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10월 6일 수요일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그리하면 딸이 구원을 얻으리라 하시고

  

야이로의 딸과 나의 딸

 

누가복음 840-56예수께서 돌아오시매 무리가 환영하니 이는 다 기다렸음이러라

41) 이에 회당장인 야이로라 하는 사람이 와서 예수의 발 아래에 엎드려 자기 집에 오시기를 간구하니

42) 이는 자기에게 열두 살 된 외딸이 있어 죽어감이러라 예수께서 가실 때에 무리가 밀려들더라

43) 이에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는 중에 아무에게도 고침을 받지 못하던 여자가

44) 예수의 뒤로 와서 그의 옷 가에 손을 대니 혈루증이 즉시 그쳤더라

45)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게 손을 댄 자가 누구냐 하시니 다 아니라 할 때에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무리가 밀려들어 미나이다

46)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게 손을 댄 자가 있도다 이는 내게서 능력이 나간 줄 앎이로다 하신대

47) 여자가 스스로 숨기지 못할 줄 알고 떨며 나아와 엎드리어 그 손 댄 이유와 곧 나은 것을 모든 사람 앞에서 말하니

48) 예수께서 이르시되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하시더라

49) 아직 말씀하실 때에 회당장의 집에서 사람이 와서 말하되 당신의 딸이 죽었나이다 선생님을 더 괴롭게 하지 마소서 하거늘

50)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그리하면 딸이 구원을 얻으리라 하시고

51) 그 집에 이르러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와 아이의 부모 외에는 함께 들어가기를 허락하지 아니하시니라

52) 모든 사람이 아이를 위하여 울며 통곡하매 예수께서 이르시되 울지 말라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하시니

53) 그들이 그 죽은 것을 아는 고로 비웃더라

54) 예수께서 아이의 손을 잡고 불러 이르시되 아이야 일어나라 하시니

55) 그 영이 돌아와 아이가 곧 일어나거늘 예수께서 먹을 것을 주라 명하시니

56) 그 부모가 놀라는지라 예수께서 경고하사 이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 하시니라.

 

회당장 야이로는 사자를 예수께로 보내어,

죽음에 임박한 그 딸을 구해 주실 것을 청했다.

예수는 그 청을 받아들여, 야이로의 집으로 그 걸음을 옮기셨다.

 

그리고 도상(로상), 딸은 이미 죽었다는 소식에 접하여,

야이로가 낙담하는 것을 보시고, 그를 위하여 말씀하셨다.

두려워 말라. 다만 믿으라. 딸은 낳는다’(누가복음 8:50).

 

드디어 그 집에 이르러, 가인이 죽은 딸 때문에 울며 슬퍼하는 것을 보고,

말씀하셨다.

 

너희는 울지 말라. 그녀는 죽은 것 아니다. 잠 잘 뿐’(52일역)이라고.

 

그리고 방으로 들어가, 죽은 딸의 손을 잡고,

 

달리다굼, 딸아 일어나라’(마가복음 5:41참조)는 일성(一聲) 아래

 

딸을 다시 살리시어,

이를 야이로와 그 아내에게 주시었다.

부처의 환희는 어떠했으랴!

 

나는 일찍이 죽음에 임박한 딸이 치유되기를 예수께 청했다.

나는 나의 기원의 간절함에 있어서 야이로에 못하지 않다고 믿었다.

 

그리고 나의 기도의 결과로서, 나도 또 내 귀에

 

두려워하지 말라. 다만 믿으라. 딸은 나으리라는 음성을 들었다.

 

하지만, 나의 청은 마침내 응답되지 않았다.

나의 딸은 죽었다.

그녀는 잠든 것이 아니라, 참으로 죽었다.

달리다굼의 음성은, 내 딸 위해서는 발해지지 않았다.

 

여기서 큰 의문은 내 마음에 솟았다.

성서는 거짓을 말하는 것은 아닌가?

혹은 내게 신앙이 없는 건 아닌 가고.

 

그리고 불신의 세상은 나의 신앙을 웃었다.

박신(迫信)의 신자는 나의 신앙의 부족을 책했다.

 

그리하여 나는 몸의 안팎으로 공격받아,

나의 그 때의 입장은 아주 불쌍한 것이었다.

나는 마음속으로 은근히 탄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아 나는 그리스도교를 믿지 않았어야 할 것을이라고.

 

하지만 하나님의 영은 그때 강하게 내 심령에 역사()하셨다.

나는 마침내 나의 회의를 이길 수가 있었다.

 

예수는 역시 나의 소원을 들어주신 것이다.

내 딸도 또한 죽은 것이 아니라 잠들었을 뿐.

그러므로 나도 또한 두려워 할 것 없고, 다만 믿어야 할뿐이다.

 

다행히도 내 딸의 경우에 있어서,

그녀의 임종에 명백한 불사의 증거가 있었다.

 

이것은 확실히 나와 내 아내와의 박신을 돕기 위해

하나님께서 특히 내려주신 표징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가령 이 표징이 없었다 해도,

그녀가 죽지 않은 것은 확실하다.

그 증거는 어디에 있는가 하건대,

1로 예수 자신의 부활에 있다.

2로 그의 약속에 있다.

3으로 나의 신앙에 있다.

 

실로 증거를 하는 것은 셋이라’(요한15:8)이다.

 

(요한15:8 성령과 물과 피라 또한 이 셋은 합하여 하나이니라)

 

이 삼대증명이 있어서,

나는 나의 딸이 죽은 것이 아니라 단지 잠든 것임을 확실히 믿는 것이다.

야이로는 복된 사람이었다.

하지만 나는 야이로보다는 더 복된 사람이다.

야이로의 딸은 소생한데 지나지 않는다.

내 딸은 부활하는 것이다.

 

그리고 소생과 부활과의 사이에 커다란 상위(相違)가 있는 것이다.

 

소생은 낡은 육체의 중생이다.

부활은 새로운 영체의 부여이다.

 

전자는 다시 죽지 않을 수 없다.

후자는 또 죽는 일없는 것이다.

 

그리고 부활의 굳은 약속 받아

(하나님의 경우에 있어서는, 약속은 이에 참여한 자에게 주시는 권리이다),

소생의 은혜 같은 것은, 실은 어떠해도 좋은 것이다.

 

두려워 말라. 다만 믿으라’(50).

 

옳습니다,

주여, 나는 믿나이다,

당신은 반드시 당신에게 구한 기원을 물리치지 않으실 것을.

당신의 약속은, 천지가 변해도 변치 않으실 것을.

 

나는 특히 성령의 증거를 믿는다.

 

증거를 하는 이는 성령이시다. 영은 진실하심으로이다’(요한15:7)라고 있다.

 

하나님의 영은 나의 신앙을 확증하여 말씀하신다.

 

네 믿는 바는 진실하다. 예수는 네 딸도 고치실 것이다라고.

 

그리고 성령의 증거는 확실하다.

나는 이것을 믿고 내 딸의 전유 즉 부활을 대망 할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믿음으로서 나의 의심은 걷히고, 커다란 평화는 내 마음에 임했다.

실로 성서가 예수께서 행하신 기적 적 치유에 관한 기사를 기재하고 있음은,

사람이 이에 의해 모든 병을 그로 말미암아 치유될 것을 가르치기 위해서가 아니다.

 

예수는 육체의 의사로서 세상에 임하신 것은 아니다.

신생명의 공급자로서 나타나신 것이다.

 

그가 어떤 이신지,

그가 주시는 은혜는 어떤 것인지는,

이 세상에서는 잘 알지 못하는 것이다.

 

지상에서의 그의 생애는 일종의 비유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나사로의 부활, 야이로의 소생,

이는 모두 이와 비슷한 다른 대사실의 예조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모든 신자는 이 세상에 있어서 나사로처럼 부생(復生) 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리스도께서 다시 나타나시는 때,

모든 신자는 나사로보다도 훨씬 확실한 의미에 있어서 부활되는 것이다.

야이로의 딸의 경우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모든 신자의 딸은, 야이로의 딸처럼 부생되지 않는다.

하지만 이제 있을 축하할 부활의 아침에 있어서는

모든 신자의 딸은, 그들의 기도에 따라,

야이로의 딸보다도 훨씬 확실한 의미에 있어서 부활의 은혜에 참여하는 것이다.

 

이것을 가르쳐 주기 위한 복음서의 기사인 것이다.

 

이것을 깨닫지 못함으로서,

내 딸도 또 야이로의 딸처럼 소생할 것을 기구 한다.

 

천려(imprudence) 그저 없는 일이다.

실로 욥의 신앙이 모든 신자의 신앙이다.

나는 안다.

 

나를 구속하는 자는 살아 계신다.

후일에 그가 반드시 땅위에 떠나서 하나님을 보리라’(욥기19:25-26일역).

 

나는 안다이다.

단지 믿는다가 아니다.

이미 이룩된 일로서 안다이다.

 

내 속죄 자는 살아 계시는 것이다.

내 이 가죽, 이 몸은 썩어버린대도,

나는 이 육을 떠나서 내 구원의 하나님이신 그를 뵈옵게 될 것이라고.

 

실로 위대한 신앙이다.

그리고 참된 신자는,

자기에 대해서나, 또 자기의 사랑하는 자에 대해서나,

욥의 이 신앙을 가지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오늘이라 해도 우리의 간절한 청을 물리치지 않으신다.

그리고 우리의 청 그대로를 들어주시지 않는 경우에는,

이것 이상으로 들어주시는 것이다.

 

우리들의 기구를 들어주지 않는 듯이 보이시며,

우리들 안에 굳은 신앙을 일으켜주신다.

 

그리고 드디어 그 신앙에 응하여,

소생 이상의 은혜인 부활의 은혜로써 우리에게 갚아주신다.

세상의 소위 식자들은,

나의 이 말을 자신의 망상이라고 명하리라.

 

혹은 그럴지도 모른다.

하지만 신앙은 영혼의 확실한 실험(체험)이다.

이는 스스로 일으키고자하여 일으킬 수 없는 것이다.

 

철학의 말을 빌려서 한다면 이는 무엇보다도 확실한 자기의식의 확실한 실험이다.

그리고 이 실험 있기 까닭에,

크리스천은 그 사랑하는 자를 취해가신대서 하나님을 의심치 않는 것이다.

 

*내촌감삼의 (19176성서지연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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