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10월 10일 일요일

누구든지 너희를 영접하지 아니하거든 그 성에서 떠날 때에 너희 발에서 먼지를 떨어 버려 증거를 그들에게 삼으라

  

갈릴리 전도의 종국

 

누가복음 91-17: 예수께서 열두 제자를 불러 모으사 모든 귀신을 제어하며 병을 고치는 능력과 권위를 주시고

2)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며 앓는 자를 고치게 하려고 내보내시며

3) 이르시되 여행을 위하여 아무 것도 가지지 말라 지팡이나 배낭이나 양식이나 돈이나 두 벌 옷을 가지지 말며

4) 어느 집에 들어가든지 거기서 머물다가 거기서 떠나라

5) 누구든지 너희를 영접하지 아니하거든 그 성에서 떠날 때에 너희 발에서 먼지를 떨어 버려 그들에게 증거를 삼으라 하시니

6) 제자들이 나가 각 마을에 두루 다니며 곳곳에 복음을 전하며 병을 고치더라

7) 분봉 왕 헤롯이 이 모든 일을 듣고 심히 당황하니 이는 어떤 사람은 요한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다고도 하며

8) 어떤 사람은 엘리야가 나타났다고도 하며 어떤 사람은 옛 선지자 한 사람이 다시 살아났다고도 함이라

9) 헤롯이 이르되 요한은 내가 목을 베었거늘 이제 이런 일이 들리니 이 사람이 누군가 하며 그를 보고자 하더라

10) 사도들이 돌아와 자기들이 행한 모든 것을 예수께 여쭈니 데리시고 따로 벳새다라는 고을로 떠나 가셨으나

11) 무리가 알고 따라왔거늘 예수께서 그들을 영접하사 하나님 나라의 일을 이야기하시며 병 고칠 자들은 고치시더라

12) 날이 저물어 가매 열두 사도가 나아와 여짜오되 무리를 보내어 두루 마을과 촌으로 가서 유하며 먹을 것을 얻게 하소서 우리가 있는 여기는 빈 들이니이다

13)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하시니 여짜오되 우리에게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밖에 없으니 이 모든 사람을 위하여 먹을 것을 사지 아니하고서는 할 수 없사옵나이다 하니

14) 이는 남자가 한 오천 명 됨이러라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떼를 지어 한 오십 명씩 앉히라 하시니

15) 제자들이 이렇게 하여 다 앉힌 후

16) 예수께서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사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어 무리에게 나누어 주게 하시니

17) 먹고 다 배불렀더라 그 남은 조각을 열두 바구니에 거두니라.

 

성서에 있어서의 장, 절의 구분은, 본래부터 편의상,

후인이 붙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각 장마다 특이한 대 안목(대 요점)을 가지며,

정연하여 순서를 이루고 있다.

그러므로 장, 절의 구분을 전연 무시하고서 성서를 해득할 수는 없는 것이다.

누가복음 제9장의 안목(요점), 갈릴리 전도의 종국에 있다.

갈릴리에 있어서의 예수의 복음선전(전파)은 이제 그 종국에 달하고,

그는 이 고장에 작별을 고하고서 예루살렘으로 향하여 가지 않을 수 없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원인은 무엇이었던가?

그 주원인은 실로 5천명의 향응(entertainment)에 있었다.

그가 대 기적을 행하여 시장해 있는 5천명을 배불리게 하자,

상인 아닌 예수인 것이 아주 명료해졌다.

 

군집은 이 기적을 보고 놀라,

예수야말로 그들의 구제 자 될 위인임을 알았다.

그러므로 그들은 곧 그를 붙들고, 그리하여 왕으로 추대하려고 했던 것이다.

 

(요한복음 6:15 그러므로 예수께서 그들이 와서 자기를 억지로 붙들어 임금으로 삼으려는 줄 아시고 다시 혼자 산으로 떠나 가시니라).

 

그런데 그렇게 하여 민중이 그 왕을 옹립하는 것은 정치상의 반역죄이다.

그래 예수는 이때부터 로마 정청의 주의 인물로 되었던 것이다.

예측대로, 헤롯은 그를 두려워하는 나머지, 다시 저 요한처럼 그도 처분하려고 했다.

여기서, 예수의 갈릴리 전도는 그 종국을 고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가 행한 무수한 선행 및 5천명 향응의 대 기적이,

도리어 갈릴리 전도 실패의 원인으로 되었던 것이다.

 

갈릴리를 떠나서부터, 예수는 예루살렘에 올라가,

그 최후의 사업을 수행하셨다.

 

10장이 하는 즉 그 기사이다.

알지라, 누가복음 24장 중 갈릴리 전도에 관한 것 불과 9장에 지나지 않고,

기타는 모두 십자가를 중심으로 하는 예루살렘 전도의 서술임을.

 

복음서의 대부분은 실로 십자가에 관한 기사이다.

그리고 예수의 십자가가 그의 생애 중 가장 귀중한 것으로서,

그의 교훈의 중심임은, 바울의 서간에 있어서 더욱 명료하다.

 

만약 십자가 없을 것인가,

예수의 강세의 이유는 소멸하는 것이다.

 

복음서 기자가 모두 그 저서의 주요부분을 내어 예수의 십자가를

고고한 것은 실로 까닭 있는 일이라 해야 할 것이다.

 

5천명 향응에 앞서서 12사도의 파견이 있었다.

처음에 제자의 선택이 있고(5:1-11),

이어서 사도의 선정 있다.

 

(6:13이하 밝으매 그 제자들을 부르사 그 중에서 열둘을 택하여 사도라 칭하셨으니).

 

그리고 이제 사도의 취직이 행해진 것이다.

그 목적은 말할 것도 없이 하나님 나라의 선전(전파)과 영혼의 구원에 있었다.

 

저 악귀(귀신)를 쫓아내고,

병자를 고친 일 같은 것은 그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

 

92절은 즉 사도파견의 목적을 분명히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두(시작)'''그리고'로 읽어야 할 것이고,

'병자를 고치시려고'라 있지만 다수의 원본에는 '병자'라는 문자가 없고,

또 그 '고친다'는 것은,

1절에 있어서의 '병을 고친다'는 것과는 별개의 문자를 쓰고 있는 것이다.

 

12사도의 파견에 있어서, 예수께서 그들을 경계하신 바는 아주 간단했다.

 

'여행하는데 아무 것도 가지고 가지 말라. 지팡이나 여대, 먹을 것, , 두벌 옷도 가지지 말라'(3일역).

 

이 말은 자칫하면 잘못된 열심히 오해되기 쉬울 위험이 있다.

전도를 하고자 하여 일부러 각종의 준비를 고려하는 자 많은데 대하여,

이 말을 해석하여 아무 준비도 하지 말라는 뜻으로 취하는 자가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때 12사도들의 전도구역은 오늘처럼 원격(remote)한 땅에 걸치는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대략 가버나움을 중심으로, 나사렛, 나인, 벳세다 등의 제 촌을 순회하고,

12주일로서 끝난 것이리라.

 

(10 사도들이 돌아와 자기들이 행한 모든 것을 예수께 여쭈니 데리시고 따로 벳새다라는 고을로 떠나 가셨으나).

 

그러므로 실재로 특수한 여장을 갖추어 주도한 준비를 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이는 그 경우가 그렇게 한 것으로서,

이것을 오늘의 세계전도 등에 그대로 적용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은 실로 전도의 정신을 명시하는 것이다.

 

예수께서 이들 말로서 모든 전도자의 마음가짐을 개괄적(총괄적)으로 가르치신 것임은,

마태복음 10장에 의해 명백하다.

12사도의 파견은 짧은 여로였다 해도, 정신에 있어서 모범적 전도였다.

후세의 전도는 모두 이 본보기(example)에 따라 정해져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의 말은 이것을 문자대로 알기보다도 그 정신을 볼 것이다.

 

'하나의 지팡이 외에는, 여행의 준비로 아무 것도 가지지 말라'(마가복음 6:8) 고해서,

 

휴대해야 할 지팡이 수를 운운하는 것은 아니다.

새로이 지팡이 구할 것 없고, 다만 가진 것을 가지고서 가라는 뜻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전도를 명하실 것인가?

즉 특별한 준비를 할 것 없고, 지금 그대로 가도록 할 것이다.

 

문제는 준비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에 있다.

 

만약에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면 곧 일어나 응해야 할 뿐.

그 때 수단 방법을 생각할 필요 없고,

여대, 양식, 금은을 가져야함을 필요로 하지 않으며,

다만 가지고 있는 지팡이로서 족한 것이다.

 

그리고 전도 성공의 비결은 여기에 있는 것이다.

고래로 위대한 전도자는 모두 그렇게 하여 일어났던 것이다.

 

그런데도 그 주위를 살피고, 경우(환경처지)를 생각(사려)하여,

필요한 준비를 갖추고, 그러한 후 서서히 나서려 할 것인가,

전도의 시기는 결국 도래치 않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전도의 명령을 받은 자에게 골육의 반대가 있다.

처자의 계루(매이는 일 encumbrances)가 있다.

실직의 고통이 있다.

기타 이것을 방해할 사정은 무수하다.

이때에 있어서 좌고우면(左顧右眄)(미 결단 irresolution)

누가 내 소요를 공급할 것이며,

어떻게 하여 친족과의 조화를 도모할 것인지,

그 방법수단을 계획하고, 그 이해득실을 타산하는 때면,

곧 이것을 포기하는 외에 없는 것이다.

 

'경우(환경처지)는 하나님의 음성이라'는 것은,

미국이 부르짖는 말이다.

 

그리고 사람은 경우(환경)의 소리에 듣고자 하여

참된 하나님의 음성을 거슬리지 않을 수 없다.

미국인의 사업의 일대결함은 언제나 이 점에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것은 다만 전도의 일뿐 아니다.

크리스천이 그 이상을 세상에 펴려 하는 때,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려 하는 때에 있어서는 언제나 마찬가지이다.

 

특별한 준비를 할 것 없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때 곧 가도록 할 것이다.

 

인생에는 반드시 어떤 위기가 있다.

그 때에 처신함에 태도 여하에 따라,

혹은 생애의 의의를 채우고,

혹은 이것을 잃어버리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명령을 받은 때는 실로 이런 종류의 위기이다.

신자는 12사도의 전도의 정신으로서,

모두 그런 경우에 대한 자기의 정신으로 해야 할 것이다.

 

예수는 또 12사도를 가르쳐 말씀하셨다.

 

'어느 집에 들어가든지, 거기서 머물다가 도 거기서 떠나라'(4일역).

 

즉 촌(마음)에 들어가면, 중심 되는 사람의 집으로 가서,

그 공급하는 바를 받고, 이것을 본 거로 할 것이다.

집집으로 옮겨 다니지 말라고.

이는 예수의 실제적 지혜이다.

 

어떠한 촌서도 복음을 받는 사람 없지 않다.

그리고 전도자는 그의 성실한 공급에 의존할 것이다.

참된 전도 방법은 이 한 길 뿐.

이것을 오늘의 교호의 전도방법과 비교하여,

그것이 아주 간단하고 또 자연스러움을 알아야 할 것이다.

그렇게 하여 12사도는 파견되었다. 그들은

 

'나가서 여러 마을을 두루 다니며 복음을 선전(전파)'(6일역)했다.

 

그런데 분봉왕 헤롯 안디바(Herod Antipas),

이 모든 것을 듣고서, 크게 공포를 느꼈다.

그는 대 헤롯의 아들로서 일찍이 빌립의 아내 헤로디아를 취하고,

의인 요한의 고언(충언 unwelcome advice)을 분 내어 마침내

그를 옥중에서 살육한 인물이다.

그는 어떤 사람이 예수를 일컬어 요한이 다시 살아났다는 것을 듣고,

전율을 금치 못하여 말했다.

 

'요한은 내가 목을 베어 죽였는데 내가 듣는 소문의 그 사람은 누구인가?'.

 

그리고 '헤롯이 이(예수)를 만나고 싶어 했다'(9일역)고 있다.

 

그 무슨 까닭으로 보고자 했는지는 말하지 않더라도 분명하다.

뒤에, 이 일을 예수에게 고하여,

 

'헤롯이 당신을 죽이려 합니다'(13:31일역)고 말하는 자 있을 때,

 

예수 대답하여 말씀하셨다.

'너희는 가서 그 여우에게 전하라'(13:32).

 

하나님의 아들 예수로서 볼 때,

왕 헤롯은 실로 호리(여우와 너구리)의 무리였던 것이다.

 

예수의 행동은 차츰 이 세상의 학자, 종교가, 정치가들의 적의를 초래했다.

하지만 최후에 그의 명성을 왕자처럼 대단하게 하고 따라서

그를 꺼리는 바리새의 도, 헤롯의 당으로 하여금 그의 살육을 결행케 하도록 한 동기는

5천인의 향응에 있었던 것이다.

이 기적 있었기 때문에 갈릴리 전도는 그 종국에 달했던 것이다.

 

예수의 생애에 있어서의 일대전기로 볼 때,

5천인의 향응은 최대기적의 하나이다.

때는 유월절(265역주)가까운 봄 날,

곳은 갈릴리 호수의 북동 구석 벳새다 부근의 들이었다.

백성은 모두 예루살렘으로 올라가 이 축절을 지키지만,

벽지에 있어서는 그것이 가능치 못하고,

그러므로 예수는 들에서 뭇 사람과 함께 이것을 지키셨던 것이다.(요한복음 6장 참조).

 

얼마나 아름다운 단란이었으랴!

이는 왕자의 향연이라지만 천막을 치고서

산해의 진미가효(tasty side-dish)를 늘어놓은 것 아니고,

청초를 깔고(다른 3복음서, 모두 푸른 풀에 대해 기록하고 있다),

벽공(푸른 하늘 the blue sky)을 우러르며,

호수의 미를 바라보면서,

()을 떼에 함께 식사했던 것이다.

 

'예수 다섯 개의 빵과 두 마리의 물고기를 취하여,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 이를 베어, 제자에게 주어 뭇 사람 앞에 놓게 하시다'(16일역)라고.

 

이는 그가 매일 하셨던 식사법이었으리라.

저 나사렛의 소 가정에 있어서도,

또 엠마오 여숙의 한 방에 있어서도 한가지로 하셨으리라.

실로 간단(simple)한 식사(meal)이다.

옳다, 간단하다 해도 순결하고 정숙한 하루 저녁의 향연이었다.

 

기적 그것의 설명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그 중 가장 교묘하여 근대인을 만족케 하는 것은

비평가 파울루스(Heinrich E. G. Paulus 7348역주)의 해석이다.

 

'이때 5천의 사람들, 예수에 의해 먹을 것을 얻은 것 아니다.

그들 각자 도시락을 소지했지만, 이웃사람에게 빼앗길 것을 두려워하여,

감히 이것을 꺼내어 먹으려는 자 없었다.

그런데 한 사람 예수 및 그 제자가, 아무런 고의(의심주저 hesitation)하는 일없이

평언(태연침착) 식사(taking a meal)을 시작하니,

군중 모두 그 관대에 격려되어 안심하고 식사를 마쳤다'.

 

설명으로서 반드시 일소에 붙여버릴 것만은 아닐지 모른다.

하지만 이런 종류의 견해는 단지 기적 그것을 해석하려는데 그치고,

기적의, 예수의 전도사업 중에 있어서의 지위를 무시하는 일이다.

 

5천인의 향응은 갈릴리 전도의 종국이며 예루살렘 전도의 단서였다.

그것은 실로 예수의 생애의 가장 중요한 분수령 위에 선 한 개의 석비(石碑)였다.

 

사람은 이에 의해 예수께서 특히

하나님께서 보내신바 된 위인임을 알았던 것이다.

누가가 이 기적을 본장 중에 수록한 이유는 거기에 있는 것이다.

 

과연 그렇다면 파울루스의 설 같은 것은

성서의 기사의 순서를 생각하지 않고,

전후의 맥략(문맥)을 무시한 천박한 망단(rash conclusion)임을 면할 수가 없다.

 

사실의 설명 여하에 상관없이, 5천인 향응은 중대한 기적이다.

이 사건이 4복음서에 공통된 소수기사의 하나에 속하는 듯하나,

뜻 밖에 그 반증임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527일 등정무필기)

 

*내촌감삼의 (19177'성서지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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