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10월 16일 토요일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이르되 이는 나의 아들 곧 택함을 받은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하고

  

예수의 변모

 

누가복음 928-36: 이 말씀을 하신 후 팔 일쯤 되어 예수께서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고 기도하시러 산에 올라가사

29) 기도하실 때에 용모가 변화되고 그 옷이 희어져 광채가 나더라

30) 문득 두 사람이 예수와 함께 말하니 이는 모세와 엘리야라

31) 영광중에 나타나서 장차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을 말할새

32) 베드로와 및 함께 있는 자들이 깊이 졸다가 온전히 깨어나 예수의 영광과 및 함께 선 두 사람을 보더니

33) 두 사람이 떠날 때에 베드로가 예수께 여짜오되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우리가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사이다 하되 자기가 하는 말을 자기도 알지 못하더라

34) 이 말 할 즈음에 구름이 와서 그들을 덮는지라 구름 속으로 들어갈 때에 그들이 무서워하더니

35)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이르되 이는 나의 아들 곧 택함을 받은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하고

36) 소리가 그치매 오직 예수만 보이더라 제자들이 잠잠하여 그 본 것을 무엇이든지 그 때에는 아무에게도 이르지 아니하니라.

 

 

사도 베드로,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표백(manifestation)하고,

예수 또한 그 최후의 수난과 죽음과 부활을 예언하신 때에 있어서,

그의 전도의 역사는 그 절정에 달했던 것이다.

 

그 때부터 6일을 지나서, 8일이 될 무렵,

그는 베드로, 요한, 야고보를 데리고, 기도하기 위해 산에 올라가셨다.

아마도 헐몬산(5190역주참조)이었으리라.

해발 8천척, 예수의 생애 중 오르신 최고의 산이었다.

 

때는 아직 봄이어서, 산상의 적설은 아직 녹지 않았으리라.

날은 이미 저물어 제자들에게 잠이 왔다.

예수는 다만 홀로 깊이 기도에 몰두하셨다.

 

그런데 보라.

그의 얼굴은 일변하고, 그 의복까지 희게 빛났다.

곧 두 분의 사람, 한 가지 영광의 몸으로서 나타나,

무슨 일인지 그와 함께 이야기하고 있다.

 

두 사람은 모세와 엘리야였다.

그리고 그 화제는 예루살렘에 있어서의 예수의 죽으심이었다.

 

제자들, 처음은 깊이 잠들고 있었으나,

겨우 깨어 이 광경을 보고, 경악(astonishment)한 나머지,

이른 바 몽중이 되었다.

 

두 분 예수와 헤어지는 때, 베드로, 예수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스승이여, 이런 훌륭한 곳에 우리들 언제든지 있도록 하십시다.

원하기는 나로 하여금 세 개의 초막을 짓게 하소서.

하나는 선생님 위해, 하나는 모세 위해, 또 하나는 엘리야 위해 하리이다'(33참조).

 

필경 그는 반취(半醉) 반몽(半夢)의 상태에서

무엇을 말했는지 자기도 몰랐던 것이다.

그때 구름 와서 그들을 감쌌다.

그리고 구름 속에 소리 있었다.

이르기를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 이에 들으라'(35).

 

소리 그치자, 다만 예수 한 분을 볼뿐이었다.

일은(보통이 아닌) 이상이다.

 

그러므로 학자는 이에 대하여 여러 가지 설명을 붙이려 하는 것이다.

특히 5천인 향응의 기적을 아무렇지도 않게 설명해 버린 파울루스(역주참조),

이 변모의 사건도 한가지로 해석하여 말한다(그는 재치에 찬 학자였을 것으로 보인다),

 

'예수는 그 밤, 산상에 있어서 어떤 사람과 회견해야 할 약속을 했다.

그런데 봄은 아직 일천하고, 땅에는 적설 있고, 하늘에는 전광(번개 lightning)있다.

두 사람이 와서 예수와 말한 때, 암중 전광은 명멸(flickering)하고,

백설 이에 비치어 그들의 몸을 비추었던 것이다.

제자들 잠에서 깨어나 이것을 영광의 몸으로 오인하고,

두 사람을 모세 및 엘리야이리라 상상했음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후에 주해자들, 혹은

파울루스의 설명이 아직 미진한 것으로 느껴,

보족하여 말하기를

 

'베드로, 이때 꿈을 꾸고 깨어, 마치 소아 마냥 그 꿈의 계속을 말했던 것이다'라고.

 

비평적인 입장에서 기록된 그리스도 전으로서,

변모(변모변화)의 설명을 이에서 이상 더 나가도록 하는 이는 없다.

학자 사이에 끼어서,

그러면서 이 사실을 성서의 기사대로 믿으려고 하는 것은 지난(持難) 한 일이다.

 

하지만, 성서의 기사는,

이것을 전후의 관계에서 절단(cutting)하여,

그것을 예수의 생애 중에 있어서의

지위를 무시하고 개별적으로 해석을 내릴 수는 없다.

 

반드시 이것을 앞의 기사의 계속으로 하고,

또 뒤의 사건을 단서(실마리 a beginning)로 하여,

그리스도 전() 전체에 대한 그것의 관계를

천명(making clear)하여 관찰하지 않으면 안 된다.

 

5천인의 향응 같은 것도 그러했다.

파울루스(Paulus)의 담백(simplicity)한 설명이 받아들여질 수 없는 이유는,

그것이 예수의 생애의 일대전기로 된 소이(이유)를 설명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어떤 놀라운 방법에 의한 기적으로 보지 않고서는 이로 인하여 민중이

그를 억지로 왕으로 삼고자 한 까닭을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처럼, 변모도 또한 일개 단독의 사건은 아니었다.

이에 앞선 것은,

갈릴리 전도의 종국과,

예수의 하나님의 아들이심의 자현(自現)이었다.

 

이에 뒤를 잇는 것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심과,

그곳에 있어서의 수난 및 죽으심이었다.

 

알 것이다.

변모는 예수의 생애의 최고처,

그 절정에 달한 때의 사건임을.

 

그러므로 이 설명은 그 입장에서 이것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여기서, 절로 해석상의 필요가 생기는 것이다.

 

전광, 백설, 꿈 이야기 같은 것,

해석으로서 경묘함을 잃지 않는다 해도, 그 천박함이란,

도저히 성서전체의 입장에서 이것을 허용할 수 없는 것은 명백하다.

 

그리고 이 입장에서 볼 때, 변모는 즉 사실 그대로였다.

 

예수의 변모(변화)는 결코 제자들의 환상은 아니었다.

이는 예수의 취해야 할 당연한 형체였던 것이다.

그의 성화가 그 극에 달한 때의 상태였던 것이다.

그는 이 상태에 있어서 이때 곧 승천할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그의 죄 없는 거룩한 생애의 당연한 결과였던 것이다.

 

사람의 죽음은 본시 그 죄의 결과이다.

그러므로 죄 없는 생애를 보낸 자는 죽을 필요가 없는 것이다.

 

아담이 만약 에덴동산에 있어서 죄 없이 일생을 보냈더라면,

그는 죽음을 경과하지 않고 자연히 하늘로 옮겨졌으리라.

 

인류의 죽음은 원래 부자연한 일이다.

 

'죽음은 죄의 값이다'라고.

 

이는 죽음에 대한 성서의 입장이다.

그리고 성서는

또 어떤 경우에는 죽음의 고통을 거치지 않고서

승천한 사람의 시례를 보여 주고 있다.

 

그 제1은 에녹이다.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 그를 데려가시매 있지 않더라'(창세기 5:24일역).

 

이는 곧 에녹의 변체(translation)이다.

 

그 제2는 엘리야이다.

 

'여호와, 대풍으로 엘리야를 하늘로 올리고자 하시는 때,

엘리야는 엘리사와 함께 길갈에서 나가더라그들이 가면서 말하는 때,

불 수레와 불 말들이 나타나 두 사람을 떼어놓더라.

엘리야가 대풍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니라 엘리사가 보고, 내 아버지 내 아버지,

이스라엘의 병거여, 그 기병(마병)이여 하고, 부르짖었으나,

다시 그를 볼 수 없었다'(열왕기하 2:1, 11-12)

 

그 제3은 모세이다.

 

'이 같이, 여호와의 종 모세는 여호와의 말씀대로 모압 땅에서 죽었다.

여호와, 벳브올에 대하는(맞은 편) 모압 땅 골짜기에 이를 장사하셨다.

오늘까지 그 무덤을 아는 사람 없다'(신명기 34:5-6)

 

그는 어떻게 하여 죽었는지, 누구도 이를 알지 못한다.

아마도 에녹 또는 엘리야 비슷한 방법으로 승천하지나 않았는지 생각된다.

 

죽음과 죄와의 관계가 성서가 보여주는 대로이고,

죽음은 죄의 결과라고 한다면,

죄 없는 사람이 죽지 않는 것은 논리상 당연하다.

 

그리고 만약 에녹, 엘리야 등이 또한 죽음을 경과치 않았다면,

예수 그리스도는 물론 그렇게 승천해야 할 것이었다.

 

그에게는 죄 없고, 부정 없고, 부패 없고,

모두 죽음의 원인으로 될 것이 없었다.

 

그의 생애는 천부의 성지에 따른 완전한 생애였다.

그리고 이제 장령 30유여,

이미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고,

또 스스로 하나님의 아들이 심의 자현(표명)을 하시고,

제자 또한 이것을 확인했던 것이다.

 

내외에 있어서 모두 흠 없는 생활로서 하고,

행하셔야 할 것은 모두 이를 하셨다.

 

예수의 신체가 성화하여 살아서 승천하셔야 할 시기는 바로 이제가 아니었는가?

이때에 있어서 헐몬산정(山頂) 변모의 일은 있었던 것이다.

 

즉 그의 승천 시기는 임하여,

그 제자 앞에 있어서 변화가 시작되었던 것이다.

예수는 실로 이렇게 하여 승천하셔야 할 것이었다.

 

신체의 성화라고 한다.

그 어떠한 상태인지는 상상하기 어려운 바 있다.

하지만, 우리가 숙지하는 천영현상에 대하여,

 

그 유례를 구한다면,

상족하는 때에 있어서의 누에의 변태가 그 일례이리라.

이때, 곤충의 몸은 변하여 투명한 것으로 되는 것이다.

 

또 죄의 세상에 있어서 간혹 유사한 예를 보지 못하는 것 아니다.

물욕 없이 염담(鹽膽)한 생활을 계속하는 성인으로서,

만년 그 신체 절로 성화하여,

그 변모(countenance)에는 빛을 발하고,

이 세상 사람으로는 생각될 수 없기에 이르러,

고요히 저 세상으로 옮겨가는 사람이 있다.

 

이자 본래 예수의 변모에 비할 수 없다 해도,

후자도 이 종류의 현상의 지성 한 것임을 추정 할 수가 있다.

 

예수께서 이 상태에 있어서 승천해야 할 것은

그의 거룩한 생애의 결과로서

가장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하지만, 그는 스스로 피하여

이 자연의 길을 취하지 않으셨다.

 

그는 스스로 택하여 이때 승천하시지 않았던 것이다.

죄의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해 오신 그는,

자기 혼자만 승천할 것을 원하지 않으셨다.

그는 죄인과 함께 승천하기를 원하셨다.

 

그러므로 죄인이 통과해야 할 길을 통과하시려 하셨다.

그들에게 동정하고, 그들의 경험을 모두 경험하시려 하셨다.

 

자연의 승천은 예수의 특권이시지만도,

그는 죄인을 생각하시는 나머지 특권을 포기하신 것이다.

 

죽음은 그의 피할 수 없는 운명은 아니지만도,

그는 인류를 구하시기 위해 일부러 고통스러운 죽음을 택하셨던 것이다.

 

예수는 의인이었기 때문에 부득불 죽음을 취하셨다는 것은 잘못이다.

그의 경우에 있어서는 죽음은 필연의 최후가 아니라,

전적으로 임의적인 선택이었다.

 

죄인의 친구로 되기 위해,

이와 서로 동정할 수 있는 자로 되기 위한 희생이었던 것이다.

('그리스도의 죽으심의 귀한 까닭'-내촌감상전집 13권 감상 322혈 참조)

 

그러므로 변모의 산에 있어서 그와, 모세, 엘리야와의 사이의 화제는 이것이었다.

 

'예수의 예루살렘에서 세상을 떠나려 하시는 일을 말하였다'(31).

 

'세상을 떠난다'고 역한 것은,

그리스어의 exodus

'탈출'이다. 무리한 '출법'이다.

 

자연스러운 승천이 아니라 격렬한 죽음의 방식이다.

예수는 이때 곧 승천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도리어 이 격렬한 죽음의 방식을 택했던 것이다.

그는 스스로 버리고자 하여 그 생명을 비리신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 하늘로 올라가실 시기()가 되어, 예루살렘으로 갈 것을 확정하셨다'(51일역)고 있다.

 

단연(결연 decidedly) 예루살렘으로 얼굴을 향하게 하셨다는 뜻이다.

자기는 죽어야 할 필요 없으신 자인데도,

단연 죽으시려 각오하셨다는 뜻이다.

그리고 이 각오는 즉 헐몬 산정에 있어서 확정하셨던 것이다.

 

'소리, 구름에서 나와 이르기를,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 이에 듣도록 하라'(35일역).

예수의 생애 중,

하늘에서 소리 있어서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울려 퍼진 것은 전후 2회 있었다.

 

그리고 그 모두,

그가 자기를 버리신 때,

하나님의 아들임의 특권을 포기하신 때,

스스로 낮추어 죄인의 반에 끼이신 때였다.

 

, 일찍이는 자기에게 회개할 죄 없으신데도,

죄인과 한가지로 침례를 받은 때에 이 일이 있었다.

 

지금도 자기가 죽어야 할 필요(이유) 없으신데

죄인 위해 죽고자 각오하신 때에 이 일이 있었던 것이다.

실로 스스로 낮추는 자는 높여지리라는 대로이다.

 

이렇게 해석하여, 변모산의 기사는

심원무량의 의의를 발휘하는 것이다.

 

버릴 필요 없는 생명을 스스로 택하여 버리려 각오하신 곳에

예수의 죽으심의 진정 귀한 소위(이유)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사람은 타인 위해 희생하려는 결심을 하는 때,

그 힘은 곧 20-50배한다.

예수의 생애도 또한 이때부터 일변했다.

 

이후 예루살렘에 올라가

십자가에 달리시기까지의 사이의 그의 생활의 풍부함이란,

실로 놀라운 바가 있었다.

 

그리하여 헐몬 산상 영광의 몸으로서

승천하여야 할 하나님의 아들은,

골고다 언덕 위의 가장 굴욕의 죽음을 감수했던 것이다.

 

'예수의 영광'(32)이라 하고,

 

'모세와 엘리야, 영광 중에 나타'(30)나셨다고 한다.

 

영광 즉 doxa,

이는 성서 독특한 말이다.

신자가 다음 세상에서 부활제를 부여받는 때도 역시

하나님의 영광으로 옷 입혀지리라고 한다.

 

그 영광이 어떠한 것인지를,

조금 엿보려 하면,

변모산에 있어서의

예수 및 모세, 엘리야의 모습(모양)이 그것이다.

 

죄 없이 거룩한 생애를 보낸 사람의 얼굴에서 말하는 빛이

부활체의 영광에 가까운 것이다.

 

그 영광에 비하여,

현재의 육체 같은 것은 얼마나 부정해진 것이랴!

 

심리학상, 사후의 생활을 실험한 자의 말을 듣건대,

육체를 탈리 한 후, 다시 이것을 본 때에는,

그 추루(filthiness) 오예(impurity)에 견딜 수 없었음을 느꼈다고 한다.

 

오늘에 있어서는,

생명재산이라고 하여 이것을 존중하지만도,

저 영광의 날이 오면,

누구나 그러한 생각을 가지게 되리라.

 

사모해야할 것은 변모의 예수 같은 영광체가 입혀지는 그날이다.

(610일 등정무필기)

 

*내촌감삼의 (19177'성서지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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