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병이어(五餠二魚)의 이적
성 경: [눅 9:10-17] 사도들이 돌아와 자기들이 행한 모든 것을 예수께 여쭈니 데리시고 따로 벳새다라는 고을로 떠나 가셨으나
11) 무리가 알고 따라왔거늘 예수께서 그들을 영접하사 하나님 나라의 일을 이야기하시며 병 고칠 자들은 고치시더라
12) 날이 저물어 가매 열두 사도가 나아와 여짜오되 무리를 보내어 두루 마을과 촌으로 가서 유하며 먹을 것을 얻게 하소서 우리가 있는 여기는 빈 들이니이다
13)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하시니 여짜오되 우리에게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밖에 없으니 이 모든 사람을 위하여 먹을 것을 사지 아니하고서는 할 수 없사옵나이다 하니
14) 이는 남자가 한 오천 명 됨이러라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떼를 지어 한 오십 명씩 앉히라 하시니
15) 제자들이 이렇게 하여 다 앉힌 후
16) 예수께서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사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어 무리에게 나누어 주게 하시니
17) 먹고 다 배불렀더라 그 남은 조각을 열두 바구니에 거두니라.
[눅 9:10] 사도들이 돌아와 자기들이 행한 모든 것을 예수께 여쭈니 데리시고 따로 벳새다라는 고을로 떠나 가셨으나
▶ 사도들이 돌아와 자기들이 행한 모든 것을 예수께 여쭈니 - 제자들이 사역한 기간이나 그들이 행한 구체적인 일들은 분명히 명시되지 않고 있다.
그리고 그들이 일시에 돌아와 예수께 보고하는 것으로 보아 사역의 기간과 다시 모이는 장소는 미리 약속되어 있었던 듯하다.
여기서 '여쭈니'는 "경과를 끝까지 이야기한다"는 의미로서 제자들이 행한 모든 일들을 예수께 상세히 보고하였음을 가리킨다.
▶ 벳새다 - 이 지명의 뜻은 '고기 잡는 집'인데 정확한 명칭은 '벳새다 율리아스'(Be-thsaida Julias)로, 빌립왕이 건설하여 황제 아구스도의 딸 율리아스를 기념하는 뜻에서 '벳새다 율리아스'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갈릴리 호수 북동쪽 연안에 위치한 조용한 마을인 이곳은 베드로, 빌립, 안드레의 고향이기도 하다.
(요 1:44 빌립은 안드레와 베드로와 한 동네 벳새다 사람이라).
예수께서 이곳으로 제자들을 '따로' 데리고 간 것은 제자들이 먼 선교여행에서 돌아왔고 더구나 예수의 주변에는 언제나 그렇듯이 많은 사람들이 몰려 있어 식사할 겨를도 없었기 때문이다.
(막 6:31 이르시되 너희는 따로 한적한 곳에 가서 잠깐 쉬어라 하시니 이는 오고 가는 사람이 많아 음식 먹을 겨를도 없음이라).
말하자면 피곤하고 시장한 제자들에게 쉼을 주고자 하는 예수님의 자상한 배려 때문이었다.
그러나 누가의 본문은 예수께서 제자들과 '따로' 사적인 만남을 갖고자 했음을 부각시키는 인상을 주는 듯이 보이기도 한다.
즉 예수께서는 선교 여행에서 돌아온 제자들에게 적절한 휴식을 주고 동시에 제자들이 했던 일들에 대한 의미를 설명해 주면서 그들을 온전한 사도로 교육시키는 기회로도 삼고자 했을 것이다.
[눅 9:11] 무리가 알고 따라왔거늘 예수께서 그들을 영접하사 하나님 나라의 일을 이야기하시며 병 고칠 자들은 고치시더라
▶ 무리가 알고 따라왔거늘 - 누가는 매우 간략하게 서술하고 있으나 마가에 의하면
(막 6:32-33 이에 배를 타고 따로 한적한 곳에 갈새
33) 그들이 가는 것을 보고 많은 사람이 그들인 줄 안지라 모든 고을로부터 도보로 그 곳에 달려와 그들보다 먼저 갔더라)
예수와 제자들은 배를 타고 이동했으며 예수와 그의 일행이 배를 타고 가는 것을 알아 본 많은 사람들이 배가 상륙할 지점에 먼저 도착해서 기다리고 있었다.
누가는 어떻게 사람들이 이곳에 도달하게 되었는가에 대해서보다는 예수께 많은 사람들이 모여 들었다는 사실 자체에 강조점을 두려는 듯하다.
▶ 영접하사 하나님 나라의 일을 이야기하시며 병 고칠 자들은 고치시더라 - 제자들 하고만 있고자 했던 예수의 계획은 모여든 무리들로 인해 일단 좌절된다.
그러나 예수께서 사람들을 떠나간 것은 사람들이 싫어서가 아니라,
제자들과 별도의 시간을 갖기 위한 것이었으므로 예수께서 무리들을 영접했다 해서 이상할 것은 없다.
오히려 '영접했다'는 표현은 누가만의 독특한 표현으로 목자없는 양 같이 보인 불쌍한 무리들을 따뜻이 그리고 흔쾌하게 맞아주신 예수의 온정을 느끼게 한다.
예수께서는 그들을 위하여 가장 중요한 일을 두 가지 하셨는데,
하나는 하나님 나라의 일을 가르치는 일 즉 복음을 선포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병에 걸린 자를 고쳐주는 일이다.
특히 '이야기 하시며'(엘랄레이)와 '고치시더라'(이아토)가 모두 미완료형으로 되어 있어 예수의 가르침과 치유가 상당한 시간동안 지속되었음을 알 수 있다.
[눅 9:12] 날이 저물어 가매 열두 사도가 나아와 여짜오되 무리를 보내어 두루 마을과 촌으로 가서 유하며 먹을 것을 얻게 하소서 우리가 있는 여기는 빈 들이니이다
▶ 날이 저물어 가매 - 예수의 가르침과 치유가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 모르지만
해가 저무는 시간까지 계속되었음을 보여준다.
사람들은 예수의 가르침과 병 고치는 능력에 완전히 마음이 붙들려 시간가는 줄도 몰랐던 듯하다.
▶ 먹을 것 - 제자들이 무리들의 묵을 곳과 먹을것을 염려하는 모습은
예수의 생각에 비교한다면 믿음이 없는 모습일 수도 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의 어려운 사정을 헤아리는 따뜻한 마음이었다는 점에서는
긍정적으로 평가된다.
[눅 9:13]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하시니 여짜오되 우리에게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밖에 없으니 이 모든 사람을 위하여 먹을 것을 사지 아니하고서는 할 수 없사옵나이다 하니
▶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하시니 여짜오되 우리에게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밖에 없으니 이 모든 사람을 위하여 먹을 것을 사지 아니하고서는 할 수 없사옵나이다 - 예수는 제자들이 오천명이나 되는 무리들을 배불리 먹일 수 있는 아무런 물질적 조건을
갖고 있지 못하다는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아셨을 텐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명령을 하신 의미에 관해서 우리는 다음과 같이 추측해 볼 수 있다.
(1) 본문에서는 '너희가'에 강조점이 주어지는데, 이것은 무리들의 배고픔을 다른 사람들이 아니라 제자들 스스로가 책임의식을 가지고 해결해 주라는 의미이다.
이는 제자들이 예수의 사역을 계승해야할 사도로서,
예수께서 하나님의 백성에 대해 전적인 책임의식을 가지셨던 것처럼
그들도 하나님의 백성에 대해 책임감을 가져야 한다는 의미이다.
(2) 예수께서는 선교여행 중 지녔던 권세와 능력에 대해 망각한 채,
극히 평범하고 또 소극적인 자세를 보이는 제자들을 깨우쳐주고
책망하는 의미로 그런 주문을 하셨다.
(3) 제자들은 선교여행 중 아무 것도 소유하지 않았으나 주리지 않고 헐벗지도 않았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통하여 그들에게 필요한 것을 공급해 주었기 때문이다.
이제 제자들은 자기들이 받은 것에 대해서 필요에 따라 되돌려 주어야 한다.
이는 사람은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 책임적인 동시에 의존적인 존재라는
공동체 의식을 가르쳐 주는 것이다.
한편 예수의 명령은 엘리사가 그의 사환에게 적은 음식으로 많은 사람을
먹이라고 명령한 것을 연상시킨다.
(왕하 4:42-44 한 사람이 바알 살리사에서부터 와서 처음 만든 떡 곧 보리떡 이십 개와 또 자루에 담은 채소를 하나님의 사람에게 드린지라 그가 이르되 무리에게 주어 먹게 하라
43) 그 사환이 이르되 내가 어찌 이것을 백 명에게 주겠나이까 하나 엘리사는 또 이르되 무리에게 주어 먹게 하라 여호와의 말씀이 그들이 먹고 남으리라 하셨느니라
44) 그가 그들 앞에 주었더니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먹고 남았더라).
이에 대해 제자들은 자기들이 수많은 무리들을 먹이기에는 불가능 함을 설명하기 위해 여러가지 이유를 제시한다.
(1지금 가지고 있는 것은 본문의 기록대로 떡 다섯 개와 물고기가
두 마리 뿐이니 이것은 단 한 사람이 먹기에도 충분하지 않다.
(2) 지금의 장소는 너무 외진 곳이어서 음식을 구하러 사람을 보낼 수가 없다.
(3) 설령 사람을 보내어 200데나리온 어치의 음식을 사온다 한들 어림없이 부족하다.
(요 6:7 빌립이 대답하되 각 사람으로 조금씩 받게 할지라도 이백 데나리온의 떡이 부족하리이다).
특히 마가(막 6:37)에 의하면 제자들은 예수의 말씀이 당치도 않다는 듯
빈정대는 말투로 '우리가 가서 이백 데나리온의 떡을 사다 먹이리이까?'라고 반문한다.
이에 반해 누가는 비교적 진지한 태도로 대답하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눅 9:14] 이는 남자가 한 오천 명 됨이러라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떼를 지어 한 오십 명씩 앉히라 하시니
▶ 남자가 한 오천 명 - 남자 장정만 오천 명이었으니 여자와 아이들까지 합한다면 그보다 훨씬 많은 수가 될 것이다.
▶ 떼를 지어 - 마가는 이 표현을 라틴어의 '심포지움' 즉 '향연'과 같은 의미의 '쉼포시아'를 사용하는데 비해
(막 6:39 제자들에게 명하사 그 모든 사람으로 떼를 지어 푸른 잔디 위에 앉게 하시니)
누가는 이 표현을 '클리시아스'라는 단어로 나타내고 있다.
이 단어는 정찬에 참석하기 위해 모여드는 모습을 나타낼 때에도 사용되는 것으로서, 마샬(Marshall)같은 학자는 이것이 초대 교회의 만찬을 반영해 준다고 한다.
▶ 한 오십 명씩 앉히라 - 여기서도 누가는 독특하게 '한'(호세이)이라는 수식어를 붙이고 있다.
누가는 의사와 역사가로서 숫자에 대해 상당히 신중한 모습을 보이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비교 : (막 6:40 떼로 백 명씩 또는 오십 명씩 앉은지라).
몇 명 단위로 앉혔는가 하는 사실에 관해서는 전승 과정에서 약간의 차이가 생길 수 있으며 여기서는 단지 무리를 일정한 단위로 세분화했다는 사실이 확인되는데 중요성이 있다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무리를 세분화했다는 것은 성경의 기록대로 굉장히 많은 수의 사람들이 모여들었었다는 역사적 사실에 대한 증거이기 때문이다.
[눅 9:15] 제자들이 이렇게 하여 다 앉힌 후 - 제자들이 예수의 지시에 아무런 이의나 의문을 제기하지 않고 순종하는 모습이 간결하게 서술되고 있다.
또한 사람들 역시 음식이 어디서 올 것인가에 대한 의문이 있었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예수의 명령에 복종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눅 9:16] 예수께서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사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어 무리에게 나누어 주게 하시니
▶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 - 공관복음서 모두가 문자적으로 일치하는 문구(文句)이다.
여기서 예수께서 취하신 행동은 일반적인 유대인의 식사관습과 일치한다.
'축사하시고'는 '찬양하다', '축복하다', '감사하다'로도 번역된다.
따라서 예수께서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신것은 하나님의 이적적인 능력을 요청한 것이 아니며 단지 평범한 감사의 식사기도로 보아야 한다.
성부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부합되는 삶을 사신 예수께는 항상 하나님의 능력이
함께 하였으므로, 오병이어의 이적을 위한 별도의 간구가 필요치 않았음을 보여준다.
▶ 주어 무리에게 나누어 주게 하시니 - '주어'는 예수께서 계속해서 제자들에게 떡을 떼어주었음을 가리킨다.
떡과 물고기는 예수의 손에서 제자들을 경유하여 사람들에게 전달되었다.
이러한 전달 과정에서 어떤 기적적인 일이 어떻게 일어났는지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다.
단지 우리는 '주어'(에디두)라는 미완료 동사에서 예수의 손에서 떡이 끝없이 계속해서 떼어져 나가는 기적적인 증가가 있었음을 암시받을 뿐이다.
[눅 9:17] 먹고 다 배불렀더라 그 남은 조각을 열두 바구니에 거두니라.
▶ 먹고 다 배불렀더라 - 그곳에 있던 사람들 가운데 배불리 먹지 못한 자는 하나도 없다. 이는 예수의 능력의 완전성을 잘 보여주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육신의 빵 문제를 해결하는 것 자체 보다는 신령한
영의 양식으로 무리를 먹이는 일에 궁극적 목적을 두셨다.
이는 예수의 능력에 매료(魅了)되어 찾아온 무리들에게 책망의 말씀을
하시는 것을 보도한 요한의 기록에서도 잘 드러난다.
(요 6:14-15 그 사람들이 예수께서 행하신 이 표적을 보고 말하되 이는 참으로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라 하더라
15) 그러므로 예수께서 그들이 와서 자기를 억지로 붙들어 임금으로 삼으려는 줄 아시고 다시 혼자 산으로 떠나 가시니라,
26-27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27)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인치신 자니라)
▶ 남은 조각 열 두 바구니 - 무리가 모두 배불리 먹은데 그치지 않고 남은 양이 무려 열 두 바구니가 되었다.
요한에 의하면 예수께서 남은 조각을 거두어 들이라 명하시는데, 이것은 음식을 허비하지 말아야 한다는 의미 외에도 무엇이든 힘들이지 않고 예수의 이적에 의존하려는 태도를 갖지 않도록 하려는 의도를 반영한다.
(요 6:12 그들이 배부른 후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남은 조각을 거두고 버리는 것이 없게 하라 하시므로),
다음에 또 예수께서 기적을 일으켜 해결해 주시리라는 기대는 갖지 말라는 것이다.
여기서 '바구니'는 군인들이 장비나 급식을 담아 짊어지고 다니는 기구 또는 여행자들이 음식과 필수품을 가지고 다니는 기구를 가리킨다.
처음의 시작은 바구니 같은 것은 필요치도 않는 적은 양이었지만
그것이 예수 앞에 바쳐졌을 때 엄청나게 많은 사람이 먹고도 남을 정도의
결과를 가져왔음에 주목하라.
제자들은 이백 데나리온으로도 안된다고 했지만
예수께서는 겨우 한 아이의 식사에 적합할 만큼의 적은 것으로
큰 일을 하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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