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10월 5일 화요일

예수께서 이르시되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하시더라

  

생명의 제어

 

누가복음 840-56 예수께서 돌아오시매 무리가 환영하니 이는 다 기다렸음이러라

41) 이에 회당장인 야이로라 하는 사람이 와서 예수의 발 아래에 엎드려 자기 집에 오시기를 간구하니

42) 이는 자기에게 열두 살 된 외딸이 있어 죽어감이러라 예수께서 가실 때에 무리가 밀려들더라

43) 이에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는 중에 아무에게도 고침을 받지 못하던 여자가

44) 예수의 뒤로 와서 그의 옷 가에 손을 대니 혈루증이 즉시 그쳤더라

45)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게 손을 댄 자가 누구냐 하시니 다 아니라 할 때에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무리가 밀려들어 미나이다

46)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게 손을 댄 자가 있도다 이는 내게서 능력이 나간 줄 앎이로다 하신대

47) 여자가 스스로 숨기지 못할 줄 알고 떨며 나아와 엎드리어 그 손 댄 이유와 곧 나은 것을 모든 사람 앞에서 말하니

48) 예수께서 이르시되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하시더라

49) 아직 말씀하실 때에 회당장의 집에서 사람이 와서 말하되 당신의 딸이 죽었나이다 선생님을 더 괴롭게 하지 마소서 하거늘

50)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그리하면 딸이 구원을 얻으리라 하시고

51) 그 집에 이르러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와 아이의 부모 외에는 함께 들어가기를 허락하지 아니하시니라

52) 모든 사람이 아이를 위하여 울며 통곡하매 예수께서 이르시되 울지 말라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하시니

53) 그들이 그 죽은 것을 아는 고로 비웃더라

54) 예수께서 아이의 손을 잡고 불러 이르시되 아이야 일어나라 하시니

55) 그 영이 돌아와 아이가 곧 일어나거늘 예수께서 먹을 것을 주라 명하시니

56) 그 부모가 놀라는지라 예수께서 경고하사 이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 하시니라).

 

3대 기적(참조, 전회)의 최후는 생명의 제어이다.

예수는 천연을 주장하시고 영을 주장하심과 한가지로

또 우리들의 생명을 주장하신다.

 

그는 호상에서 풍랑을 잔잔케 하시고,

또 가다라(거라사) 땅에서 악귀(사귀)를 제어하신 후,

회담장 야이로의 청 따라 그 딸을 고치시고,

그리하여 천연과 영계와 생명의 주되심을 나타내 보이셨다.

 

야이로의 딸의 치유는,

누가복음 7장에 있었던 백부장의 종의 치유 및

요한복음 4장인 왕의 대신의 아들의 치유와 서로 비교하여,

흥미 있는 대조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즉 고침 받은 자는,

갑은 종이었다.

을은 아들이었다.

그리고 병은 딸이다.

 

그 지위에서 하면, 갑은 저급의 군인이었다.

을은 고귀한 대신이었다.

그리고 병은 그 사이에 위치한 회당 장이다.

 

또 예수의 이에 응하는 태도에 현저한 차이가 있었다.

주를 자기 집으로 모시는 것은 송구(fearfulness)하다는

백부장에 대해서는 그는 곧 가셨다.

 

스승은 당연히 와서 고쳐주셔야 할 것이라고 믿는

대신에 대해서는, 그는 가지 않았다.

 

그리고 이제 회당 장에 대해서는,

그는, 가셨다고 하지만,

그것은 시행(going slowly)이었다.

 

이는 모두 그들의 예수에 대한 겸손의 도수에 따른 것이다.

그리고 야이로의 경우는 서행이었기 때문에,

예수는 그 도중에서 다시 하나의 소기적을 행하셨다.

이는 필경 대 기적을 행하기 전의 준비로서의 소기적이다.

 

마치 마리아의 회태에 앞서 엘리사벳의 회태가 있었음과 같다.

그것은 마리아의 신앙의 준비로서도 필요했다.

 

또 모름지기 하나님의 사업의 준비로서도 필요했으리라.

이 경우에 있어서도,

제자로 하여금 야이로의 딸의 소생을 믿게 하기 위하여,

그 준비인 소기적을 요했을 뿐 아니라

예수의 대기적을 발휘하기 위해서도 또 필요가 있었으리라.

 

이 도중에 있어서의 사건에 대해서는,

마가복음 5장의 기사는 우리들의 직각에 호소하는 바 일층 적절하다.

 

'여기 12년 혈루증으로 앓은 여인이 있었다. 이 여인이 여러 의사에게(보이기 위해) 많은 고생을 하고, 그 소유도 다 없이했으나 아무 효력도 없이, 도리어 악화되었는데'(마가복음 5:26)라고 말하는 자 있다.

 

, 누가는 자신이 의사였기 때문에,

동업자의 무능을 감추기를 힘썼으므로,

그 기사가 절로 평온했다고.

 

어쩌면 그러하리라.

다만 기사의 대체에 있어서 양자 차이 없고,

또 그 순서는 누가복음의 것을 옳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렇듯 다년 중병에 걸려 고침 받지 못한 부인이,

군집한 가운데서 예수의 뒤로 와서,

그 어깨에서 드리워진 겉옷의 옷단을 만지니, 곧 낫게 된 것이다.

 

이때, 군집 서로 밀면서 그에게 손대었을 텐데,

다만, 이 부인만이 낫게 된 것은 무슨 까닭일까?

 

필경 이 부인만은 특히 고침 받고자 만졌기 때문이다.

 

그리스(헬라)원어에 있어서,

밀고 밀림이란 단지 접촉함의 뜻에 지나지 않지만,

만진다(haptomai)란 자기가 구하여

즉 어떤 목적으로서 손대는 뜻이다.

 

한가지로 예수의 몸에 손댄다 해도,

그 단순히 밀고 밀리는 것인지,

혹은 손대는 것인지는 예수에게 곧 감지되었으리라.

 

그리고 후자에 대해서만,

능력은 그의 몸에서 나오는 것이다.

 

만연(vague) 그리스도교를 구가하고,

군집과 함께 무의미하게 이에 접촉한대도,

아무런 능력을 받아 누릴 수는 없다.

 

다만 특별한 목적으로서 이를 맞이하고,

신앙으로서 접촉하는 자만 그 구조에 참여 할 수가 있는 것이다.

 

부인이 고침 받은 것도 또한 단지 예수께 닿게 되어서가 아니다.

신앙으로서 만졌기 때문이다.

 

신앙에 의해 그녀의 병은 치유되었다.

하지만 대사는 질병의 치유는 아니다.

보다도 그녀의 영을 고치시고,

그리하여 그 인격 전체의 구원을 도모하는 일,

이는 예수께서 바라신 것이다.

 

그리고 이것을 위해서는 그녀로 하여금 질병의 치유로서

일은 끝난 것으로 여기게 할 것은 아니었다.

그녀로 하여금 나아가 뭇 사람 앞에 담대히 그 신앙을 표백케 하고

예수를 자기 구주로서 알게 할 필요가 있었다.

 

여기서 예수는 물어 말하셨다.

 

'나를 만진 사람은 누군가'(45).

 

예수의 구원을 입을 자는 누구나 그러한 것으로 그에게서 지목되는 것이다.

이것을 피하려할 때 구원을 온전히 할 수는 없다.

 

여인도 또

 

'숨길 수 없음을 알고, 떨며 와서 (예수) 앞에 엎드려,

만진 이유와, (병이) 곧 낫게 된 것을 뭇 사람 앞에 고백'(47일역)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마침내 예수의 입에서

 

'딸아, 안심하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했다. 편히 가라'(48)는 선고에 접할 수 있었던 것이다.

 

실로 네 믿음이 너를 구원했다는 그대로이다.

단지 접촉했기 때문이 아니라,

신앙으로써 만졌기 때문이다.

단지 부분적인 치유를 받았을 뿐 아니라 전체로서의 구원을 얻은 것이다.

그러는 중,

야이로의 딸은 이미 죽었다는 통보가 왔다.

예수 이것을 듣고, 야이로에게 말씀하셨다.

 

'두려워하지 말라. 다만 믿으라.'(50일역).

 

이 한 마디, 오늘에 이르기까지 얼마나 많은 사람을 위로했는지 모른다.

 

그리고 그 '다만 믿으라'는 것은,

 

원본에 의하면,

혹은 종래의 신앙을 유지하라는 의미로 쓴 것과

혹은 보다 새로운 신앙을 일으키라는 뜻으로 쓴 것이 있다(pisteuepisteuson).

아마도 후자가 정확하리라.

 

즉 예상치 못한 곤란에 조우하여,

일층 큰 은혜를 부르려는데 있어서는

종래 이상의 새로운 신앙적 노력을 요하는 것이다.

 

이 의미로 해석할 때는

 

'두려워 말라. 다만 믿으라'고 하여,

 

그 대조를 극히 선명하게 간취(파악 comprehension)할 수가 있는 것이다.

 

'예수께서 그 집에 들어가자, 사람들이 울며 슬퍼하심을 보고,

울지 말라, 죽은 것이 아니라, 잘 뿐'(52일역)이라 하시고,

 

그리고 그들이 웃으면서 이것을 믿지 않으시므로

사람들을 모두 내 보내시고,

다만 베드로, 야고보, 요한 및 딸의 부모만,

그 곁에 있음을 허락하셨다.

그런 후 딸의 손을 잡고 외쳐 말하시기를

 

'딸아, 일어나라'(54).

 

마가복음의 기사에 의하면

예수의 이 말씀은 '달리다 구미'로 되어 있다.

 

이는 즉 당시 보통으로 사용된 시리아(수리아-3151역주)어로서,

베드로는 이것을 기억했다가 마가에게 전한 것이리라.

그리고 딸은 이 말을 들고서 소생하여, 곧 일어났던 것이다.

 

어찌하여 예수는 이때 중인(뭇 사람 the public)을 물러가게 하시고

불과 소수의 사람 앞에서 그러한 기적을 행하셨던가?

 

다름 아니다.

신앙의 행위를 하는데 불신은 최대의 방해이기 때문이다.

의심의 눈으로써 보는 것처럼 신앙의 행위를 방해하는 것은 없다.

 

이에 반하여 자기를 믿고 기도를 함께 하는 자가 있을 때,

신앙의 힘은 가장 잘 발양 되는 것이다.

 

예수께서 (야이로의) 딸을 고치시렴은,

물론 자기의 명성을 널리 펼치시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목적은 다만 고치시는데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불신의 무리를 물리치시고,

그를 믿는 자만 함께 있을 것을 허용하신 것이다.

비밀을 바라신 것 아니라,

신앙의 입장에서 당연한 것을 행하신 것이다.

 

그리고 그를 믿는 자는 이것을 보고,

실로 그가 생명의 주이심을 안 것이다.

그런데 세상에는 기적의 증인의 의심스러운 점을 들어

기적을 믿지 않으려는 자가 있다.

 

철학자 흄(5225역주) 말하기를

 

'기적 있었다고 하면 그것뿐, 그렇지만 의심스러운 것은 그 증인이다'라고.

 

야이로의 딸의 경우에 있어서도,

옆에 있었던 소수자는 확실한 의사는 아니었다.

 

그러므로 과연 사자(死者)가 다시 살아난 것인지,

혹은 아직 참으로 죽지 않은 자에게 어떤 정신작용을 가하여

이것을 일어나게 하지나 않았는지를 의심하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들이 예수께서 생명의 주되심을 믿는 것은,

이러한 개개의 사실에 의하는 건 아니다.

 

예수의 귀한 생애의 전체 및 그가 우리의 심령 내에 역사 하시는

그 능력에 의하는 것이다.

 

기적의 증명이 꼭 확실치 않음을 염려하지 않는다.

신앙은 신앙이다.

예수에게 생명을 제어함의 능력 있음을 아는 것은,

그에 대한 전체의 신앙이 그렇게 하게 하는 바이다.

야이로의 딸은 그렇게 하여 다시 부활했다.

 

그렇다면 우리 딸은 어찌하여 그렇게 부활케 해 주시지 않는 것일까?

그것은 야이로 이상의 은혜를 내려주시는 때문이다.

가령 다시 살려 주시는바 되지 못한다 해도,

내 딸은 죽은 것이 아니라, 잠든 것일 뿐.

아니 잠든 것이 아니라, 참으로 깨어난 것이다.

 

그것을 알 때,

우리들은 오히려 야이로 이상의 깊은 감사를 드리지 않을 수 없다.

 

사실인저, 야이로의 딸부터 이미 2천년,

수천만의 사람이 그의 딸 같이 다시 소생되지 못함의 경험을 하면서,

더욱 더 하나님을 찬미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는 영원히 생명의 주이시다.

그러므로 우리들 그를 믿는 자는,

우리의 사랑하는 자가 부르심을 입는다 해도,

눈물 흘리면서도 감사를 계속할 수가 있는 것이다.

 

예수(야이로의) 딸을 일으키신 후,

그녀에게 먹을 것을 주라고 명하셨다고 있다.

 

그는 그의 구원을 입은 자의 행복에 대해,

사소한 일에까지 주의를 기울이셨다.

 

예수는 단지 크신 도덕의 선생은 아니었다.

그는 두터운 인정의 사람이었다.

그의 목적은 사람의 영혼을 구원하심에 있다 해도,

그는 육체의 일을 게을리 않으셨다.

 

의사 누가는 특별한 흥미로써 이 한 가지를 기록했으리라, (531, 등정무필기)

 

 

*내촌감삼의(19176'성서지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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