브라함이 헷사람 에브론에서 산막벨라의 묘지를 제외하고 달리 한치도 없었다.
그들은 언제나 믿으면서 언제나 바라면서, 생애를 끝마쳤다.
실로 만약 신앙이 실물 만이라면 세상에 신자처럼 가련한 자는 없다.
‘이렇게 말함은, 가향(고향)을 찾고 있음을 나타내고 있음이다’(14일역)
‘땅에 있어서는 초지도 갖지 못하고, 하늘을 바라면서 아직 이것을 얻지 못하고,
종생 표류의 생애를 계속하는 홈-(가향)을 바라 마지않는다.
홈, 홈(home), 그리운 홈이라고 그는 언제나 노래하는 것이다.
나그네는 목적 없이 여행하는 것은 아니다.
기류자는 정해진 주소를 찾아 마지않는다.
아브라함과 그 자손은, 어느 곳에 달하려 하여 지상에 표류한 것이다.
그들은 홈(고향)을 찾은 것이다. 그리고 이것을 발견한 것이다.
그리고 이에 달한 것은 아니다.
멀리 이것을 바라며 기뻐한 것이다.
왕 그리스도의 우아한 보좌
천사가 노래하는, 우아한 노래
표류 끝나고, 우아한 휴식
평화 가득 찬, 우아한 집
내 눈은 거기서 예수를 보리라
나는 구주의 집으로 서둘러 가리라
시온아, 우아한 시온아 하나님의 성인,
우아한 시온아 (저자역시집 ‘애음’에서)
나는 나그네라고 하는 것은, 나는 이 땅의 사람이 아니라는 말이다.
나는 기류자라고 하는 것은, 내 집은 달리 있다는 것이다.
약속의 땅에 있으면서 나그네요 기류자라고 하여,
그들은 하늘의 가향(고향)을 구하고 있었음을 표명한 것이다.
‘그들이, 만일 그 떠나온 땅을 생각했더라면, 돌아갈 기회 있었으리라.
하지만 그들은, 보다 더 좋은 곳, 즉 하늘에 있는 곳을 사모했다.
이러므로, 하나님은 그 하나님이라고 불리 우는 것을 부끄러워하시지 않으셨다.
그것은 그들 위해 도성을 준비하셨기 때문이다’(15-16일역)
그들은 홈(home 고향)을 찾았다.
하지만, 그 나온 땅인 우상숭배의 갈대아 우르를 사모한 것은 아니다.
만약 그들로서 지상의 고향에 돌아가고자 했더라면,
돌아갈 기회는 자주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신앙에 의해 사는 의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을
뒤로 물러갈 자는 아니다(10:38).
그들은 고향을 찾았다. 그러나 이것을 하늘에 구하여 땅에 구하지 않았다.
하늘의 홈은 이 세상의 고향에 비하여 보다 나은 곳이다.
물론 이에 달하는 것은 육의 고향으로 돌아가듯 용이한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일단 뜻을 결하여 떠난 갈대아, 혈육의 관계, 정실의 고향,
우리들은 죽더라도 이에 돌아갈 것은 아니다.
우리들은 많은 간난을 거쳐 우리들의 하나님의 나라에 이르러야 할 것이다.
그러한 결심을 가졌기 때문에,
지상의 고향에 돌아가려 않고서 하늘에 있는 곳을 사모한 까닭에,
하나님은 그들의 하나님이라 불리 우는 것을
부끄러움으로 여기지 않으셨다는 것이다.
사람, 사람답다면, 하나님, 하나님이 아니시랴이다.
사람이, 하나님을 사모하면, 하나님은 또 사람을 중히 여기신다.
하나님은 스스로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 칭하여
수치로 여기지 않으셨다.
하나님이 사람에 있어서 가장 기뻐하시는 것은 신앙이다.
하나님은 사람의 신앙에 대하여 그 사랑을 나타내신다.
실로 신앙 없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는 없는 것이다.
아브라함, 하나님을 믿으매,
하나님은 스스로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시라 일컫고,
그와 영욕을 함께 하셨다.
놀랍도다, 그의 사랑과 그 겸손!
‘그것은 그들 위해 도성을 예비하셨기 때문이다’
아브라함, 하나님을 믿으매, 하나님은 그의 신앙에 보상하는데
그(하나님)의 사랑으로서 하셨다.
그는 후에 모세에게 나타나 말씀하셨다.
‘나는 네 아버지의 하나님,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시다’(출애굽기 3:6일역)라고.
그렇게 불리심을 허락하신 것은,
그가 그들과 특별한 관계에 들어가심을 나타낸 것이다.
아브라함의 하나님이라고 하심은,
아브라함의 보호자, 그 애육자라고 함과 같다.
일언으로써 이것을 말한다면, 아브라함의 아버지라고 함과 같은 것이다.
아브라함은 신앙에 의해 여호와에 대하여 아들의 태도로서 나간 때,
여호와는 그에 대하여 아버지로서의 태도로 나오셨다는 것이다.
‘나는, 그를 위해 아버지로 될 것이다. 그는 나 위해 아들로 될 것이다’(히브리서 1:5일역)고
있음은 이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스스로 사람의 하나님이라 칭하여,
아버지 된 사실적 증명을 주어 마지않으신다.
다만 이름에 있어서 아버지로 된 것 아니다.
실지에 있어서 아버지로 되신 것이다.
‘그것은 그들 위해 도성을 예비하셨기 때문이다’라고 한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스스로 일컫고,
수치로 여기시지 않는 그 사실적 증명은 여기에 있었던 것이다.
그들 위해 도성을 예비하여,
그가 그들의 하나님 즉 아버지 되신 것을 증명하시었다.
그는 가나안 땅을 약속하여,
그들의 재세(在世) 중에 이것을 충족시켜 주시지 않았다 해도,
보다 더 나은, 하늘에 있는 도성을 그들 위해 예비하여,
그들에게 약속 이상의 것을 주신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아버지 되신 사실을 밝히신 것이다.
그들의 신앙에 보상하는데 이 은사로서 하여,
그는 그들의 아버지라 칭하여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으신 것이다.
실로 하나님도 또한 수치를 아신다.
그는 사람의 신앙에 보상하는데 상당한 은사로서 하지 않으시면 부끄럽게 여기시는 것이다.
얼마나한 사랑이랴!
얼마나한 성실이랴!
얼마나한 겸손이랴!.
‘도성’ 옮기기 쉬운 천막은 아니다. 기초 위에 선 도성이다.
황야의 고독을 지키는 것은 아니다.
도성에서 많은 성도와 함께 그를 찬미하는 것이다.
도성은 하나님의 나라이다. 하늘의 예루살렘이다.
완전한 사회이다. 하나님을 어른으로 모시고서 성도가 조직하는 대(大) 가정이다.
도성은 촌락에 도회(도시)는 아니다. Polis이다.
조직이 선 사회이다.
이것을 ‘도성’이라 역하여, 그 의미를 그르치기 쉽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이것을 계시록 제21장 이하에서 볼 것이다.
말할 것도 없이 신앙의 생애는 감추인 생애이다.
신문기자와 역사가와의 눈에는 띄지 않는 생애이다.
외면으로는 무사평온의 생애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주의를 끌고, 그에게 기뻐하심을 입는 생애이다.
외면이 무사 평온한데 대하여 내부는 다사 동요의 생애이다.
하나님을 믿고, 그의 묵시에 접하며, 그의 약속에 참여하고,
그러면서 그 약속이 곧 실행되지 않는데서,
어떤 때는 그를 의심하고, 때로 혹은 전혀 그와 이절하려 한다.
여기서 인내의 필요가 생기고, 믿기 어려움을 믿고,
바라기 어려운 것을 바란다.
때로는 응답되지 않는 기도에 신앙의 근저가 꺾이고,
때로는 회의의 구름으로 회당의 하늘이 뒤덮인다.
혼자 울고, 혼자 외치며, 혼자 기도한다.
세상은 오인의 내심에 대전쟁이 행해지고 있음을 모르고,
오인의 우수를 의아해 하고, 오인의 번민을 수상히 여긴다.
그리하여 오인은 수년 또는 십수 년, 또는 수십 년을 경과치 않을 수 없다.
세상은 진보하고 있는데 자기 혼자만 원래의 곳에 머물러 있는 것 같이 느낀다.
세인은 많은 것을 얻었는데 나는 아무것도 얻지 못한 듯이 느껴진다.
오인은 어떤 때는 하나님을 한하고, 그에게 사로잡힌 내 몸의 불행을 탄식한다.
하지만 보라,
때가 이르면 하늘 열려,
내 고향을 보기에 이른다.
하나님은 내 아버지가 되시고, 나는 그의 아들로 일컬어진다.
인생의 최대 행복은 내 신앙의 보상으로서 내게 주어진다.
영년에 걸친 무위인 듯하던 내 생애가
결코 무위 아님을 알게 된다.
세상은 밖으로 확장하고 있는 동안에 나는 안으로 파고들었던 것이다.
나는 마침내 생명수에 파 맞추었다.
흘러 영생에 이르는 샘은 내 안에서 분출하기에 이른 것이다.
에녹의 생애, 아브라함의 생애의 대부분은 이 종류의 생애였다.
깊고, 고요한 사교적으로 무위무능한 대신적으로 다사 유효한,
밖으로 지체하여 안으로 향상하는, 그리스도 신자의 생애였다.
이 세상과 이 세상의 교회가 그러한 생애를 중치 여기지 않음은,
그들이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 어떠한 하나님인지를 모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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