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10월 15일 금요일

베드로와 및 함께 있는 자들이 깊이 졸다가 온전히 깨어나 예수의 영광과 및 함께 선 두 사람을 보더니

  

 

변화산에서의 예수 2

 

성 경: [9:32-36] 베드로와 및 함께 있는 자들이 깊이 졸다가 온전히 깨어나 예수의 영광과 및 함께 선 두 사람을 보더니

33) 두 사람이 떠날 때에 베드로가 예수께 여짜오되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우리가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사이다 하되 자기가 하는 말을 자기도 알지 못하더라

34) 이 말 할 즈음에 구름이 와서 그들을 덮는지라 구름 속으로 들어갈 때에 그들이 무서워하더니

35)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이르되 이는 나의 아들 곧 택함을 받은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하고

36) 소리가 그치매 오직 예수만 보이더라 제자들이 잠잠하여 그 본 것을 무엇이든지 그 때에는 아무에게도 이르지 아니하니라.

 

 

 

[9:32] 베드로와 및 함께 있는 자들이 깊이 졸다가 온전히 깨어나 예수의 영광과 및 함께 선 두 사람을 보더니

 

깊이 졸다가 - 본절 역시 누가만의 기록으로 예수와 두 구약인물이 예루살렘에서의 죽음에 대하여 이야기 한 것이 제자들에게는 알려지지 않았음을 말해준다.

 

예수는 기도함으로써 하늘의 계시를 다시 한번 확인하신데 반해

제자들은 기도하지 못하고 잠에 곯아떨어짐으로써

포착했어야 될 중요한 계시를 놓쳤으며,

계속해서 상황을 곡해하는 결과까지도 초래한다.

 

(33 두 사람이 떠날 때에 베드로가 예수께 여짜오되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우리가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사이다 하되 자기가 하는 말을 자기도 알지 못하더라).

 

이와 유사한 장면은 겟세마네 동산에서도 연출되는데,

그 때에도 예수께서는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따르기로 결단하는데 반해

제자들은 깨어 기도하지 못하고 잠을 자는 실수를 범하며

결국 예수를 버리고 도망가는 결과를 초래했다.

 

(22:42-46 가라사대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어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니

43) 사자가 하늘로부터 예수께 나타나 힘을 돕더라

44)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 같이 되더라

45) 기도 후에 일어나 제자들에게 가서 슬픔을 인하여 잠든 것을 보시고

46) 이르시되 어찌하여 자느냐 시험에 들지 않게 일어나 기도하라 하시니라).

 

 

온전히 깨어나 예수의 영광과 및 함께 선 두 사람을 보더니 - 제자들은 뒤늦게나마 깨어난다.

 

아마 예수와 모세, 엘리야를 둘러싸고 있는 찬란한 빛 때문에 깨어났을 것이다.

 

제자들은 깨어 예수와 두 인물이 함께 서 있는 것을 보게 되는데

그 모습을 묘사한 장면에서 예수의 영광에 두 사람이 압도되어 있다.

이는 예수가 구약의 위대한 두 인물을 능가하는 존재임을 시사한다.

 

 

[9:33] 두 사람이 떠날 때에 베드로가 예수께 여짜오되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우리가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사이다 하되 자기가 하는 말을 자기도 알지 못하더라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 하늘로부터 온 두 사람이 오래도록 머물기를 원하는 베드로의 바램을 보여준다.

 

하지만 베드로는 조금 전에 들었던 예수의 수난 예고와,

 

(22가라사대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야 하리라 하시고)

 

그것을 확증하는 모세와 엘리야의 이야기를 충분히 깨닫지 못했음이 분명하다.

 

(31영광 중에 나타나서 장차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을 말씀할새)

 

이는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겪어야하는 고난과

그 이후의 영광을 망각하고

현실에 안주(安住)하기를 도모하는 비 신앙적 태도라 할 수 있다.

 

초막 셋을 짓되 - 이 초막은 숙곳에서 장막절에 사용했던 것과 같이

나뭇잎이나 기타 일시적인 재료로 지은 움막을 가리키며,

일반적으로는 텐트나 장막을 가리킨다.

 

(13:20 그들이 숙곳에서 발행하여 광야 끝 에담에 장막을 치니)

 

아마 베드로는 지금 경험하고 있는 천상적인 영광의 임재를

계속해서 느끼고 싶은 심정에서 그런 제안을 했을 것이다.

 

 

[9:34] 이 말 할 즈음에 구름이 와서 그들을 덮는지라 구름 속으로 들어갈 때에 그들이 무서워하더니

 

구름 - 구름은 미래에 다시 오실 인자와 관련되기도 하고,

 

(7:13 내가 또 밤 이상 중에 보았는데 인자 같은 이가 하늘 구름을 타고 와서 옛적부터 항상 계신 자에게 나아와 그 앞에 인도되매)

 

성도들을 하늘로 들려 올리는 수단으로도 사용되며,

 

(11:12 하늘로부터 큰 음성이 있어 이리로 올라오라 함을 저희가 듣고 구름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니 저희 원수들도 구경하더라),

 

신 구약 중간시대 문학에서는 메시야의 도래와의 관련성 속에서 등장하기도 하였다.

(위경 2 Baruch 53:1-12;4 Ezra 13:3).

 

구름이 가장 중요하게 사용되는 것은 하나님의 임재를 나타내는 경우이다.

 

(16:10 아론이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말하매 그들이 광야를 바라보니 여호와의 영광이 구름 속에 나타나더라;

 

19:9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빽빽한 구름 가운데서 네게 일함은 내가 너와 말하는 것을 백성으로 듣게 하며 또한 너를 영영히 믿게 하려함이니라 모세가 백성의 말로 여호와께 고하였으므로;

 

24:15-18 모세가 산에 오르매 구름이 산을 가리며

16) 여호와의 영광이 시내 산 위에 머무르고 구름이 육일 동안 산을 가리더니 제칠일에 여호와께서 구름 가운데 모세를 부르시니라

17) 산 위의 여호와의 영광이 이스라엘 자손의 눈에 맹렬한 불 같이 보였고

18) 모세는 구름 속으로 들어가서 산 위에 올랐으며 사십 일 사십 야를 산에 있으니라;

 

33:9 모세가 회막에 들어갈 때에 구름 기둥이 내려 회막문에 서며 여호와께서 모세와 말씀하시니).

 

특히 출 24:15-18에는 본문과 매우 유사한 병행구를 찾아볼 수 있다.

예수와 두 인물의 영광스러운 모습에 이어 하나님 자신의 임재로 말미암아

상황은 절정에 이르고 있다.

 

저희를 덮는지라 - 여기서 '저희'가 누구를 가리키는 가에 대해서는 몇가지 견해가 있다.

 

(1) 예수와 두 인물 그리고 3제자 모두(Schurmann),

(2) 모세와 엘리야만(Greijdanus, Williams),

(3) 예수와 모세, 엘리야(Godet, Knox, Marshall).

 

이 중 세 번째 견해가 가장 타당하다고 할 수 있다.

 

무서워하더니 - 신적인 권능 또는 하나님의 임재 앞에 인간은 누구나 두려움을 느끼기 마련인데 이는 인간의 죄성과 유한성 때문이다.

 

(8:25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 하시니 저희가 두려워하고 기이히 여겨 서로 말하되 저가 뉘기에 바람과 물을 명하매 순종하는고 하더라;

 

24:4-5 이를 인하여 근심할 때에 문득 찬란한 옷을 입은 두 사람이 곁에 섰는지라

5) 여자들이 두려워 얼굴을 땅에 대니 두 사람이 이르되 어찌하여 산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

 

 

[9:35]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이르되 이는 나의 아들 곧 택함을 받은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하고

 

나의 아들 곧 택함을 받은 자 - 구름 속으로부터 들려온 것은 하나님 자신의 음성이기에 그만큼 이 선언은 엄숙하고 확정적이다.

 

또한 이 음성은 예수께서 침례를 받을 때 들려왔던 음성과도 비슷하다.

 

(3:22 성령이 형체로 비둘기 같이 그의 위에 강림하시더니 하늘로서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시니라).

 

베드로가 제자들을 대표하여 고백한 예수 이해는 이제 하늘로부터의

음성에 의해 더 이상 오해의 여지가 없는 것으로 확정되었다.

 

요한에 의하면 수난 주간에도 한번 더 하늘에서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왔다.

 

(12:28 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옵소서 하시니 이에 하늘에서 소리가 나서 가로되 내가 이미 영광스럽게 하였고 또 다시 영광스럽게 하리라 하신대).

 

그렇다면 하나님의 음성은

예수 사역의 시작과 절정기와 마지막에 주어진 것이며

이것은 그 사역의 전 과정을 통하여 하나님이 함께 하셨음을 의미한다.

 

한편 누가는 마태나

 

(17:5 말할 때에 홀연히 빛난 구름이 저희를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가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하는지라)

 

마가와 달리,

 

(9:7 마침 구름이 와서 저희를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하는지라)

 

'사랑하는'을 생략하고 '택함을 받은 자'를 첨가하고 있다.

누가는 이런 표현을 통해 예수의 삶에 하나님의 특별한 개입이 있었음과

아울러 예수의 권위의 출처가 초월적인 것임을 말해 준다.

 

저의 말을 들으라 - 이 명령은 신 18:15의 반영으로,

 

(18:15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의 중 네 형제 중에서 나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너를 위하여 일으키시리니 너희는 그를 들을지니라)

 

이제 예수의 정체(正體)가 분명히 드러난 이상

그분의 말에 순종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한편 그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거나 듣지 않는 사람들이 있음을 가정한다면

이 명령은 하나의 선택을 요구하는 것이고

그 선택 여하에 따른 필연적 심판이 있다는 사실까지도 생각할 수 있다.

 

하여튼 본문에서의 강조점은 제자들의 순종에 있으며

예수께서 제시하는 사역의 목적과 방식에 대해서

이의를 제기하거나 불신하지 말라는 것이다.

 

(16:21-23 이 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 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가르치시니

22)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간하여 가로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23)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9:36] 소리가 그치매 오직 예수만 보이더라 제자들이 잠잠하여 그 본 것을 무엇이든지 그 때에는 아무에게도 이르지 아니하니라.

 

오직 예수만 보이더라 - 누가는 상황이 끝나는 장면을 매우 간결하게 서술하고 있다.

 

*비교 : (17:6-8 제자들이 듣고 엎드리어 심히 두려워하니

7) 예수께서 나아가 저희에게 손을 대시며 가라사대 일어나라 두려워 말라 하신대

8) 제자들이 눈을 들고 보매 오직 예수 외에는 아무도 보이지 아니하더라).

 

본문에서는 모세와 엘리야가 사라지고 '예수만' 남아 있음이

'오직'이란 뜻의 '모노스'로 강조되고 있다.

 

모세와 엘리야라고 하는 구약의 위대한 두 인물도 결국은

예수의 정체를 결정적으로 드러내는 보조 수단으로서의 역할을 하고 사라질 뿐

주인공은 '오직 예수' 뿐이다.

 

그만큼 예수는 탁월하신 분이라는 사실이 강조된다.

그 때에는 아무에게도 이르지 아니하니라 - 자기들이 본 사실을 잠정적로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음을 말하는데 아마 예수의 지상사역 기간에는 말하지 않았음을 뜻하는 듯하다..

 

(17:9 저희가 산에서 내려올 때에 예수께서 명하여 가라사대 인자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기 전에는 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하시니;

 

9:9 저희가 산에서 내려올 때에 예수께서 경계하시되 인자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때까지는 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하시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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