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의 자현(自現)
누가복음 9장 18-27절 : 예수께서 따로 기도하실 때에 제자들이 주와 함께 있더니 물어 이르시되 무리가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19) 대답하여 이르되 침례 요한이라 하고 더러는 엘리야라, 더러는 옛 선지자 중의 한 사람이 살아났다 하나이다
20)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하나님의 그리스도시니이다 하니
21) 경고하사 이 말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명하시고
22) 이르시되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야 하리라 하시고
23) 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24)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25)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를 잃든지 빼앗기든지 하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26)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자기와 아버지와 거룩한 천사들의 영광으로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
27)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서 있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하나님의 나라를 볼 자들도 있느니라.
벳새다 근방의 들에 있어서의 5천인의 향응은 예수의 생애의 일대 전기로 되었다.
이 기적이 있었기 때문에 그의 명성은 갑자기 오르고, 그의 인망은 극도에 달했다.
민중은 그가 참으로 위대한 구주이심을 감지하고,
붙들어, 이로써 그 왕으로 삼고자 했던 것이다.
실로 이는 틈탈만한 기회였다.
그들은 규합(집합 rally)하여 대 교회를 건설하고,
혹은 대 교파를 확립하고,
이로써 이른바 교세의 확장을 꾀(도모)하기 위해서는 놓칠 수 없는 절호의 기회였다.
예수 만약 보통인 이었다면,
그는 반드시 이 길로 나갔으리라.
하지만 그러한 경우에 처한 예수의 태도는 언제나 상인(보통인)의 예기와 달랐다.
앞서 다수의 군중 그의 설교를 듣고자 하여 다투어 호반으로 다가오자,
그는 갑자기 그 설교의 형식을 일변하여 난해인 비유를 사용하셨다.
즉 천박한 신자 또는 거짓된 제자를 회피하기 위해서였던 것이다.
5천인의 향응 후에도 역시 동양(同樣)이었다.
이제 자기의 성망 그 극도에 달한 때에 있어서,
그는 보통인이 기도할 수 없는 새 방침을 취하셨던 것이다.
당초 인류의 구원에 관한 그가 생애의 대 방침을 전하기 위해,
일단 정적한 곳으로 물러가 그 제자와 말하고자 하심은 예수의 희망이었다.
그는 이미 이 목적으로서 호수를 건너,
대안 가다라(거라사) 땅에 가셨지만,
그때 악귀(귀신)들린 사람을 만나 이것을 고치기 위해 대 소요를 야기하여,
그 자신의 목적을 다할 수가 없었다.
뒤에 또 배를 타고 벳세다의 근방에 이르렀지만도,
그 때는 군중 육지를 따라 그를 따르고,
도리어 선착하여 그를 기다렸다가 맞이하였기 때문에,
새로운 은혜의 기적의 기회로 되었지만도 그 자신의 목적은 다시 이룰 수 없었다.
실로 괴로움 당하는 이들 앞에서는 그 자신의 목적은 언제나 포기되었던 것이다.
그의 계획을 파괴하기 위해서는,
한 사람의 약자를 그 면전에 서게 하는 것으로서 족한 것이다.
그러한 것은 세상의 소위 위인답지 않은 태도였다.
만약 선승(Zen priest 수도승)으로 하여금 이것을 평하게 한다면 반드시 말하리라.
어찌 그 진퇴의 불철저함이라고.
혹은 그렇기도 하리라.
하지만 나사렛, 예수는 실로 그러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는 인정의 사람이었다.
그는 자기의 목적을 수행하기 위해
목전의 병자, 약자를 버릴 수는 없었다.
그는 오히려 후자 위해 전자를 버린 것이다.
약자와의 관계에 있어서 그는 강한 사람은 아니었다.
실로 시인 실러(3권 195역주)가 노래한 대로이다.
즉 '용사는 홀로 있을 때 강하다'고.
그리고 그 어느 편이 과연 하나님 같은(성스러운) 것인지는
독자 스스로 이것을 판단해야 할 것이다.
고대로, 위대한 크리스천의 생애는
이 점에 있어서 모두 예수와 유사한 데가 있었다.
무영의 이웃을 돕기 위해 심야 눈을 무릅쓰고 나가,
마침내 쓰러지는 버년(4권 255, 292역주)이었다.
향지 플로렌스(Florence 이탈리아 중부의 도시)와 이웃 마을과의 화목을 알선하려고
생명을 버린 것은 단테(9권 역주)였다.
강자는 약자에게 쓰이고,
성자는 죄인 위해 희생이 된다.
이는 그리스도교의 정신이다.
그리고 예수의 생애는 그 최대의 전형이었다.
예수는 이제 멀리 헤르몬산(헬몬산 5권 190역주)
산기슭에 사람을 피하여
그 최후의 대 방침을 제자에게 고함의 때를 가지셨다.
이 대사(great thing)를 말씀하시기에 앞서,
그는 먼저 설문(문제 questioning)을 내어 말씀하셨다.
'사람들이 나를 말하여 누구라고 하느냐'(18)고.
대개 이때, 사도들은 이미 수일의 전도여행을 시도한 후이므로,
갈릴리 지방에 있어서의 일반의 비평을 귀로 듣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대답하여 이르기를
'침례 요한, 혹은 엘리야, 혹은 옛 예언자의 한 분이 다시 살아온 것이라 하더이다'(19일역)라고.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20)
이는 모름지기 사도들의 심중에 끊임없이 되풀이되었던 문제였으리라.
그리고 그들의 사상을 대언 한 사람은 예와 마찬가지로 저 베드로였다. 즉
'당신은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 그리스도이십니다.
이스라엘이 앙망 하는 저 메시야 입니다'(20참조)라고.
위대한 답변이었다. 그러므로 예수는 대답하여
'요나의 아들 시몬, 너는 복이 있다. 그것은 혈육이 네게 알게 한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시는 내 아버지 시다. 나도 네게 말한다.
너는 베드로다. 네 표백은 내 새 사회의 토대 석으로 될 것이다'(마태복음 16:17-18일역)라고 하셨다.
그리고 만약 이것을 민중에게 말할 것인가,
예수의 인망 더욱 더 융성해질 것을 생각하여,
그들을 경계하시기를
'이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21)고 명하셨다.
헐몬산 하에 있어서의 이 문답은 예수의 자각의 위대를 보여주심과 함께
또 사도들의 신앙의 위대를 나타내 보여주시는 것이다.
예수께서 자기를 엘리야, 예레미야, 모세 등의 대 예언자보다도
더욱 크신 이로 하시고, 살아있는 하나님의 아들임을 분명히 하신 것은,
실로 경악(great surprise)할 자현(자기현시 revelation)이었다.
인류의 운명은 하나로(오로지) 이 사실 위에 달려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의 제자의 표백도 또한 위대했다.
그 스승 예수, 가령 민중의 인망을 획득했다 해도,
부력 없고, 권세 없는데다가,
장로, 학자, 종교가, 정치가 등 세상의 유력자 계급은 모두 그의 적이다.
이때에 있어서, 그의 속(주내)의 참된 빛을 인정하여
다만 그 위인임을 알았을 뿐 아니라,
하나님 그리스도이심을 믿기에 이르러서는 위대하다고 일컫지 않을 수 없다.
그들은 실로 사도의 이름에 어긋나지 않았다.
'사람들이 나를 말하여 누구라고 하느냐'(18)고.
예수는 지금도 이 질문으로서 우리에게 임하시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들은 대답하여 말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당신을 대성인, 대 철학자, 대 도덕가, 대종교가,
또는 대 사회 개량 가라고 합니다.
옳습니다. 그들은 공맹석기라고 하면서 당신을 옛 성현과 동시 하는 것입니다.
단지 불신자나 이교도가 그럴 뿐 아닙니다.
실로 그리스도교회에 속하여 주의 이름 부르는 자까지 또한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라고.
그때 예수는 다시 물으시는 것이다.
즉
'그러면 너희들은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고.
아아, 우리들도 또한 과연 베드로와 한가지로
'당신은 하나님 그리스도이십니다'(20)라고 말할 수 있는지, 아닌지.
우리들의 양심에 기초한 모든 확신으로 하나님 앞에
진실로 이 고백을 할 수 있는지, 아닌지.
예수는 즉 그리스도시라는 것,
'그로 인하여 만물은 창조되었고, 하늘에 있는 것,
땅에 있는 것, 사람이 볼 수 있는 것, 볼 수 없는 것,
혹은 위 있는 것, 혹은 주(주권)되는 것, 혹은 집정자,
혹은 권위자, 기타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창조되었다'는 것,
'또 그 창조된 것은 그를 위하여'라는 것,
'그는 만물보다 먼저 있었고, 만물은 그로 말미암아 유지될 수 있다'(골로새서 1:15-17참조)는 것,
그것을 믿을 수 있는지, 어떤지?
이것을 믿지 못하고서 아직 예수를 믿는다고는 할 수가 없다.
그를 고 성현의 한 사람으로 하는 자는 크리스천이 아닌 것이다.
크리스천의 신앙 진위를 감별하는 것은 이 문제이다.
이렇게 하여 하나님의 아들 예수의 최초의 자현(자기현시; 표명)이 있었다.
그런데 그는 다시 말을 계속하여 이르기를
'인자가 반드시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 제사장, 학자에게 버린바 되고,
또 죽임 당하고, 사흘 만에 다시 살아 날 것이다'(22일역)라고.
광명일섬(섬광 a flash) 곧 또다시 암흑리에 멸실(destruction)된 것과 같다.
제자들은 생각했으리라.
예수 만약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면,
일세의 존숭을 모으고 상하의 여망(기대 popularity)을 지니며,
만민의 환호에 영합하여 세상에 나타나도록 할 것인데,
이 말씀은 도대체 무슨 뜻이랴!
그는 자백을 함과 동시에 이것을 취소한 것 아닌 가고.
하지만, 예수 만약 그들의 생각하는 바대로 되었다면 어떨까?
반드시 육의 사람인 예수의 숭배 즉 인물숭배가 시작되었으리라.
이것은 예수의 허락하시지 않는 바였다.
십계명의, 우상숭배를 엄금하는 대로, 예수는 인물숭배를 엄금하셨다.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해도, 육의 사람인 예수로서는 버린바 되고 곤욕을 당하고,
또 죽임 당하기를 바라셨던 것이다.
그러한 일은 사람이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예수인 소이(까닭)는 이에 있었던 것이다.
그가 공맹석(공자, 맹자, 석가모니)과 그 유를 같이 않는 소이(까닭)는 이에 있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는 다만 수난과 굴욕의 죽음만을 예언하시지 않았다.
그의 어미에는 가장 영광 있는 예언이 부가되었다.
이르기를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날 것'이라고.
하지만 이때 아직 누구도 이것을 해독할 수 없었다.
베드로 같은 이는 도리어 그를 만류하면서
'주여, 안 됩니다. 이 일, 당신에게 와서는 안 됩니다'고 하여,
예수의 격노를 불렀다.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마태복음 16:23일역)고.
실로 사도 베드로조차,
아직 전혀 예수를 깨닫지 못했던 것이다.
여기서 그는 다시 그를 따르려는 자를 경계하여 말씀하셨다.
'만약 나를 따르려 생각하는 자는, 자기를 이기고 날마다 그 십자가를 지고서 나를 따르라'(23일역)고.
'자기를 이기고’
자기를 거슬려, 자기를 부정하고,
자기를 죽이고, 또는 자기를 없는 자로 하고.
'십자가를 지고’
당시 죄인을 십자가에 못 박으려는 때는,
그 자신으로 하여금 십자가를 지게 함을 상례로 했다.
'나를 따르라’
내 발자취를 밟고 오라. 나를 따라(배우고)오라.
'너희가 참으로 내 제자 되기를 바라는가?
그렇다면 먼저 자기를 없는 자로 하고,
날마다 자기가 못 박힐 십자가를 그 등에 지고,
그리고 내게 배우고서 오라'고 예수는 가르치셨던 것이다.
'그 생명을 보전하려는 자는 이것을 잃고, 나를 위해 생명을 잃는 자는 이것을 보전할 것이다'(24일역)
예수께서 종종 쓰신 말씀이다.
그 자신의 말씀이었는지, 혹은 당시의 통용되던 속언금언이었는지 분명치 않지만,
복음의 진리를 전하는데 적당한 말이었음은 확실하다.
'생명’
psyche 또는 soul이다.
즉 육의 생명이다.
예수는 생명에 이종을 인정하셨다.
육의 생명 있고, 영의 생명 있다.
전자는 다만 음식 뿐 아니라, 안목 욕, 심 욕, 모두 이는 육적 생명의 일이다.
그리고 영적 생명을 보전하고자 하면 육적 생명은 이것을 버리지 않을 수 없다.
이 말을 읽고서 주의해야 할 것은,
'나를 인하여(나 위해)'이다.
'나 위해 생명을 잃는 자는’
육적 생명을 포기해야 할 이유는 무엇인가?
환언하면 도덕의 동기는 어디에 있는가?
그것은 국가사회 위해서인가?
혹은 자기의 행복 위해서인가?
혹은 윤리학자의 이른 바 절대 명령 위해서인가?
아니, 크리스천에게 있어서는 도덕의 동기는 다만 '그리스도 위해서'이다.
그리스도에게 영광 돌리기 위하여,
만사만물, 다만 그리스도 위해서이다.
일상의 사사로운 일에 이르기까지,
하나로서 주 위해 아닌 것은 없다.
그러므로 예수는 스스로'나 위해'라고 요구하셨다.
그리고 공자, 석가 아무리 위대하다 해도 이 한 가지 일은 이것을 요구할 수 없었다.
그들에게 있어서 진리는 자기 이외에 있었다.
예수에게 있어서 진리는 곧 자기 내에 있었다.
'사람이 만약 전 세계를 얻는대도, 자기를 잃고, 스스로 망하면, 무슨 유익이 있으랴'(25일역)
부(富),
부라고 한다.
그러나 사람은 얼마의 부를 얻는다면 만족할 수 있으랴?
부에 부를 더하여 마침내 전 세계를 얻기까지는,
만족하는 날은 오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전 세계를 얻는대도 그 때문에 자기를 잃으면 과연 무슨 만족이랴?
근간의 소위 벼락부자 된 이들의 생활을 안다면,
필경 지각에 지나는 바 있으리라.
참된 만족은 도리어 육적 생명의 포기에 있다.
자기를 부정하고 십자가를 지는데 있다.
왜냐하면, 이는 즉 생명을 보전함의 길이기 때문이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여기 서있는 자 중에 하나님의 나라를 보기까지는 죽지 않을 자 있다'(27일역)
난해의 말이다.
'하지만'을 붙여 읽을 것이다.
'그렇듯 나를 따라 크리스천 되는 것은 어렵다. 하지만 나는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크리스천이 되어 하나님 나라의 내림을 볼 수 있는 자가 있다.
그것은 여기 선 너희들 중에 있다'는 뜻이리라.
그리고 실로 요한, 베드로, 야고보 등 소수의 제자는
이 예언에 적합한 자였다.
이 말이 그리스도 재래(再來)의 시기를 운위한 것이 아님은,
이것을 앞의 말의 주석으로 보아 분명하다.
또 요한복음 제21장 23절에 있어서의 요한 자신의 설명에 비추어 볼 때 분명하다.
아마도 초대 신자의 사이에 있어서는 재래의 시기 절박함의 관념 강했었기 때문에,
예수의 말을 조금 굽혀 전했으리라.
예수의 자현(표백)에 뒤따르는 것은,
그 및 그의 제자의 고통의 표백이었다.
실로 그리스도의 복음은 이 세상의 행복은 아닌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그가 인망의 극점에 있을 때의 가르침이었던 것이다.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그러므로 육에 있어서 영광을 받을 자가 아니시다.
신자도 역시 동양(同樣),
육에 있어서는 고난을 겪어야 한다고.
놀라운 교훈이다.
(6월 3일 등정무필기)
*내촌감삼의 (1917년 7월 '성서지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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