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8월 10일 목요일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믿음의 경주

 

성 경: [12:1-3]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

2)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3) 너희가 피곤하여 낙심하지 않기 위하여 죄인들이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이를 생각하라.

 

 

[12:1]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 '증인''관람자'를 의미한다.

 

왜냐하면 본절이 결승점을 향하여 달려가는 운동 경기를 묘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본절의 '증인'은 단순히 수동적인 관람자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증인으로서 진리를 증거하고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자이다(Michel, Peterson).

 

'마르튀론(증인)'은 앞장에서 언급된 신앙의 선배들을 가리키는 것으로(11)

그들은 하나님을 의지하는 가운데 고난 속에서도 인내하며 충성을 다한 자들이었다.

 

저자는 이러한 증인들을 먼저 언급함으로 수신자들에게 증인들과 마찬가지로

고난 속에서 좌절하지 말고 인내하며 최선을 다하여 경주할 것을 권면하고 있다.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 - 경주자는 두 가지를 벗어버려야 한다.

 

(1) 무거운 것 - 이에 해당하는 혤라어 '옹콘'은 운동 선수가 운동을 하는데

방해가 되는 체중을 나타내는 것으로 최선을 다하는데

장애물이 되는 것을 가리킨다(Morris, Bruce).

 

그리스도인들에게 이런 장애물은

()를 사랑하는 것, 세상적인 관심사나 자만에 빠져있는 것,

혹은 세상에 애착하는 것 등을 의미할 수 있다(Spicq, Mora).

 

(2) 얽매어기 쉬운 죄 - ''의 헬라어 '텐 하마티안'에 대해 혹자는 배교를 의미한다고

주장한다(Kasemann).

 

그러나 배교는 본절의 내용인 그리스도인들이 경주하는 것과 무관하므로 타당하지 않다.

본절의 '텐 하마르티안'은 단수로 어떤 특정한 죄를 지칭하기보다는

'죄 자체'를 의미하는 것으로(Montefiore, Michel, Peterson, Bruce, Hewitt)

여기서는 경주를 하는 과정에서 경험하게 되는 연약성을 가리킨다(Spicq, Mora).

 

그리스도인들은 믿음의 경주를 하는 과정에서 불필요하며

장애물이 될만한 모든 것을 버려야만하며 동시에 인내로서 경주해야 한다.

 

저자는 인내하는 가운데 경주를 한 앞선 증인이 많음을 진술함으로

수신자들을 비롯한 현재의 그리스도인들이 수많은 어려움에 처한다 할지라도

인내하며 경주해야 함을 권면한다.

 

왜냐하면 앞선 허다한 증인들이 결승점에 도달한 것처럼

그리스도인들도 바라는 결승점에 도달할 수 있기 때문이다(Bruce).

 

 

[12:2]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 본문은 그리스도인들의

경주의 목표인 예수에 대한 진술이다.

 

'믿음의'''만을 수식하는 것이 아니라

'''온전케 하시는 이' 둘 다를 수식한다(Bruce, Lane).

 

'믿음'11장에 나타난 허다한 증인들이 삶속에서 지녔던 하나님에 대한

철저한 신뢰를 나타내며 예수의 지상생활에서도

그 예를 찾을 수가 있다(Moffatt, Westcott, Bruce, Hughes).

 

한편 저자는 본문에서 예수에 대해 두 가지 칭호를 사용한다.

 

(1) (아르케곤) - '아르케곤''아르코'('시작하다', '지배하다')에서 유래한 것으로

능동태일 경우 '지배하다'라는 의미로 그리스도의 주되심을 나타내며

중간태일 경우 '시작하다'라는 의미를 취해 선구자 되심을 나타낸다.

두 가지 중 후자가 더 타당한 듯하다(Bruce, Lane, Morris).

 

그리스도께서는 수신자뿐 아니라 앞 절에서 언급된 앞선

'허다한 증인들'보다 더 앞서 믿음의 길을 걸어가셨다.

 

왜냐하면 그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이끌어 내셨으며 광야에서도

하나님의 백성들과 동행하셨기 때문이다. (1:5, Bruce).

 

(2) 온전케 하시는 이(텔레이오텐) - '텔레이오텐''텔레이오오'('완수하다')에서

유래한 단어로 '완성자' 혹은 '완전자'라는 의미이다.

 

이것은 예수께서 지상 생활 가운데 그 믿음을

온전히 실행한 자임을 드러낸다. (Moffatt, Westcott, Bruce).

 

저자는 '아르케곤'을 통해서 그리스도께서 믿음을 우선적으로 행한 자이며 동시에

믿음을 행함에 있어서 다른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탁월한 자임을 시사하며

'텔레이오텐'을 통해서 구원자로서의 그리스도께서

믿음을 완전히 성취하셨음을 드러내고 있다. (Peterson, Westcott).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기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 '위하여'에 해당하는 헬라어 '안티'는 두 가지 의미로 사용된다.

 

(1) '대신에'. 이 경우에 본문은 그리스도는 성육신하시기 이전에 누리셨던

하늘의 지위와 복을 버리시고 죄인들만이 당하는 형벌인

십자가의 길을 걸으셨음을 시사한다.

 

(2) '위하여'. 이 경우에 본문은 앞으로 다가올 즐거움 즉 십자가를 통해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누릴 구원과 하나님 우편에 앉으심을 위해

당시 수치스러운 것으로 이해되었던 십자가의 길을 선택하여

걸어가셨음을 시사한다.

문맥상 후자의 해석이 더 타당하다.

 

한편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는 즉위식을 나타내는 시 110:1의 인용이다.

 

(110:1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들로 네 발판이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오른쪽에 앉아 있으라 하셨도다)

 

(2:5-9 하나님이 우리가 말하는 바 장차 올 세상을 천사들에게 복종하게 하심이 아니니라

6) 그러나 누구인가가 어디에서 증언하여 이르되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

7) 그를 잠시 동안 천사보다 못하게 하시며 영광과 존귀로 관을 씌우시며

8) 만물을 그 발 아래에 복종하게 하셨느니라 하였으니 만물로 그에게 복종하게 하셨은즉 복종하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어야 하겠으나 지금 우리가 만물이 아직 그에게 복종하고 있는 것을 보지 못하고

9) 오직 우리가 천사들보다 잠시 동안 못하게 하심을 입은 자 곧 죽음의 고난 받으심으로 말미암아 영광과 존귀로 관을 쓰신 예수를 보니 이를 행하심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려 하심이라;

 

8:1-2 지금 우리가 하는 말의 요점은 이러한 대제사장이 우리에게 있다는 것이라 그는 하늘에서 지극히 크신 이의 보좌 우편에 앉으셨으니

2) 성소와 참 장막에서 섬기는 이시라 이 장막은 주께서 세우신 것이요 사람이 세운 것이 아니니라;

 

10:12-13 오직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사

13) 그 후에 자기 원수들을 자기 발등상이 되게 하실 때까지 기다리시나니).

 

'앉으셨느니라'는 그리스도께서 영원히 하나님 우편에 앉아계심을 시사하는 것으로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와 그 수치를 참으시고 이루신 승리가

영원하며 완전함을 나타낸다. (Bruce).

 

 

[12:3] 너희가 피곤하여 낙심하지 않기 위하여 죄인들이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이를 생각하라. -

 

저자는 본절에서 그리스도께서 당하신 고난을 제시함으로

고난 당하는 수신자 공동체를 위로하고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을 거역하고 대항하며 직접 십자가에 못 박았던

대적자들에게 직접적으로 대응하시지 아니하시고 참으셨다.

 

이러한 그리스도의 인내는 고난을 당하고 있는

수신자 공동체에게 위로와 격려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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