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교의 인세관(人世觀)
히브리서 제11장 36-40절 :
‘또 어떤 사람은 조롱을 받고, 채찍으로 맞고, 유설(결박)과 뇌옥(감옥)의 고난을 받고,
37) 돌에 맞고, 톱으로 켜이고, 불로 태운바 되고, 칼로 살해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서 방황하고, 궁핍해져 고민하고 고난당했다.
38) 세상은 그들을 두기에 견디지 못했다. 그들은 황야와 산과 땅의 동굴로 헤매어 다녔다.
39) 그들은 모두 신앙으로 미명을 얻었지만, 약속의 곳을 얻지 못했다. 그것은 그들도 우리와 함께 하지 않고서는 완성될 수 없기 때문이다. 보다 나은 것을,
40) 하나님께서 미리 우리 위해 예비하시었다’(일역)
또 다른 이들은 심한 조롱과 채찍질뿐 아니라 참으로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련도 겪었으며
37) 돌로 맞기도 하고 톱으로 잘리기도 하며 시험을 받기도 하고 칼로 죽임을 당하기도 하며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떠돌아다니며 궁핍과 고난과 고통을 당하였으니
38) (세상은 이런 사람들에게 합당치 아니하였느니라.) 그들이 사막과 산과 동굴과 땅굴에서 떠돌아다녔느니라.
39)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통해 좋은 평판을 얻었으되 약속하신 것을 받지는 못하였으니
40)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더 좋은 것을 마련하사 우리가 없이는 그들이 완전하게 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니라(KJV한글)
약 주
현세로써 행복을 얻는 곳이라고 보는 것은 잘못된 인생관이다.
현세는 행복을 얻는 곳이 아니라 시련을 받는 곳이다.
오늘날 사람 누구나 ‘행복’을 말한다.
왈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
왈 ‘행복한 가정’이라고.
그리고 이것을 말하는 자는 세속적 정사가에 한하지 않는다.
선교사 그렇다.
목사 그렇다.
그들은 모두 인세(人世)의 최대 목적은
행복을 얻는데 있는 것같이 말한다.
하지만 그리스도교의 인세관은 전혀 이것과 다르다.
그리스도교는 행복을 내세에 두고,
이것을 현세에 구하지 않는다.
그리스도 신도는 면류관을 바라는 자이지만,
이것을 하나님의 왕국에 있어서 쓰기를 바란다.
그에게 있어서는 현세는 시련의 장소일 뿐.
의(義) 위해 참으며 또 싸우는 곳일 뿐.
그에게 이 세상에 있어서 베개 할 곳 없음은 당연하다.
그가 세상에 증오되고,
조롱되며,
때로는 돌에 맞고,
톱으로 켜이며,
불로 불태운바 되는 것은
결코 괴이히 여길 바 못된다.
그리스도교를 믿는다고 하면서
이 세상에 행복을 추구하는 자는,
아직 그리스도교가 무엇인지를 모르는 자이다.
*내촌감삼의 (1901년 8월 ‘성서지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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