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0월 11일 금요일

악에서 떠나 선을 행하고 화평을 구하여 이를 좇으라

  

그리스도신자의 행위

 

베드로전서 38-19: 마지막으로 말하노니 너희가 다 마음을 같이 하여 체휼하며 형제를 사랑하며 불쌍히 여기며 겸손하며

9)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이는 복을 유업으로 받게 하려 하심이라

10) 그러므로 생명을 사랑하고 좋은 날 보기를 원하는 자는 혀를 금하여 악한 말을 그치며 그 입술로 궤휼을 말하지 말고

11) 악에서 떠나 선을 행하고 화평을 구하여 이를 좇으라

12) 주의 눈은 의인을 향하시고 그의 귀는 저의 간구에 기울이시되 주의 낯은 악행하는 자들을 향하시느니라 하였느니라

13) 또 너희가 열심으로 선을 행하면 누가 너희를 해하리요

14) 그러나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면 복 있는 자니 저희의 두려워함을 두려워 말며 소동치 말고

15)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예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

16) 선한 양심을 가지라 이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너희의 선행을 욕하는 자들로 그 비방하는 일에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려 함이라

17) 선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진대 악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보다 나으니라

18) 그리스도께서도 한 번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으니

19) 저가 또한 영으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전파하시니라.

 

 

마지막으로, 내가 이것을 말하련다(8일역)

 

베드로는 당시 교회의 대부분을 차지한 노예가 어떻게 그 주인에게 쓰일 것인가,

또는 거의 노예 다음으로(노예처럼)취급된 부인이 어떻게 그 남편에게 쓰일 것인가,

동시에 남편 된 자가 아내를 어떻게 다룰가의 길을 말하여 오다가 최후에 이제 신자 전체의 행위에 대하여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런데 신자의 행위에는 두 방면이 있다.

 

신자 상호에 대한 것은 그 1이고, 신자에 대하여 언제나 적대의 태도로 나가는 불신자에 대하는 일은 그 2이다.

 

8절은 즉 전자에 관하며, 9절 이하가 후자에 관하여서의 교훈이다.

 

너희는, 모두 마음을 같이하고, 서로 이해하며, 형제 서로 사랑하고, 서로 불쌍히 여기며, 겸손하라. ’(8일역)

 

이는 신자 서로에 대해서 할 일이다. 말은 짧지만 의미는 아주 강한 것이 있다.

 

마음을 같이 하고이하, 내용은 모두 다섯 가지이다.

 

마음을 같이 하고

 

사상을 같이함은 아니다. 신자는 모두 동일한 신앙개조를 가져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옛날에는 잘못하여 그렇게 해석했기 때문에 하나님, 내세, 또는 영혼 등에 대하여 믿는 형식까지도 동일함을 필요한 것으로 생각했다.

 

로마 천주교회에서는 이에 중점을 두어, 종교상 결코 이설을 허용치 않고, 만약 이설을 주창하는 자 있으면 곧 이단이라고 하여 이것을 책했던 것이다.

 

그러나 마음을 같이 한다는 것은 사상을 같이 하는 것은 아니다. 신자는 그 사상에 있어서, 그 사고방식에 있어서 상이한 것은 어쩔 수 없다.

 

그 얼굴이 다름 같이 그 설이 다른 것은 하는 수 없다. 다만 그러면서, 마음은 이것을 같이 할 것이다.

 

마음이란 하나님께 대한 마음 즉 신앙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를 주로 우러르는 일이다.

 

특히 베드로가 중점을 둔 소망,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존귀와 영광을 얻을 부활의 희망이다.

 

환언하면, 이 세상에 있어서의 신앙과 장래(전도)의 소망이다.

 

이 두 가지는 이것을 같이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사상의 자유는 그 후에 오는 것이다.

 

만약 어느 사람의 소망이 이 세상에 매여 있다면, 마음에 커다란 상이가 있는 것이다.

 

오랜 동안의 신자인데도, 내세의 희망을 가지지 못한 사람이 있다. 이 세상에 있어서의 사업에만 치중하는 사람이 있다. 그것으로는 신자로서의 동정이 되지 않는다.

 

또 만약 그리스도를 주로 우러르는 외에 석가도 공자도 또 주라고 하는 사람이 있다면, 우리들은 그 사람과 깊은 의미에 있어서의 형제의 관계에 들어갈 수가 없는 것이다.

서로 이해하며오늘의 말로하면 동정이다.

 

신자 서로가 동정할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러나 동정에도 종류가 있다.

 

가난에 대한 동정이 있다. 죽음에 대한 동정이 있다.

보통 동정이라고 하면, 그러한 경우를 말한다.

물론 신자는 그러한 경우의 동정에 있어서도 세상 사람에게 뒤떨어질 것은 아니다.

 

하지만, 베드로가 여기서 말하는 동정이란, 일층 깊은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특별한 신앙과 소망을 함께 하기 때문에 특별한 고난이 임한다, 그 고난에 대한 특별한 동정을 말함이다.

 

신자 상호의 사이의 동정은 다만 만연하게 솟구쳐 오는 것은 아니다. 동정을 요구하기 전에, 그 고난이 무엇 때문에 임했는지를 알아야 할 것이다.

신자가 신자에게 동정을 구하는 이유는, 그 특별한 신앙과 특별한 소망을 함께 하는데 있다. 이 고난의 성질을 알 때, 특별한 깊은 동정이 솟구쳐 오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형제 서로 사랑하고

 

성서에는 사랑이라는 말이 둘 있다. 깊은 영적인 사랑과 정적인 사랑이다.

그리고 여기서. 서로 사랑한다는 말은, 그 후자이다.

 

신자는 신앙과 희망을 함께하는 까닭에, 서로에 대하여 마음 속 깊은데 영적인 사랑 가짐은 당연하다고 하여, 자주 게으르기 쉬운 것은, 이 세상일에 대하여 서로 사랑하는 일이다.

외측의 일에 대해서는 너무 많은 것을 요구할 것 아니라는 것은, 신자가 왕왕 빠지기 쉬운 잘못된 생각이다.

 

크리스천은 그 같은 신앙과 소망 때문에 이 세상에서 많은 고난을 받는 것이므로, 이 세상의 일이라 해도 서로 동정하며 서로 돕지 않으면 안 된다.

 

여기서 서로 사랑하고, 결국 서로 돕는다고 함과 같은 의미에 귀착한다.

 

서로 불쌍히 여기며

 

이 역어는 조금 지나치게 가벼운 듯하다. 오히려 이해(동정)한다는 자를 여기에다 쓰는 편이 옳다.

 

이것은 마음의 깊은 곳에서 오는 동정이다. 히브리인의 생각으로는 사람의 친절한 정은 비창(spleen)에서 온다고 생각했다(서로 불쌍히 여김의 원어 eusplanchnosSplanchna 비장에서 난 것).

 

즉 보통으로 심장에서 오는 것으로 생각함보다는 일층 깊은 생각이다.

이 비장(지라)에서 나온 이해로서 서로 동정하라고 한다. 그 어떠한 정도의 동정인지는, 말만으로 설명할 수는 없다.

 

그러나 우리들은 실제에 있어서 아는 것이다.

 

머리(() head)로서가 아니라, 마음(() heart)로서가 아니라, 보다 깊은 사랑으로서 사랑하여 주는 자가 있는 때, 이것이 즉 비장에서 나온 동정임을 느끼는 것이다.

 

베드로가 이 글을 쓴 무렵, 로마제국에 행해진 주요한 도덕은, 이른바 스토아파의 도덕으로서, 일본의 무사도 같이, 강하고 든든한 일관된 것이었다.

 

무사도에는 무사의 정이라는 것도 있으나, 스토아파의 도덕에 있어서, 비장에서 나오는 동정 같은 것은, 너무도 온화하여 일종의 약점(결점)같이 생각되어, 남자에게는 바랄 것 못 되는 정도의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홀로 크리스천은 종시 이것을 고창했던 것이다.

 

겸손

 

달리 적당한 글자가 없으므로, 이러한 말을 쓰고 있대도, 크리스천이 말하는 겸손이 보통의 겸손과 크게 그 성질을 달리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는 일이다.

 

이른 바 사양한다든가, 사람 앞에서 주제 넘게 않는다든가는 겸손은 아니다.

 

그 가장 좋은 설명은 요한복음 13장의, 그리스도가 최후의 만찬 때, 수건을 허리에 두르시고서 제자의 발을 씻으신 일이다.

 

나는 너희의 선생 또는 주인데, 그래도 너희의 발을 씻는다’(일역)

 

이는, 너희가 거룩해져 천국에 들어갈 표직이므로 너희도 또한 서로 발을 씻도록 하라고 가르치셨다.

 

이것이 신자 서로의 태도가 아니어서는 안 된다.

서로의 발을 씻는 일을, 의무뿐 아니라 명예로 생각하는 일, 즉 높은데 처하지 않고서 낮은데 처하는 일, 환언하면, 서로 종으로 되는 일, 그것이 신자의 겸손이다.

 

이같이, 신자는 모두 그 신앙과 소망을 함께 하고, 박해에 대한 특별한 동정을 주고받으며, 이 세상의 일에 대해서도 서로 돕고, 깊은 이해를 하며 그리하여 서로의 종이 되라고.

이는 신자 상호의 태도에 관한 베드로의 교훈이다.

 

신자에 대하여 악의로서 하는 불신자에 대하여, 신자는 어떠한 태도로 나갈 것인가?

이는 베드로전서 39절 이하의 말이다.

 

악으로서 악을 갚지 말라. 욕으로서 욕을 갚지 말라. 도리어 그런 사람 위해 축복하라. 그것은 너희가 부르심을 받은 것도 복을 이어 받기 위해서이다’(9일역)

 

이란 그리스도의 구원에 참여함의 복(축복)이다.

 

그리스도, 죄를 제하기 위해 오시고, 우리도 부르심을 입어 이 구원에 참여할 수 있었으므로, 우리에게 악의로서 하는 자 위해서도, 또 한 가지로 그가 그리스도에 의해 구원되기를 기도하라는 것이다.

 

대저, 생명을 사랑하고 좋은 날 보내려고 생각하는 자는 혀를 제어하여 악을 말치 않고, 입술을 다물어 거짓말을 하지 말라. 악을 피하고 선을 행하며, 화목을 구하여 이를 추구하라. 그것은 주의 눈은 의로운 사람 위에 머무르시고, 그 귀는 의로운 사람의 기도에 기울이시며, 주의 얼굴은 악을 행하는 자에게 향하여 노하시기 때문이다’(10-12)

 

시편 34편의 인용이다.

 

생명을 사랑하고 선한 날을 보내려는 자란, 이것을 베드로의 말로서, 내세 영생의 일을 말하는 것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으나, 그러나 아무 주해를 가하는 일 없이 시편의 문구 그대로 써 내려간 것을 보면 역시 이 세상의 일생을 행복하게 보내려고 생각하는 자의 의미리라.

 

즉 베드로는 여기서, 행복의 생애의 비결은 무엇이냐고 하는 것이다.

 

오늘도 같은 물음에 대하여 허다한 대답이 제출된다.

왈 검약, 왈 건강, 왈 무어 무어라고.

 

그러나 베드로의 대답은 절로 다르다. 그는 말한다.

 

악을 말하지 말라. 화목을 구하라. 이는 그 비결이다라고.

 

그리고 여기에 특별한 진리가 있음은, 오랜 경험을 쌓은 자가 아는 바이다.

 

사람은 끊임없이 평화를 사모하여 구하고, 타인에 대하는데 언제나 선의로서 하여, 단지 내세를 이어받음의 준비를 하고 있을 뿐 아니라, 또 현세를 가장 행복하게 보내고 있는 것이다.

 

너희가, 만약 선을 행하는데 열심이라면, 누가 너희를 헤치랴?’(3일역)

 

대체에 있어서 그대로이다. 그러나 또 어떤 경우에는 그렇지가 않다.

도리어 선을 행하는데 열심인 때 종종 최대의 박해가 갑자기 찾아온다.

그리스도의 고난이 그러했다. 바울, 베드로의 간난 역시 또 그러했다.

 

그러므로 그 경우에는 어떻게 할 것인가? 즉 말한다.

 

하지만, 가령 의로운 일 위해 고난을 받으면 너희는 복 있는 자이다. 사람이 너희를 협박하는 위협을 두려워 말라. 또 근심하지 말라. 너희는, 마음속에 주되신 그리스도를 높이라’(14-15일역)

 

높이라함은 경외하라와 한 가지이다.

 

불신자 속에 있어서 온갖 박해를 받는 때, 사람의 낯(얼굴)을 보지 말라. 다만 그리스도의 얼굴을 보라. 두려워(경외)할 분은 그뿐이라고.

 

또 너희 속에 있는 소망의 이유를 묻는 사람에게는, 유화(온유)와 두려워(송구)하는 마음으로서 대답할 일을 언제나 갖추라’(15일역)

 

소망

 

신앙이다.

불신자에게서 신앙의 이유를 질문 받을 것인가? 유화와 두려움으로서 대답할 준비를 하라고.

성서연구의 목적의 하나는 여기에 있다.

 

특히 불신자가 우리에게 묻는 것은, 반드시 일종의 멸시로서 하는 까닭에 유화로써 대답함의 준비는 특히 필요하다.

또 동시에 불신자를 설복할 수 없대도, 잘못된 것으로 하지 않으려는 두려움이 없어서는 안 된다.

 

그리고 우리들의 신앙이 결코 꿈 이야기나 미신이 아니라, 깊은 진리인 것을 대답할 수 있기 위해, 오랜 동안의 주의 깊은 연구를 요하는 것이다.

 

또 대답할 대는 선한 양심에 따르도록 하라’(18일역)

 

선한 양심이란, 이상한 말이다.

 

이는 필경 베드로전서 독특의 말이다. 참조 : (21 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침례라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오직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것이라).

 

사람은 양심에 따라서 하는 일을 모두 선한 일로 생각한다.

그러나 세상에 완고한 자로서, 잘못된 양심에 따르는 사람들이 있다.

 

그리스도에게 잡히기 전의 바울이 그것이었다. 그러한 사람은 자기의 행위의 악함을 자각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양심 반드시 옳지 않다.

 

다만 그리스도로 화해진 선한 양심, 즉 그리스도의 양심에 따라서 비로소 그르치지 않을 수 있는 것이다.

 

이는, 너희를 악을 행하는 자라 헐뜯고, 너희가 그리스도 안에서 행하는 선한 행위를 비난하는 자가 스스로 부끄러워하기 위해서이다. 만약 너희가 선을 행함으로서 고난을 받는 것, 하나님의 뜻이라면, 악을 행함에 의해 고난을 받는 것보다 낫다. 그리스도 한 번 죄로 말미암아 고난을 받으셨다. 의로운 이가 불의한 자 위해서이다. 이는 우리를 인도하여 하나님께 이르게 하시렴에서이다. 그는 그 육체는 죽임 당하고, 그 영은 살리신 바 되었다’(16-18)

 

악의로서 우리에게 대하는 불신자에게 도리어 선의로서 갚는 것은, 마치 믿지 않는 남편이 그 아내의 행위로 말미암아 따르듯, 가혹한 주인이 그 노예의 인내에 의해 인도되듯,

 

불신자도 또한 우리들의 유화한 태도에 자괴(sense of shame)하여, 그것이 동기가 되어 마침내 하나님을 높이기에 이르도록 하렴에서이다.

 

그리스도, 적을 위해 고난을 받고, 육체는 죽임 당했으나 영에 의해 우리를 구원 하셨듯, 우리들도 또 영에 의해 사람을 구원으로 인도할 것이다.

 

19절은 난해의 어구로서, 이것 때문에 허다한 논전이 행해졌다.

 

저 로마 천주교회의 이른 바 연옥설은 여기서 나온 것이다. 그러나 베드로가 말하고자 한 것은 그런 것이 아니다.

육은 죽임당한대도 영은 산다는 것으로서 영으로서, 사람을 구원에 인도할 것을 역설하고 있는 것이다.

 

나를 증오하고 괴롭히는 사람에 대하여 오로지 유화(온유)와 외구(awe)로서 접할 것인가?

가령 그가 나를 죽이기에 이른대도 내 영이 마침내 그를 구원하기에 이른다.

그러므로 악으로서 악에 갚지 말라고. 이는 베드로의 말로서, 실로 깊은 교훈이다.

 

악에 갚는데 악으로 하면, 일시의 쾌감을 얻어지지 않는 것 아니나, 그러나 그것 때문에 누구도 구원되지 않는다. 이는 육을 살리고 영을 죽이는 일이다.

 

이에 반하여, 모멸과 박해를 복종하고 더욱 더 깊이 그리스도에 의한 사랑으로서 참음은, 이는 육을 죽이고 영을 살리는 일이다. 크리스천이 쓸 무기는 이것이다.

 

이것은 신앙의 사실이랄지, 천연의 법칙이랄지, 실로 현저(특이)한 교훈인 것으로서, 그리스도교가 가르치는 특별한 진리이다. 이것 요컨대 어디까지나 사랑이다.

 

신자에 대해서는 사랑, 불신자에 대해서도 또한 사랑이다. 사랑으로서 종시하라. 이는 그리스도 신자의 행위라고 베드로가 가르치는 바는 필경 이것으로 그치는 것이다.

 

* 내촌감삼의 (19162-3성서지연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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