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0월 21일 월요일

그리스도 안에 있는 너희 모든 이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초대신자의 교제

 

베드로전서 512-14: 내가 신실한 형제로 아는 실루아노로 말미암아 너희에게 간단히 써서 권하고 이것이 하나님의 참된 은혜임을 증거하노니 너희는 이 은혜에 굳게 서라

13) 함께 택하심을 받은 바벨론에 있는 교회가 너희에게 문안하고 내 아들 마가도 그리하느니라

14) 너희는 사랑의 입맞춤으로 피차 문안하라 그리스도 안에 있는 너희 모든 이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개역한글)

 

 

내가 생각하기는, 실루아노는 충신(신실)한 형제이다’(12절 일역)

 

충신충실이다. ‘형제너희들의 형제이다.

 

나는, 간단한 글(편지)을 그에게 부탁하여, 너희에게 써 보내 권면을 하고’(12일역)

 

당시는 물론 우편이라는 것은 없었다. 그러므로 편지를 보내는 가장 좋은 방법은, 이것을 친구에게 부탁하는 일이었다.

 

오늘이야말로 각종의 통신기관 발달하여 문통은 아주 경편해 졌기 때문에, 친구 위해 쓰는 시간은 적고, 그 생각도 또한 자연히 가벼워져 왔다 해도, 한 통의 편지를 보내는 것도 쉽지 않아, 가끔 친구의 여행 떠나는 것을 기회로 이것을 맡기는 길 외에 없었던 그 시대에 쓴 편지라고 생각하면, 특히 진심이 담겨 졌으리라는 것을 상상하기에 족한 것이다.

 

권면, 위로 또는 교훈 등의 의미를 포함하는 말이다.

 

또 너희가 선 바의 은혜는 곧 하나님의 참된 은혜임을 증거 했다’(12일역)

 

너희의 신앙이 그 근본에 있어서 참된 신앙임을 증거했다는 것이다.

종종 우리들이 친구 또는 선배에게서 배우고 싶어 하는 것은 이것이다.

오늘까지 지켜온 하나님의 은혜가 참된 은혜임이 보증되어, 신자의 힘은 배가되는 것이다.

 

옛 친구가 아무 말 없이, 다만 네가 한 일은 대체에 있어서 참되다고 증거하여 주는 때, 우리들의 용기는 일층 분기되는 것이다.

 

베드로의 이 한마디 때문에 소아시아에 산재하는 신자가 얼마나 위로되었는지는 상상하기에 어렵지 않다. 실로 귀한 일언이다.

 

바벨론에 있는 바, 너희와 함께 택함 받은 교회, 너희에게 문안한다. 또 내 아들 마가도 너희에게 문안한다’(13일역)

 

1절은 아무것도 아닌 듯이 보이나, 실은 그렇지가 않다.

 

여기에 성서 연구자가 지나쳐 버려서는 안 될 문자가 있다.

 

나는 일찍이 베드로의 교회관을 말하여,

 

베드로전서 중에는 교회라는 문자조차 발견되지 않는다고 했는데, 여기에 분명히 교회라는 문자가 있다.

 

그러므로 교회에 관하여 나와 주의를 달리하는 자는, 혹은 이것을 끌어다가 나를 책할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책임은 내게 있지 않고 역자에게 있다.

 

여기에 바벨론에 있는 교회라고 역된 말은,

 

구 영역성서에도 the church at Babylon이라 있는데,

개정영역에는 she in Babylon으로 개역되었다.

 

이는 원문대로 개역한 것이다.

원문의 700유역의 사본 중, 이것을 교회로 역한 것은 다만 하나밖에 없다.

즉 교회는 여성의 대명사를 가지고 표시하므로, 오해한 것에 틀림이 없다.

 

베드로가 말한 바는,

 

바벨론에 있는 너희들과 함께 택함 받은 그녀이다.

 

그렇다면 그녀(She)란 무엇인가?

그것은 베드로의 생애에서 생각하면 절로 명백하다. 즉 그의 아내이다.

 

베드로가 결혼한 사람으로서 아내와 함께 있었음은 신약성서 중 2, 3회의 기사에 의해 알 수가 있다.

 

(8:14 예수께서 베드로의 집에 들어가사 그의 장모가 열병으로 앓아 누운 것을 보시고;

 

고전 9:5 우리가 다른 사도들과 주의 형제들과 게바와 같이 자매 된 아내를 데리고 다닐 권이 없겠느냐).

 

그는 그 전도에도 아내를 데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너희와 함께 택함 받고, 너희가 잘 아는 그녀라고 하여 그 누구인지는 자연히 알 수 있는 것이다.

 

또 그 바로 다음에, 내 아들 마가라 하고 있다.

 

마가란 과연 베드로의 아들인가?

혹은 바울을 도와 함께 전도에 종사한 마가의 일인가?

반드시 분명치는 않다.

 

신앙의 제자를 아들이라 부르는 것은 흔히 있는 일이므로, 아마도 그 후자이리라.

 

(딤전 1:2 믿음 안에서 참 아들 된 디모데에게 편지하노니 하나님 아버지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로부터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네게 있을지어다),

 

어떻든 그녀라 하고, ‘내 아들이라 하며, 그리고 함께 너희에게 문안한다고 하여 잘 그 의미가 통하는 것이다.

마가는 본래 베드로의 제자인데 중도에 일시 바울을 따라 전도에 나섰던 일이 있다.

 

실루아노를 말한다면, 바로 이는 바울 특애의 제자의 한 사람이다.

바울의 서간 중 그의 이름을 보는 일은 한 두 번으로 그치지 않는다.

(데살로니가 전후서, 고린도후서 등. 때로는 약하여 실라라고 한다).

 

이 당년(이해)의 바울의 양제자가 서로 손잡고 여기서 베드로를 돕고 있는 것은, 얼마나 유쾌한 이야기인가?

 

베드로와 바울, 그들이 일찍이 복음위해 다툰 일이 있었다.

 

그리고 이제는 그 한편의 애제자는 곧 다른 쪽의 친구이다.

 

마가와 실루아노, 그가 뜻밖에 바울의 노를 사서 결별(bid farewel)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때에 대신 택한 자가 이 사람이다.

 

그리고 지금은 서로 친한 형제이다.

 

한 때의 다툼은 영구한 우정을 갈라놓을 수가 없었다. 그리스도 안에서 맺어진 자는 언제나 이것이다.

 

그들이라 해도, 그 신앙을 지키기 위해 때로는 다투지 않을 수 없다.

책하지 않을 수 없다. 헤어지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드디어 또 때가 온다.

본래의 친한 형제로 돌아가지 않으면 안 될 때가 온다.

이는 그 사상에 있어서 또는 주의에 있어서 싸운대도, 그 의거하여 선 바의 근본에 있어서 헤어질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 마음 속(깊은 밑)에 있어서 사모하는 바의 것이 동일하기 때문이다.

실로 영구한 친구(벗 우원 friends)를 맺는 비결은 다른 것이 아니다.

 

서로가 더욱 더 깊이 그리스도를 아는 일, 이것이다. 이것 외에 달리 없는 것이다.

 

너희도 사랑의 입맞춤으로서, 서로 문안하라’(14일역)

 

입 맞추라고 하면 우리 일본인에게는 어쩐지 언짢은 일 같이 들려, 성서 중에 그러한 문자가 있는 것 마저 불쾌하게 느껴지는 것이다.

 

그러나 성서 중에 이 말은 그렇게 적지 않다.

바울의 서간에 특히 많이 있다.

 

(16;16 너희가 거룩하게 입맞춤으로 서로 문안하라 그리스도의 모든 교회가 다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

 

고전 16:20 모든 형제도 너희에게 문안하니 너희는 거룩하게 입맞춤으로 서로 문안하라;

 

살전 5:26 거룩하게 입맞춤으로 모든 형제에게 문안하라).

 

그는 언제나 그저 입맞춤을 이야기하지 않고 거룩한(정결한) 입맞춤이라고 한다.

 

옳다, 거룩한 입맞춤이다. 입맞춤을 단지 예의로 보는 것은 아무런 의미도 없을 뿐 아니라, 도리어 그 남용의 위험이 있다.

 

때로 위선의 입맞춤이 행해지는 사실이 있다.

 

(26:49 곧 예수께 나아와 랍비여 안녕하시옵니까 하고 입을 맞추니).

 

그러나 초대신자의 사이에 주고받는 거룩한 입맞춤은 단순한 예의가 아니다. 참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맺어진 자가 얼마나 가까운 사이인지를 보여주는 하나의 표였다.

 

서로 보고, 다만 안녕하십니까로는 부족하다.

그것 이상의 거룩한 사랑의 인사(문안)가 입맞춤으로 되어 나타난 것이다.

 

원하기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너희 모두에게 평강이 있기를. 아멘’(14일역)

 

평강은 히브리의 (살롬 salom)이다. (10381 평화 역주)

 

이는 실로 의미심장한 특별한 말이다.

 

평화라는 것보다도 더 깊은, 일언으로서 하면 조화인 것으로서, 즉 모두가 순조로 되어 가는 일이다.

 

하나님과 우리의 마음이 화해되고, 사람과 우리의 마음이 화해되며, 하나님과 사람에 대하여 아무런 원한도 품지 않는 그 은혜를 일컬어 salom이라고 하는 것이다.

 

바울이 이른 바 사람의 모든 생각에 지나는 평강이다.

 

너희 모두에게 그 평강이 있을지어다라고 하여, 이미 이것 이상의 것을 바랄 수는 없다.

 

건강도 소망스럽다. 번영도 소망스럽지 않은 것 아니다. 하지만 그러한 것보다는 더 이상으로 어떠한 폭풍우가 불어도 혼란되는 일없는 영구한 정숙, 그것이 소망스러운 것이다.

 

물론 고통도 있다. 근심도 있다.

 

그러나 산간의 깊은 호수처럼, 파란(波瀾)은 표면에 설레 인데도, 밑에는 모두 이러한 것을 고치기에 족한 한없는 평강을 가득히 할 수 있는 것,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형제의 특권이다.

 

그에 의하지 않고서 소위 안심을 얻을 수는 있을지 몰라도, 이 깊은 평강을 맛볼 수는 없다.

 

예수를 사람에게 소개하는 목적은, 이것을 얻게 하려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기타의 것은 모두 이 세상에 두고서 가는 것이다.

 

다만 이것만이 천국에 있어서 재회하는 때의 선물로 되는 것이다.

베드로의 전도도 바울의 전도도, 결국 이로 그친다.

 

그러므로 베드로전서라 하고, 바울의 서간이라 하는 것, 모두 최후의 소망을 여기에 관련시켜 붓을 놓고 있는 것이다(필기(()).

 

내촌감삼의 (19163성서지연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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