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 두 제자의 파송
성 경: [눅 9:1-6] 예수께서 열두 제자를 불러 모으사 모든 귀신을 제어하며 병을 고치는 능력과 권위를 주시고
2)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며 앓는 자를 고치게 하려고 내보내시며
3) 이르시되 여행을 위하여 아무 것도 가지지 말라 지팡이나 배낭이나 양식이나 돈이나 두 벌 옷을 가지지 말며
4) 어느 집에 들어가든지 거기서 머물다가 거기서 떠나라
5) 누구든지 너희를 영접하지 아니하거든 그 성에서 떠날 때에 너희 발에서 먼지를 떨어 버려 그들에게 증거를 삼으라 하시니
6) 제자들이 나가 각 마을에 두루 다니며 곳곳에 복음을 전하며 병을 고치더라.
[눅 9:1] 예수께서 열두 제자를 불러 모으사 모든 귀신을 제어하며 병을 고치는 능력과 권위를 주시고
▶ 열 두 제자를 불러 모으사 - 이 제자들은 5:3-11에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처음 부르는 것으로 시작되어
(5:3-11 예수께서 한 배에 오르시니 그 배는 시몬의 배라 육지에서 조금 떼기를 청하시고 앉으사 배에서 무리를 가르치시더니
4) 말씀을 마치시고 시몬에게 이르시되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5) 시몬이 대답하여 이르되 선생님 우리들이 밤이 새도록 수고하였으되 잡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하고
6) 그렇게 하니 고기를 잡은 것이 심히 많아 그물이 찢어지는지라
7) 이에 다른 배에 있는 동무들에게 손짓하여 와서 도와 달라 하니 그들이 와서 두 배에 채우매 잠기게 되었더라
8) 시몬 베드로가 이를 보고 예수의 무릎 아래에 엎드려 이르되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니
9) 이는 자기 및 자기와 함께 있는 모든 사람이 고기 잡힌 것으로 말미암아 놀라고
10) 세베대의 아들로서 시몬의 동업자인 야고보와 요한도 놀랐음이라 예수께서 시몬에게 이르시되 무서워하지 말라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 하시니
11) 그들이 배들을 육지에 대고 모든 것을 버려 두고 예수를 따르니라)
6:12-16에서 그 선택이 완료된 인물들이다.
(6:12-16 이 때에 예수께서 기도하시러 산으로 가사 밤이 새도록 하나님께 기도하시고
13) 밝으매 그 제자들을 부르사 그 중에서 열둘을 택하여 사도라 칭하셨으니
14) 곧 베드로라고도 이름을 주신 시몬과 그의 동생 안드레와 야고보와 요한과 빌립과 바돌로매와
15) 마태와 도마와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셀롯이라는 시몬과
16) 야고보의 아들 유다와 예수를 파는 자 될 가룟 유다라)
예수께서 열둘을 부르신 것은 열 두 지파에 의해 상징되었던
구약의 이스라엘에 대비되는 새 이스라엘을 상징하는 의미를 갖는다(Hendriksen).
한편 누가는 마가의 '부르다'라는 표현 대신
(막 6:7 열두 제자를 부르사 둘씩 둘씩 보내시며 더러운 귀신을 제어하는 권능을 주시고)
'불러 모으다'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는데
이는 8:51에 있었던 잠깐 동안의 헤어짐과의 논리적 일관성을 고려한
누가의 세심한 표현이라고 볼 수 있다.
(8:51 그 집에 이르러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와 아이의 부모 외에는 함께 들어가기를 허락하지 아니하시니라)
▶ 모든 귀신을 제어하며 병을 고치는 능력과 권위를- 마태와(마 10:1) 마가는(막 6:7)
'더러운 귀신'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는데 비해
누가는 '모든 귀신'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아마 마태와 마가는 귀신의 악함에 초점을 두고
누가는 '모든 종류'의 귀신을 제어하시는 예수의 권세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듯 하다.
또한 누가는 마가복음에 있는
'권세'(엑수시아)에 능력(뒤나미스)을 첨가하고 있는데,
전자는 합법적 권리나 권위를 나타내며
후자는 초월적인 하나님의 능력, 영적인 능력을 의미한다.
이는 제자들이 예수께로부터 부여받은 권세와 능력이 예수 당시와 초대 교회에도 있었던 마술사의 그것과는 전혀 다른 초월적인 것이었음을 말해 준다.
(행 19:13 이에 돌아다니며 마술하는 어떤 유대인들이 시험삼아 악귀 들린 자들에게 주 예수의 이름을 불러 말하되 내가 바울이 전파하는 예수를 의지하여 너희에게 명하노라 하더라)
[눅 9:2]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며 앓는 자를 고치게 하려고 내보내시며 - 마태에 의하면,
(마 9:36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니 이는 그들이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기진함이라)
예수께서 제자들을 보내는 동기가 이스라엘 백성들이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는 것을 민망히 여기셨기 때문이라고 하나
본문에 의하면 제자들은 두 가지 책무를 부여받고서 파송되었다.
(1) 제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해야 했다.
하나님 나라는 예수의 사역과 인격 속에 현존함과 동시에
미래에 완성될 것이기도 했다.
(마 6:10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예수는 하나님 나라에 관한 뜻을 백성들에게 구체적으로 설명하시지 않았는데,
이는 당시 사람들이 편협한 민족주의적 희망으로 인해 곡해(曲解)하고는 있었으나
하나님 나라 혹은 하나님의 왕권의 의미를 어느 정도는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14:15 함께 먹는 사람 중의 하나가 이 말을 듣고 이르되 무릇 하나님의 나라에서 떡을 먹는 자는 복되도다 하니;
마 18:1 그 때에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이르되 천국에서는 누가 크니이까;
20:21 예수께서 이르시되 무엇을 원하느냐 이르되 나의 이 두 아들을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명하소서;
막 11:10 찬송하리로다 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
15:43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와서 당돌히 빌라도에게 들어가 예수의 시체를 달라 하니 이 사람은 존경 받는 공회원이요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자라).
(2) 제자들은 병을 고쳐주어야 했다.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는 것이 영적인 일이라면 병을 고치는 것은
육적인 일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는바
육적인 문제의 해결도 매우 중요한 것으로 여겨짐에 주목해야 한다.
육신의 병을 고치는 일이 영혼의 구원에 비하여 이차적인 것이라 할지라도
질병 치유가 단순히 영혼의 문제로 이끌어 가는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고 보아서는 안된다.
병을 고치는 일은 그 자체로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이다.
이는 본문에서 '전파하고'(케뤼쎄인)와 '고치는'(이아스다이)이 대등 접속사 '카이'로 연결되어 있는 데서도 분명해진다.
한편 제자들이 해야 할 이 두가지 과제,
즉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고 병을 고치는 일은 다름 아니라
바로 예수께서 친히 행하셨던 일인데,
(11절 무리가 알고 따라왔거늘 예수께서 그들을 영접하사 하나님 나라의 일을 이야기하시며 병 고칠 자들은 고치시더라;
마 9:35 예수께서 모든 도시와 마을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라)
이는 제자들이 해야하는 일이 단지 일회적인 것이 아니라
예수의 사역을 계승할 사도로 서기 위한 훈련의 과정이라는 사실을 시사한다.
[눅 9:3] 이르시되 여행을 위하여 아무 것도 가지지 말라 지팡이나 배낭이나 양식이나 돈이나 두 벌 옷을 가지지 말며
▶ 지팡이나 배낭이나 양식이나 돈이나 두 벌 옷을 - 예수께서는 여행을 위하여 아무것도 가지지 말라고 이야기 하고도 그것을 재차 확인하기 위하여 하나하나 세부적인 항목까지 열거하고 있다.
(1) 지팡이를 가지지 말라고 하셨다.
이점에 대해서는 마태도 동일하게 보도하고 있으나
(마 10:10 여행을 위하여 배낭이나 두 벌 옷이나 신이나 지팡이를 가지지 말라 이는 일꾼이 자기의 먹을 것 받는 것이 마땅함이라)
마가는 지팡이는 허용하는 것으로 기록한다.
(막 6:8 명하시되 여행을 위하여 지팡이 외에는 양식이나 배낭이나 전대의 돈이나 아무 것도 가지지 말며)
이 차이를 설명하려는 시도들이 여럿 있었는데 다음과 같다.
(ㄱ) 마가는 왕하 4:29에 나오는 게하시의 경우처럼 지팡이를 스승의 권위에 대한 상징으로 파악했다는 견해(Schurmann).
(왕하 4:29 엘리사가 게하시에게 이르되 네 허리를 묶고 내 지팡이를 손에 들고 가라 사람을 만나거든 인사하지 말며 사람이 네게 인사할지라도 대답하지 말고 내 지팡이를 그 아이 얼굴에 놓으라 하는지라)
그러나 게하시의 경우에는 자신의 지팡이가 아니라 스승의 지팡이를 사용했다.
따라서 만약 게하시의 경우가 제자들에게 적용되려면 제자들 모두가 스승인 예수의 지팡이를 하나씩 가져야 한다.
(ㄴ) 누가는 지팡이나 슬리퍼나 허리띠를 띠고 성전이 있는 언덕으로 올라오지 못하게 규제하고 있는 랍비적 규율을 염두에 두었다는 견해(Manson).
(ㄷ) 발음은 비슷하나 뜻은 서로 다른 아람어가 혼동되었다는 견해.
즉 '...외에'라는 뜻의 'ella'(엘라)와 '그리고...도 아닌'의 의미를 가진 'wla'(웰라)를 혼동한데서 생긴 차이이다.
이 설명은 헬라어 성경 원문의 무오성(無誤性)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ㄹ) 두 복음서 기자가 서로 다른 지팡이를 염두에 두었다는 견해.
즉 마가는 길을 걸을 때 사용하는 지팡이를,
누가는 맹수나 위험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지팡이를 각각 염두에 두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두 복음서가 모두 여행할 때 사용하는 지팡이인 '라브도스'를 사용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 설명은 충분한 해명이 못된다.
결국 이런 정도로 추측할 수 있을 뿐 보편적으로 공감되는 설명은 아직 없다 하겠다.
(2) 배낭을 가지는 것이 금지되었다.
이 배낭은 여행에 필요한 것들을 담는 배낭일 수도 있고 동냥 주머니일 수도 있다.
앞에서 설명한 대로 이 주머니가 동냥을 위한 것이라면
예수께서는 제자들로 하여금 전도 여행 도중에 축재하지 말라는 의미에서 금한 것이라고볼 수 있고,
여행 필수품을 담는 배낭이라면 아무것도 의지할만한 물건을
소유하지 말라는 의미에서 금하신 것으로 볼 수 있다.
(3) 빵도 가지고 가지 못했다.
(4) 돈도 가지고 가지 말라고 하셨다.
이는 스스로 필수품을 자급할 수 있는 일체의 가능성을 가지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5) 마지막으로 두 벌 옷을 가지지 말라고 하셨다.
이 옷은 속옷으로 거의 발에까지 닿으며 소매가 달려있었다(Hendriksen).
한편 마가복음에는 신발에 대한 언급이 있는데 비해 누가는 신발에 대해 언급하지 않는다.
(막 6:9 신만 신고 두 벌 옷도 입지 말라 하시고)
그러나 신고 있는 신발 외에 여분의 신발을 가지고 가지 못하였을 것은 자명한 일이다.
결국 이렇게 여행에 필요한 일체의 필수품도 가지지 말라고 하신 말씀은
제자들이 사도로서 하나님의 일을 함에 있어서
현실적 여건이나 물질에 의지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만 전적으로 의지하라는 신앙을 가르쳐주며,
동시에 사사로운 재산에 얽매이지 말고
모든 것을 포기하고 따르라는 예수의 정신과도 일치한다.
(18:18-27 어떤 관리가 물어 이르되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19)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
20) 네가 계명을 아나니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거짓 증언 하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였느니라
21) 여짜오되 이것은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키었나이다
22) 예수께서 이 말을 들으시고 이르시되 네게 아직도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네게 보화가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
23) 그 사람이 큰 부자이므로 이 말씀을 듣고 심히 근심하더라
24) 예수께서 그를 보시고 이르시되 재물이 있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25)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시니
26) 듣는 자들이 이르되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나이까
27) 이르시되 무릇 사람이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은 하실 수 있느니라).
22:35에 의하면 실제로 제자들은 아무것도 없이 전도하러 다녔지만
아무런 부족함이 없이 지냈음을 알 수 있다.
(22:35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를 전대와 배낭과 신발도 없이 보내었을 때에 부족한 것이 있더냐 이르되 없었나이다)
[눅 9:4] 어느 집에 들어가든지 거기서 머물다가 거기서 떠나라 - 여행 준비에 관한 말씀에 이어 이번에는 유숙(留宿)하는 방법을 일러주신다.
물론 아무 곳이나 들어가서 머물라는 말은 아니며
말씀을 받아들일 자세를 갖춘 사람에게 신세를 져야 할 것이다.
(마 10:11 어떤 성이나 마을에 들어가든지 그 중에 합당한 자를 찾아내어 너희가 떠나기까지 거기서 머물라).
그러나 한 번 숙소를 정했으면 그 마을을 떠날 때까지
그곳에 머물러 있어야지 불편한 점이나 만족스럽지 못한 대접을 받는다고 해서
더 좋은 곳을 찾아 여기저기를 전전해서는 안된다는 말이다.
‘주의 교훈집’으로 알려지고 있는 '디다케'(Dedache)에는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는 거짓 선지자들에 대한 경고가 있는데,
본문은 제자들이 거짓 선지자들처럼 먹고 마시고 입는 것을 탐하지 말고
주어진 여건에 만족하라는 의미로 이해된다.
[눅 9:5] 누구든지 너희를 영접하지 아니하거든 그 성에서 떠날 때에 너희 발에서 먼지를 떨어 버려 그들에게 증거를 삼으라 하시니
▶ 발에서 먼지를 떨어 버려 - 발에서 먼지를 떨어버리는 행위는 유대인들의 오랜 관습에서 유래했다.
유대인들은 이방 지역을 지나는 경우에 마을을 통과한 뒤 발의 먼지를 떨고
이스라엘의 지역에 들어가기 전에는 이방 지역에서 묻은 옷의 먼지를 떨어버리고
들어간다.
이는 유대인들의 성별(聖別) 의식에서 유래하는 것으로
부정한 것을 자신들의 땅으로 묻혀 들어오지 않으려는 의식적 행동이다.
한편 본문에서 주님이 이러한 행위를 지시하신 것은 다음과 같은 의미를 지닌다.
(1) 선민과 이방인의 진정한 구분은 메시지를 받아들이고 사도들을 영접하느냐의 여부에 달려있다.
(2) 더 나아가 발의 먼지를 떠는 행위는, 하나님 나라의 메시지를 거부한 곳에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리라는 사실에 대한 공적인 선언이자 증거가 된다.
(3) 하나님 나라의 메시지를 전파했을 때, 받아들여지지 않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미리 일러둠으로써 제자들이 그러한 상황에 처하게 되었을 때
낙담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참고로 행 13:50,51에 의하면
바울과 바나바가 비시디아 안디옥의 유대인 지역에서 주의 일을 하는 도중
유대인들로부터 방해를 당하였을 때도 이런 행동을 했었다.
(행 13:50-51 이에 유대인들이 경건한 귀부인들과 그 시내 유력자들을 선동하여 바울과 바나바를 박해하게 하여 그 지역에서 쫓아내니
51) 두 사람이 그들을 향하여 발의 티끌을 떨어 버리고 이고니온으로 가거늘)
[눅 9:6] 제자들이 나가 각 마을에 두루 다니며 곳곳에 복음을 전하며 병을 고치더라.
▶ 나가 각 마을에 - '나가'에는 제자들의 선교 활동이 계속적이고 반복적이었음을 의미한다.
한편 '마을'(코마스)이라는 단어에 대해서
그룬트만(Grundmann)같은 학자는 예수가 읍내들을 돌아다니신데 비해
제자들은 촌락들을 돌아다닌 것으로 설명하기도 하나,
8:1에 의하면 예수께서도 '성' 뿐만 아니라 '마을'에도 다니셨음을 알 수 있다.
(8:1 그 후에 예수께서 각 성과 마을에 두루 다니시며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시며 그 복음을 전하실새 열두 제자가 함께 하였고)
▶ 곳곳에 복음을 전하며 병을 고치더라 - '곳곳에'는 '그들이 가는 곳 어디서나'의 뜻으로, 제자들이 발길이 닿는 곳이면
어디에서나 복음을 전하고 병을 고치는 등,
예수의 사역을 열심히 대행하였음을 보여준다.
바야흐로 제자들을 통해서도 하나님 나라가 전파되고 실현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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