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십 인의 파송 2
성 경: [눅 10:4-12] 전대나 배낭이나 신발을 가지지 말며 길에서 아무에게도 문안하지 말며
5) 어느 집에 들어가든지 먼저 말하되 이 집이 평안할지어다 하라
6) 만일 평안을 받을 사람이 거기 있으면 너희의 평안이 그에게 머물 것이요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
7) 그 집에 유하며 주는 것을 먹고 마시라 일꾼이 그 삯을 받는 것이 마땅하니라 이 집에서 저 집으로 옮기지 말라.
8) 어느 동네에 들어가든지 너희를 영접하거든 너희 앞에 차려놓는 것을 먹고
9) 거기 있는 병자들을 고치고 또 말하기를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에게 가까이 왔다 하라
10) 어느 동네에 들어가든지 너희를 영접하지 아니하거든 그 거리로 나와서 말하되
11) 너희 동네에서 우리 발에 묻은 먼지도 너희에게 떨어버리노라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온 줄을 알라 하라
12)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그 날에 소돔이 그 동네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눅 10:4] 전대나 배낭이나 신발을 가지지 말며 길에서 아무에게도 문안하지 말며
▶ 전대(纏帶)나 배낭이나 신발 - 마태는 금이나 은 또는 돈을 넣어 다니는
'허리띠'(조네)로 표현하는데
누가는 '지갑'의 의미인 '발란티온'을 사용하고 있다.
허리띠에 돈을 넣어 묶는 관습 보다는 지갑을 가지고 다니는 것이
더 후대의 관습이라고 볼 때 누가는
도시인들이 잘 알아들을 수 있도록 적절하게 단어를 바꾼 것이라 하겠다.
전대(纏帶)는 일용품을 넣는 가방이며
(9:3 이르시되 여행을 위하여 아무 것도 가지지 말라 지팡이나 배낭이나 양식이나 돈이나 두 벌 옷을 가지지 말며)
신을 가지지 말라는 것은 맨발로 다니라는 것이 아니라
여분의 신을 지참하지 말라는 의미일 것이다.
결국 제자들은 9:3에서 처럼 여행에 필요한 최소한의
필수품 조차 소유하지 못하게 된 것이다.
이는 제자들이 그들에게 부여된 선교의 사명을 감당함에 있어서
전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해야 한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 문안하지 말며 - 동양에서는 서로 정중하게 인사를 나누는 것은
다소 시간이 걸리는 일이라 하더라도 매우 중요하게 여겨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리에서의 인사를 금한 것은
복음 전파의 긴급성을 강조한 것이다(Marshall).
[눅 10:5] 어느 집에 들어가든지 먼저 말하되 이 집이 평안할지어다 하라
▶ 먼저 말하되 이 집이 평안할지어다 - 지금까지는 하지 말아야 할 것에 대해
말씀하셨는데 여기에서는 행해야 할 것을 지시하고 있다.
여기서 '평안' 혹은 '평화'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이레네'는
구약 시대의 히브리인들이 이웃의 안부를 물을 때
(삼하 8:10 도이가 그의 아들 요람을 보내 다윗 왕에게 문안하고 축복하게 하니 이는 하닷에셀이 도이와 더불어 전쟁이 있던 터에 다윗이 하닷에셀을 쳐서 무찌름이라 요람이 은 그릇과 금 그릇과 놋 그릇을 가지고 온지라;
11:7 우리아가 다윗에게 이르매 다윗이 요압의 안부와 군사의 안부와 싸움이 어떠했는지를 묻고;
왕하 4:26 너는 달려가서 그를 맞아 이르기를 너는 평안하냐 네 남편이 평안하냐 아이가 평안하냐 하라 하였더니 여인이 대답하되 평안하다 하고),
사람을 만났을 때
(왕하 5:21 나아만의 뒤를 쫓아가니 나아만이 자기 뒤에 달려옴을 보고 수레에서 내려 맞이하여 이르되 평안이냐 하니),
헤어질 때 하던
(삼상 1:17 엘리가 대답하여 이르되 평안히 가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네가 기도하여 구한 것을 허락하시기를 원하노라 하니;
삼하 15:9 왕이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하니 그가 일어나 헤브론으로 가니라)
'샬롬'에 상응하는 인사말로
샬롬의 의미가 '평강을 빕니다'.
(스 4:17 왕이 방백 르훔과 서기관 심새와 사마리아에 거주하는 그들 동관들과 강 건너편 다른 땅 백성에게 조서를 내리니 일렀으되 너희는 평안할지어다),
'평안 하냐?'
(왕하 4:26 너는 달려가서 그를 맞아 이르기를 너는 평안하냐 네 남편이 평안하냐 아이가 평안하냐 하라 하였더니 여인이 대답하되 평안하다 하고;
5:21 나아만의 뒤를 쫓아가니 나아만이 자기 뒤에 달려옴을 보고 수레에서 내려 맞이하여 이르되 평안이냐 하니),
'평안히 가시오'인 만큼
(삼상 1:17 엘리가 대답하여 이르되 평안히 가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네가 기도하여 구한 것을 허락하시기를 원하노라 하니)
'에이레네'도 같은 범주에서 이해될 수 있다.
이와 같이 볼 때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지시하신 인사 내용 자체는
당시의 일반적인 인사법에서 벗어나는 특별한 것은 아니었다.
단지 제자들에게 '먼저'(프로톤) 인사의 말을 하라고 하여
그들이 친절하고 공손해야 할 것을 요구하고 있을 뿐인데
아마 이것은 예수의 권위를 부여받은 제자들이 그 권위에 도취되어
교만해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본절의 인사가 일반적인 인사말이라 해서
일반적인 의미의 단순한 바램이나 기원을
뜻하는 차원에 머무는 것이 아님을 주시해야 한다.
앞으로 제자들이 흩어져 선교(mission) 활동을 할 때 하게 될
'평안'이라는 인사는,
하나님의 구원이 도래함을 뜻하는 차원에서의 '평안'을 의미하며
(요 14:27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행 10:26 베드로가 일으켜 이르되 일어서라 나도 사람이라 하고),
하나님께 기원을 둔 하나의 선물이라는 사실이다.
[눅 10:6] 만일 평안을 받을 사람이 거기 있으면 너희의 평안이 그에게 머물 것이요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
▶ 평안을 받을 사람 - 즉 '평안의 아들'(Son of Peace KJV)은
히브리식 용법으로
'부활의 아들'
(눅 20:36 그들은 다시 죽을 수도 없나니 이는 천사와 동등이요 부활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자녀임이라),
'빛의 아들'
(눅 16:8 주인이 이 옳지 않은 청지기가 일을 지혜 있게 하였으므로 칭찬하였으니 이 세대의 아들들이 자기 시대에 있어서는 빛의 아들들보다 더 지혜로움이니라),
'지옥의 아들'
(마 23:15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교인 한 사람을 얻기 위하여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생기면 너희보다 배나 더 지옥 자식이 되게 하는도다),
'멸망의 아들' 등과 같은 유형의 표현이다.
(요 17:12 내가 그들과 함께 있을 때에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보전하고 지키었나이다 그 중의 하나도 멸망하지 않고 다만 멸망의 자식뿐이오니 이는 성경을 응하게 함이니이다)
이러한 표현은 어떤 사람의 성품과
그가 하나님께 대하여 가지고 있는 태도에 따라서 겪게 될
응분의 운명을 말해주는 관용적인 표현이다.
'평안의 아들'은
'평화에 합당한 사람', '평화를 이룩할 수 있는 사람'의 의미로 볼 수 있으며
결국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을 가리킨다.
(마 5:9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이런 사람들에게는 제자들의 인사가 단순한 기원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축복의 선물로 주어지게 된다.
이 말씀의 배경에는 말이 지니는 힘에 대한
히브리식 믿음이 깃들어 있는 바,
구약에서 족장들의 축복은 취소할 수 없는 유산(遺産)으로 여겨졌었다.
(창 27:37 이삭이 에서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그를 너의 주로 세우고 그의 모든 형제를 내가 그에게 종으로 주었으며 곡식과 포도주를 그에게 주었으니 내 아들아 내가 네게 무엇을 할 수 있으랴).
그러나 제자들의 축복은 수용자의 태도 여하에 따라
머물기도 하고 되돌아오기도 한다는 점에서
개인의 책임성이 큰 부분을 차지한다.
[눅 10:7] 그 집에 유하며 주는 것을 먹고 마시라 일꾼이 그 삯을 받는 것이 마땅하니라 이 집에서 저 집으로 옮기지 말라 -
여기서 '그 집'이란 물론 '평안의 아들'이 있어 제자들을 영접해 주는 집을 뜻한다.
여기서 '그 집에'는 강조적 표현으로
'그 집 자체에서'(in the house it self)이며,
'바로 그 집에'(in that very house)란 뜻이다.
제자들은 대충 아무 집에서나 유하는 것이 아니라
'평안의 아들'이 있는 바로 그 집에 머물러야 했다.
열 두 제자들도 그랬던 것처럼
(9:4 어느 집에 들어가든지 거기서 머물다가 거기서 떠나라)
70(72)인의 제자들도 여러 집을 옮겨다니지 말고 한 집에 머물러 있으라고 하신다.
이 말씀은 열 두 제자들과 마찬가지로 더 나은 대접을 받기 위해
옮겨다니는 일을 해서는 안 된다는 의미로 이해된다.
한편 제자들은 '말씀'을 가르치는 일에 대한 보답으로
의식주의 문제를 해결 받을 권리가 있다.
(갈 6:6 가르침을 받는 자는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모든 좋은 것을 함께 하라).
말씀의 사역자들이 그들이 섬기는 성도들로부터 물질적인 도움을
받는 것의 정당성에 대해서는 딤전 5:18;고전 9:3-18에도 기록되어 있다.
(딤전 5:18 성경에 일렀으되 곡식을 밟아 떠는 소의 입에 망을 씌우지 말라 하였고 또 일꾼이 그 삯을 받는 것은 마땅하다 하였느니라;
고전 9:3-18 나를 비판하는 자들에게 변명할 것이 이것이니
4) 우리가 먹고 마실 권리가 없겠느냐
5) 우리가 다른 사도들과 주의 형제들과 게바와 같이 믿음의 자매 된 아내를 데리고 다닐 권리가 없겠느냐
6) 어찌 나와 바나바만 일하지 아니할 권리가 없겠느냐
7) 누가 자기 비용으로 군 복무를 하겠느냐 누가 포도를 심고 그 열매를 먹지 않겠느냐 누가 양 떼를 기르고 그 양 떼의 젖을 먹지 않겠느냐
8) 내가 사람의 예대로 이것을 말하느냐 율법도 이것을 말하지 아니하느냐
9) 모세의 율법에 곡식을 밟아 떠는 소에게 망을 씌우지 말라 기록하였으니 하나님께서 어찌 소들을 위하여 염려하심이냐
10) 오로지 우리를 위하여 말씀하심이 아니냐 과연 우리를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 밭 가는 자는 소망을 가지고 갈며 곡식 떠는 자는 함께 얻을 소망을 가지고 떠는 것이라
11) 우리가 너희에게 신령한 것을 뿌렸은즉 너희의 육적인 것을 거두기로 과하다 하겠느냐
12) 다른 이들도 너희에게 이런 권리를 가졌거든 하물며 우리일까보냐 그러나 우리가 이 권리를 쓰지 아니하고 범사에 참는 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에 아무 장애가 없게 하려 함이로다
13) 성전의 일을 하는 이들은 성전에서 나는 것을 먹으며 제단에서 섬기는 이들은 제단과 함께 나누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14) 이와 같이 주께서도 복음 전하는 자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명하셨느니라
15) 그러나 내가 이것을 하나도 쓰지 아니하였고 또 이 말을 쓰는 것은 내게 이같이 하여 달라는 것이 아니라 내가 차라리 죽을지언정 누구든지 내 자랑하는 것을 헛된 데로 돌리지 못하게 하리라
16)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이로다
17) 내가 내 자의로 이것을 행하면 상을 얻으려니와 내가 자의로 아니한다 할지라도 나는 사명을 받았노라
18) 그런즉 내 상이 무엇이냐 내가 복음을 전할 때에 값없이 전하고 복음으로 말미암아 내게 있는 권리를 다 쓰지 아니하는 이것이로다)
그런데 제자들이 물질적 제공을 받는 것이
'상전'으로서가 아니라
'일꾼'으로서의 삯이라는 사실이 재확인되어야 하는데
그것은 제자들이 겸손해야 함과
그들이 받는 물질적 대가는 풍요를 위해서가 아니라
생계를 위함이어야 한다는 점이다.
▶ 여러분들의 동참을 촉구합니다.
에덴골 돌쇠내외가 11월16일(토) 광화문 이승만광장의 축제에 또다시 출전을 합니다.
풍전등화, 타이타닉호와 같은 위기에선 대한민국국가를 바로 새우는 일에 동참하십시다.
이번에는 덕수궁 앞에서부터 진출을 하여서 광화문까지 공략할 것입니다.
지난번에는 종각에서 출발을 하였기 때문에...
와이프는 청와대 철야기도회와 주일 대예배까지 동참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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