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를 영접하지 않는 자들의 운명
성 경: [눅 10:13-16] 화 있을진저 고라신아, 화 있을진저 벳새다야, 너희에게 행한 모든 권능을 두로와 시돈에서 행하였더라면 그들이 벌써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하였으리라
14) 심판 때에 두로와 시돈이 너희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15) 가버나움아 네가 하늘에까지 높아지겠느냐 음부에까지 낮아지리라
16) 너희 말을 듣는 자는 곧 내 말을 듣는 것이요 너희를 저버리는 자는 곧 나를 저버리는 것이요 나를 저버리는 자는 나 보내신 이를 저버리는 것이라 하시니라.
[눅 10:13] 화 있을진저 고라신아, 화 있을진저 벳새다야, 너희에게 행한 모든 권능을 두로와 시돈에서 행하였더라면 그들이 벌써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하였으리라
▶ 화 있을진저 고라신아 - 여기서 '화 있을 진저'는 반대자들에 대한
보복 보다는 불행한 운명을 맞게 될 대상에 대한 슬픔과 유감을 표시한다.
(6:24 그러나 화 있을진저 너희 부요한 자여 너희는 너희의 위로를 이미 받았도다).
고라신은 마태복음의 병행본문(마 11:21)과 이곳을 제외하고는
신약 성경의 다른 곳에서는 나타나지 않는 지명이다.
(마 11:21 화 있을진저 고라신아 화 있을진저 벳새다야 너희에게 행한 모든 권능을 두로와 시돈에서 행하였더라면 그들이 벌써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하였으리라)
고라신은 당시의 가버나움으로부터 북서쪽으로 약 4km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한 성읍인데 현재는 텔 흄(Tel Hum)으로부터 동부쪽으로
5km정도 거리에 있는 '케라제'(Kerazeh)일 것으로 추측한다.
예수께서 이 곳에서 구체적으로 어떤 일들을 하셨는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지만
'두로'와 '시돈'에 비유하는 것으로 보아
상당한 관심과 애정을 기울이셨으리라 추측된다.
▶ 벳새다 - 예수께서 이곳에서 사역을 하신 기록은 9:10-17에 나와 있다.
(9:10-17 사도들이 돌아와 자기들이 행한 모든 것을 예수께 여쭈니 데리시고 따로 벳새다라는 고을로 떠나 가셨으나
11) 무리가 알고 따라왔거늘 예수께서 그들을 영접하사 하나님 나라의 일을 이야기하시며 병 고칠 자들은 고치시더라
12) 날이 저물어 가매 열두 사도가 나아와 여짜오되 무리를 보내어 두루 마을과 촌으로 가서 유하며 먹을 것을 얻게 하소서 우리가 있는 여기는 빈 들이니이다
13)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하시니 여짜오되 우리에게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밖에 없으니 이 모든 사람을 위하여 먹을 것을 사지 아니하고서는 할 수 없사옵나이다 하니
14) 이는 남자가 한 오천 명 됨이러라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떼를 지어 한 오십 명씩 앉히라 하시니
15) 제자들이 이렇게 하여 다 앉힌 후
16) 예수께서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사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어 무리에게 나누어 주게 하시니
17) 먹고 다 배불렀더라 그 남은 조각을 열두 바구니에 거두니라)
▶ 너희에게 행한 모든 권능 - 이 문구는 앞에서 언급한 두 장소에서 행하신 사역들이 성경의 기록보다 훨씬 많음을 시사한다.
여기서 '권능'(뒤나미스)은 4:14과 9:1에도 나오는 데 하나님의 주권적 능력을 뜻한다.
(4:14 예수께서 성령의 능력으로 갈릴리에 돌아가시니 그 소문이 사방에 퍼졌고,
9:1 예수께서 열두 제자를 불러 모으사 모든 귀신을 제어하며 병을 고치는 능력과 권위를 주시고)
예수께서는 이 곳에서 두로와 시돈이라도 구원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하나님의 표적을 보여주셨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예수를 받아들이지 않았던 것이다.
▶ 두로와 시돈 - 이 두 도시는 갈릴리 북방에 있는 베니게의 항구도시로
두로는 B.C.2750년 경에, 시돈은 B.C. 1400년 이전에 건설되었다.
이 두 도시는 번영과 쾌락과 이교도의 도시로 유명하며
하나님을 거역하고 하나님의 백성을 억압한 결과,
(암 1:9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두로의 서너 가지 죄로 말미암아 내가 그 벌을 돌이키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그 형제의 계약을 기억하지 아니하고 모든 사로잡은 자를 에돔에 넘겼음이라;
욜 3:6 또 유다 자손과 예루살렘 자손들을 헬라 족속에게 팔아서 그들의 영토에서 멀리 떠나게 하였음이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심판을 받았다.
*참조 : (사 23장; 겔 26-28장).
▶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 베옷(삭코스)은 염소 털로 만든 거친 옷으로
회개나 애도의 표시로 입었다.
(왕상 21:27 아합이 이 모든 말씀을 들을 때에 그의 옷을 찢고 굵은 베로 몸을 동이고 금식하고 굵은 베에 누우며 또 풀이 죽어 다니더라).
재(스포도스) 역시 애도의 표시였고,
(욥 2:8 욥이 재 가운데 앉아서 질그릇 조각을 가져다가 몸을 긁고 있더니;
욘 3:6 그 일이 니느웨 왕에게 들리매 왕이 보좌에서 일어나 왕복을 벗고 굵은 베 옷을 입고 재 위에 앉으니라;
마 6:16 금식할 때에 너희는 외식하는 자들과 같이 슬픈 기색을 보이지 말라 그들은 금식하는 것을 사람에게 보이려고 얼굴을 흉하게 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삼베'와 연결되어 사용되기도 하였다.
(에 4:2-3 대궐 문 앞까지 이르렀으니 굵은 베 옷을 입은 자는 대궐 문에 들어가지 못함이라
3) 왕의 명령과 조서가 각 지방에 이르매 유다인이 크게 애통하여 금식하며 울며 부르짖고 굵은 베 옷을 입고 재에 누운 자가 무수하더라).
[눅 10:14] 심판 때에 두로와 시돈이 너희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 12절에서와 같이
여기서도 두로와 시돈이라는 두 패역한 도시에 비유하여
고라신과 벳새다의 심판이 얼마나 중할 것인가에 대해 경고하고 있다.
하나님을 모르는 백성들도 심판을 면하기 어렵거늘
하물며 하나님의 백성임을 자처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거역한 것에 대해서 엄한 심판이 있을 것은 자명한 이치이다.
[눅 10:15] 가버나움아 네가 하늘에까지 높아지겠느냐 음부에까지 낮아지리라
▶ 가버나움 - 문자적으로 '나훔의 마을'이며 '나훔'은 '자비로운'이라는 뜻으로
이 마을 이름은 결국 '자비의 마을'이 되는 셈인데(Hendriksen)
예수의 심판의 말씀에 비추어 볼 때 이 마을의 이름은
역설적인 의미에서 '완악한 마을'이라고 해석해야 옳을 것이다.
아무튼 가버나움은 예수의 갈릴리 사역의 중심지였다.
베드로, 안드레, 야고보, 요한과 같은 중심적 제자들이 그곳에서 선택되었고,
(5:10 세베대의 아들로서 시몬의 동업자인 야고보와 요한도 놀랐음이라 예수께서 시몬에게 이르시되 무서워하지 말라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 하시니),
많은 이적과 교훈이 그곳에서 베풀어졌다.
(4:23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반드시 의사야 너 자신을 고치라 하는 속담을 인용하여 내게 말하기를 우리가 들은 바 가버나움에서 행한 일을 네 고향 여기서도 행하라 하리라,
31-37 갈릴리의 가버나움 동네에 내려오사 안식일에 가르치시매
32) 그들이 그 가르치심에 놀라니 이는 그 말씀이 권위가 있음이러라
33) 회당에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 있어 크게 소리 질러 이르되
34) 아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 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
35) 예수께서 꾸짖어 이르시되 잠잠하고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하시니 귀신이 그 사람을 무리 중에 넘어뜨리고 나오되 그 사람은 상하지 아니한지라
36) 다 놀라 서로 말하여 이르되 이 어떠한 말씀인고 권위와 능력으로 더러운 귀신을 명하매 나가는도다 하더라
37) 이에 예수의 소문이 그 근처 사방에 퍼지니라;
7:1-10 예수께서 모든 말씀을 백성에게 들려 주시기를 마치신 후에 가버나움으로 들어가시니라
2) 어떤 백부장의 사랑하는 종이 병들어 죽게 되었더니
3) 예수의 소문을 듣고 유대인의 장로 몇 사람을 예수께 보내어 오셔서 그 종을 구해 주시기를 청한지라
4) 이에 그들이 예수께 나아와 간절히 구하여 이르되 이 일을 하시는 것이 이 사람에게는 합당하니이다
5) 그가 우리 민족을 사랑하고 또한 우리를 위하여 회당을 지었나이다 하니
6) 예수께서 함께 가실새 이에 그 집이 멀지 아니하여 백부장이 벗들을 보내어 이르되 주여 수고하시지 마옵소서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7) 그러므로 내가 주께 나아가기도 감당하지 못할 줄을 알았나이다 말씀만 하사 내 하인을 낫게 하소서
8) 나도 남의 수하에 든 사람이요 내 아래에도 병사가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
9) 예수께서 들으시고 그를 놀랍게 여겨 돌이키사 따르는 무리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에서도 이만한 믿음은 만나보지 못하였노라 하시더라
10) 보내었던 사람들이 집으로 돌아가 보매 종이 이미 나아 있었더라).
그리하여 마태는 가버나움을 예수의 '본 동네'라고 하였다.
(마 9:1 예수께서 배에 오르사 건너가 본 동네에 이르시니).
그러나 가버나움의 사람들은 그렇게 주어진 기회를 저버리고 말았는데
구체적으로 그들이 어떻게 예수를 거역하였는지 알 수 없으나
"네가 하늘에까지 높아지겠느냐"는 표현에 의해
그들이 매우 교만하였으리라고 추측할 수 있을 뿐이다.
▶ 하늘에까지 높아지겠느냐 음부에까지 낮아지리라 - 이는 이사야가 포로후기 시대에
오만불손했던 바벨론의 느부갓네살에게 하나님의 심판을
선포한 말씀을 가버나움에 적용한 것이다.
(사 14:13 네가 네 마음에 이르기를 내가 하늘에 올라 하나님의 뭇 별 위에 내 자리를 높이리라 내가 북극 집회의 산 위에 앉으리라,
15 그러나 이제 네가 스올 곧 구덩이 맨 밑에 떨어짐을 당하리로다)
'네가 하늘에까지 높아지겠느냐'는 결코 하늘에까지 높아질 수 없음을
반어법적으로 강조해 준다.
하늘의 영광과 음부의 파멸이 극명한 대조를 이루면서
교만한 가버나움이 당할 파국의 비참함을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다.
한편 '음부'(하데스)는 구약에서 죽은 사람들의 장소를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며,
신약 시대에는 그 의미가 조금 변하여
무신론자들이 벌을 받는 장소로 여겨졌다. (Marshall).
[눅 10:16] 너희 말을 듣는 자는 곧 내 말을 듣는 것이요 너희를 저버리는 자는 곧 나를 저버리는 것이요 나를 저버리는 자는 나 보내신 이를 저버리는 것이라 하시니라. -
제자들의 사역이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권위에 의한 것임을 밝힘으로써
제자들의 권위가 존중되어야 함을 보증해 주시는 말씀이다.
제자들의 권위를 존중해주지 않고 거역할 때
그 행위는 예수를 거역하는 것이고
결국은 하나님을 거역하는 것이다.
반면에 제자들로서는 자신들의 권위가 자생적(自生的)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위탁받은 것임을 인식해야 하며
따라서 모든 일을 함에 있어서
오직 하나님의 영광만을 위하여 한다는 겸손한 태도를 지녀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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