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10월 22일 금요일

제자 중에서 누가 크냐 하는 변론이 일어나니

  

사제(師弟)의 간격

 

누가복음 937-50: 이튿날 산에서 내려오시니 큰 무리가 맞을새

38) 무리 중의 한 사람이 소리 질러 이르되 선생님 청컨대 내 아들을 돌보아 주옵소서 이는 내 외아들이니이다

39) 귀신이 그를 잡아 갑자기 부르짖게 하고 경련을 일으켜 거품을 흘리게 하며 몹시 상하게 하고야 겨우 떠나 가나이다

40) 당신의 제자들에게 내쫓아 주기를 구하였으나 그들이 능히 못하더이다

41)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너희에게 참으리요 네 아들을 이리로 데리고 오라 하시니

42) 올 때에 귀신이 그를 거꾸러뜨리고 심한 경련을 일으키게 하는지라 예수께서 더러운 귀신을 꾸짖으시고 아이를 낫게 하사 그 아버지에게 도로 주시니

43) 사람들이 다 하나님의 위엄에 놀라니라 그들이 다 그 행하시는 모든 일을 놀랍게 여길새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44) 이 말을 너희 귀에 담아 두라 인자가 장차 사람들의 손에 넘겨지리라 하시되

45) 그들이 이 말씀을 알지 못하니 이는 그들로 깨닫지 못하게 숨긴 바 되었음이라 또 그들은 이 말씀을 묻기도 두려워하더라

46) 제자 중에서 누가 크냐 하는 변론이 일어나니

47) 예수께서 그 마음에 변론하는 것을 아시고 어린 아이 하나를 데려다가 자기 곁에 세우시고

48) 그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또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라 너희 모든 사람 중에 가장 작은 그가 큰 자니라

49) 요한이 여짜오되 주여 어떤 사람이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쫓는 것을 우리가 보고 우리와 함께 따르지 아니하므로 금하였나이다

50) 예수께서 이르시되 금하지 말라 너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너희를 위하는 자니라 하시니라.

 

 

 

예수의 변모(變貌)

저 부활, 승천 또는 기적적 출생과 서로 연결하는 사건이었다.

 

이들의 사실과 연결(a row)하는 때는,

변모(變貌) 결코 특별한 기적은 아니었던 것이다.

이는 예수의 성격(특성)이 무엇인지를 증거하는 가장 중요한 자료의 하나였던 것이다.

그렇듯, 성서의 기사는 언제나 단독의 것으로서 관찰할 수가 없다.

반드시 이것을 전체의 일부로서 해석해야 할 것이다.

37절 이하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앞 기사에 관련시키지 않고서는,

그 의미를 찾기 어려운 바 있다.

 

즉 예수 산상에서 그 몸이 영광 화 한 후,

이튿날 산에서 내려오셨다.

그런데 산기슭에서는, 허다한 사람이 그들 기다렸다가

그 구조를 입으려하는 일,

전과 같았다.

 

그 중 한 사람이 있어, 소리 질러 말하기를

 

'제 외아들, 전간(간질병 epilepsy)으로 인하여 시달리는 일이 심하여, 당신의 제자에게 이를 고쳐주기를 구했지 만도, 능하지 못했나이다'(38-40참조).

 

예수 대답하여 말씀하시기를

 

'아아 믿음 없고 비뚤어진 세상인지! 내가 너희를 참아 언제까지 있어야겠느냐?'(41일역).

 

이는 예수의 말로서는 불온당(impropriety)할 만큼 준열(serverity)한 말씀이다.

 

아니, 예수는 누구에게 이 말을 발했던 것인가?

병아의 부모에 대해서인가?

혹은 그의 제자에 대해서인가?

 

하지만 '믿음 없고 비뚤어진 세상'이라고 있으매,

특별히 부모 또는 제자를 책한 것으로 볼 수는 없다.

 

세상이란 말할 것도 없이 이 세상 전체를 말함이다.

 

그러면 이때,

그는 어찌하여 그렇듯 날카로운 말로써 세상을 책망하셨던가?

 

이는 많은 주해자가 해석에 고심하는 문제이다.

하지만 이것을 (변모산)변화산의 직후에 온 기사로 보아,

문제는 용이하다.

 

예수는 전야 그곳에서 기도하고, 영광상태에 들어가,

모세, 엘리야와 이야기하셨다.

 

천국은 그의 안전에 전개되었다.

이튿날, 산을 내려오신 때도 일종의 영광은 아직 그의 얼굴에 남아있었으리라.

 

그런데 내려오매 세상의 상태는 의연하여 죄이다. 불신이다.

 

저 영광과 이 오예(dirtiness), 얼마나 그 대조의 현저함이랴!

 

산상의 경험은 아직 새로운데 곧 죄의 세상의 불신에 조우하여,

예수는 형언할 수 없는 감개에 부딪쳤으리라.

 

여기서, 그는 심중의 탄식을 발하여 말씀하셨던 것이다.

 

'아아 불신의 세상인 저. 나는 이미 이런 세상에 견딜 수 없다. 언제까지 너를 참아 여기 있으랴!'.

 

그러므로 이 말의 주석은 이것을 변모(변화)의 사실에서 구해야 할 것이다.

후자는 전자를 설명하고,

전자는 또 후자를 설명한다.

 

예수는 불신의 세상에 대하여 이 깊은 탄성을 발하셨지 만도.

 

'네 아들을 이리로 데려 오라'(41), 명하여,

곧 이를 고쳐주셨다.

 

중인은 다시 하나님의 대농(권능)의 발현을 보고 놀랐다.

5천인의 향응이래,

예수의 명성은 융성(prosperous)히 오를 뿐이었다.

 

하지만 그들의 사상은 현세적이었다.

제자들이 그를 따르는 것도 역시 야심 때문이었다.

그들은 아직 주의 마음을 알지 못했다.

 

예수 이것을 알고 말하기를

 

'이 말을 너희는 귀담아 두라. 대저 인자는 사람의 손에 넘겨지리라'(44일역).

 

인자는 이 세상의 왕이 되어 만민을 지배할 것 아니다.

인자는 사람의 손에 넘겨준바 되어 고난을 받아야 한다.

하지만 너희는 지금 이것을 마음에 해득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이것을 귀담아 두라는 것이다.

제자들, 이 말씀을 듣고 두려워 감히 묻지 않았다.

필경 그 이상에 너무도 어긋나는 것이어서,

오히려 이것을 알려고 하지 않았던 것이다.

 

사람은 자기의 신앙이 파괴되려는 때,

이것을 두려워하고,

도리어 자기 마음을 속여 그 실망을 피하려 한다.

 

혹은 또 사랑하는 병자의 죽음의 선고를 받으려는 때,

이것을 두려워하여 오히려 듣지 않으려 한다.

실로 약한 것은 인정이다.

 

제자들 아직 이것을 깨닫지 못하고 생각했다.

스승은 반드시 세상의 세력을 장악하여 왕이 되고,

그 나라에 이상적 정치를 행하리라.

그리고 우리들도 또한 그 지배에 참여할 수 있으리라고.

 

그러므로 그들은 은근히 야심을 가졌다.

그들은 서로 말했다.

 

'그 때, 고관에 올라 권세 쓸자는 누구랴! 베드로인가, 요한인가, 그렇지 않으면 야곱인가?' ,

 

예수는 이 마음을 아시고,

그들에게 천국의 율법을 전해주시려고 한 어린아이를 안으셨다.

 

그리고 그들에게 말하기를

 

'내 이름으로 이 어린이를 영접하는 자는 곧 나를 영접함이다.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다. 무릇 너희 중 가장 작은 자야말로, 이는 위대한 자이다'(48일역)라고.

 

즉 어린이로써 아버지의 대표자로 한 것이다.

아버지 뜻을 가장 잘 채워 넣은 자가 어린이다.

 

그러므로 이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고,

나를 영접하는 자는 아버지를 영접하는 것이다.

 

너희가 만약 어린아이보다도 작은 자로 되어 이를 영접하면,

아버지를 영접하여 가장 큰 자(위대한 자)로 되리라.

 

작은 자를 영접하는 자, 즉 가장 작은 자가,

하나님을 영접하는 자, 즉 가장 큰 자라고.

 

놀라운 교훈이다.

이는 또 누가복음이 전하는 복음의 정신에 잘 합치하는 진리이다.

만약 이 진리로써 가정 또는 사회에 응용할 것인가!

만사가 전도하리라.

 

예를 들어 말하면 우리나라에 있어서의 구래(舊來)의 가정은 어른 중심이었다.

어른 보호 위해서는 무엇이라도 희생하는 것을 마다하지 않았다.

 

하지만 건전하고 진보된 가정은 이에 반하여 모두 소아본위이다.

소아의 건강, 특히 그 정신적, 도덕적 감화여하는 가정의 최대문제이다.

한 소아 위해 가정생활의 전체가 지배되는 것이다.

 

혹은 국가에 대해서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만약 정치가가 가장 주의하기를 약자 또는 하층사회에 있는 자에게 할 것인가,

국가의 상태는 일변하리라.

 

부자, 유력자의 이익만을 꾀하고 평민을 생각하지 않는 국가는 화 있을 진저이다.

최소자를 받는(영접하는) 국가가 도리어 최강국으로 되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 어린이라고 있는 것은,

단지 약자 또는 유자를 말함이 아니다.

특히 신앙의 약자, 신앙의 유자의 뜻이다.

 

신앙 약한 자를 영접하시라.

그리하면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하나님을 영접하는 것이라고.

 

그리고 신앙의 약자를 영접하기 위해서는,

스스로 낮추어 그것 이하로 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듯, 가장 작은 자로 된 자가,

하나님의 눈으로 볼 때 가장 큰 자인 것이다.

 

그러므로 건전한 신자의 단체는

언제나 그 중의 신앙 가장 약한 자를 표준으로 하는 것이다.

마치 함대가 진행하는데 있어서,

가장 속력 더딘 군함과 보조를 함께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과 같다.

 

그런데 오늘의 교회는 어떤가?

부자, 학자, 권자 또는 신앙의 대자는 환영되고,

다만 신앙의 약자는 중시되지 못한다.

이는 교회의 병근(病根)이다.

 

'내 이름으로 어린이를 영접하는 자는 곧 아버지를 영접하는 자이다'(48일역)라고. 이는 간단하고도 위대한 진리이다. 저 마태복음에 기록된 대로 '너희가 만약 마음을 돌이켜 어린아이같이 되지 않으면,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마태복음 18:3)고 하는 것보다도,

 

그 의미 더욱 심원하다.

 

예수의 말씀은 요한의 심중에 어떤 반응을 야기케 했다.

그는 즉 말하기를

 

'스승이여, 당신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주의 이름을 씀으로 우리들과 함께 할 것인데도 따르지 않기에 이것을 금지했습니다'(49일역).

 

그런데 예수 대답하여 이르시기를

 

'못하게 하지 말라. 우리에게 대적(반대)하지 않는 자는 우리에게 속한 자다'(50일역)라고.

 

이는 성서연구자를 고심케 하는 난해의 말씀이다.

하지만 개정영역이 보여주는 대로

'우리에게''너희에게'의 오역이다.

(() 원본에는 '우리들'로 기록한 것 있으나, 신빙하기에 족하지 못하다).

 

'너희에게 반대하지 않는 자는 너희에게 속한 자다'

 

너희에게 대적하지 않고서 내 이름을 쓰는 자는 너희 편이라는 뜻이다.

요한의 대표한 것은 이른 바 당파심이었다.

예수의 이름으로 전도하는 자 있대도,

우리와 함께 하지 않으면 이를 인정하지 않는다고.

 

이 정신에 의해,

12사도는 바울의 전도를 비난했다.

그는 육체의 예수를 모르며,

또 예루살렘교회에 따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정신에 의해 오늘의 교회, 목사, 선교사 등도 역시

충실한 전도자를 비난하여 마지않는다.

 

'예수의 이름으로라면,

어찌 우리 교회 우리 교파에 속하지 않는가'란 그들의 상투어이다.

 

하지만 그들이 요한처럼 이것을 주 예수에게 호소하는 바 있을 것인가?

주는 지금도 대답하여 말씀하시는 것이다.

 

'아니다. 그들은 역시 너희 편이다'라고.

 

관대하다,

예수의 정신.

이것 있으므로 그는 참으로 세계의 스승이다.

 

그리고 교회의 밖에 있어서 도리어 교회의 기초를 굳게 한

바울 같은 이는 가장 잘 예수의 이 말씀을 증명한 자이다.

 

예수와 12사도,

그 간격(거리)이야말로 심대했다.

 

사회의 권세를 획득하여 국민을 지배하기를 바라는 것은 제자였다.

자기의 생명을 버려 세상을 구원하고자 한 것은 스승이었다.

 

서로 지위를 다투고, 누가 큰지를 논한 것은 제자였다.

어린이를 영접하는 자를 가장 큰 자로 한 것은 스승이었다.

 

예수를 믿는대도 우리에게 따르지 않는 자는 적이라고 한 것은 제자였다.

예수를 믿는 자는 모두 다 형제라고 한 것은 스승이었다.

 

이렇게 하여, 마침내 예수의 수난과 제자의 산란으로 끝난다.

 

4복음서는 일면에서 볼 때, 실로 제자의 실패사이다.

특히 요한은 예수의 특애의 제자였지 만도,

복음서 중 그에 대하여 기록하고 있는 바는 하나로서 실패의 흔적 아닌 것 없다.

 

하지만 때가 이르러 그들은 모두 예수를 깨닫고 위대한 사도로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예수 위한 증거를 하기 위해서는 스스로 자기의 치욕도 엮어(기록하여)

이것을 후세에 남기기를 주저하지 않았던 것이다.

 

누가복음은 그 제950절로 예수의 갈릴리 전도를 마치고,

51절부터 예루살렘 전도로 옮긴다.

그러므로 만약 누가복음에 구분()을 그으려면,

이곳으로서 상하의 구별(경계)로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즉 본 강의는 여기서 그 상권이 결료(completion)되는 것이다.(624일 등정무필기)

 

*참조 ; 내촌감삼의 (19177'성서지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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