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적 성장의 요청
[성도의 윤리적 삶]
성 경: [벧후 1:3-11] 그의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으니 이는 자기의 영광과 덕으로써 우리를 부르신 자를 앎으로 말미암음이라
4)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로 정욕을 인하여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으니
5) 이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6)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7)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공급하라
[벧후1:3] 그의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으니 이는 자기의 영광과 덕으로써 우리를 부르신 자를 앎으로 말미암음이라
▶ 그의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으니 - '신기한 능력'은 전능하신 하나님의 신적인 능력을 말한다.
(수 22:22 전능하신 자 하나님 여호와, 전능하신 자 하나님 여호와께서 아시나니 이스라엘도 장차 알리라 이 일이 만일 여호와께 패역함이거나 범죄함이거든 주는 오늘날 우리를 구원치 마시옵소서;
시 50:1 전능하신 자 하나님 여호와께서 말씀하사 해 돋는 데서부터 지는 데까지 세상을 부르셨도다;
사 9:6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겔 10:5 그룹들의 날개 소리는 바깥 뜰까지 들리는데 전능하신 하나님의 말씀하시는 음성 같더라).
그러나 '테스 데이아스 뒤나메오스'를 수식하는 '그의'가 가장 가깝게 언급된 것이 '그리스도'이며 1절에서 '우리 하나님'이란 칭호가 그리스도에게 사용된 것으로 보아 본문은 '그리스도의 신적인 능력'으로 보는 것이 타당한 듯하다. (Green, Bauckham, Bigg).
본문은 그리스도께서 제2위격이신 하나님으로서 하나님과 같은 신기한 능력을 소유하셨다는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 자신의 능력을 공유한 자이심을 시사한다.
(Fornberg, Bauckham).
한편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신적인 능력을 통해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받게 된다.
'생명'은 인간들이 새로운 피조물이 될 수 있는 원동력, 즉 예수께서 공급하시는 힘을 의미하는 것으로 '영생'을 암시한다.
(요 1:4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요일 5:11-12 또 증거는 이것이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것이니라
12)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
또한 '경건'은 변화된 자가 지니게 되는 하나님과의 새로운 관계성을 의미하는 것으로,
(행 3:12 베드로가 이것을 보고 백성에게 말하되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일을 왜 기이히 여기느냐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
딤후 3:5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니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하나님의 뜻을 존중하고 순종함으로 누리게 되는 도덕적인 생활을 시사한다.
▶ 이는 자기의 영광과 덕으로써 우리를 부르신 자를 앎으로 말미암음이라 - '영광과 덕'의 헬라어 '독세 카이 아레테'는 신적인 능력의 현시로서 구약에서는 하나님께 속한 것이나
(LXX 사 42:8 나는 여호와니 이는 내 이름이라 나는 내 영광을 다른 자에게, 내 찬송을 우상에게 주지 아니하리라,
12 여호와께 영광을 돌리며 섬들 중에서 그의 찬송을 선전할지어다)
본절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속한 것으로 나타난다.
그리스도는 자신의 '영광과 덕'을 통해서 사람들을 변화시키며 회개토록 역사하신다.(Blum).
한편 본서에서는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을 강조하므로,
(8절 이런 것이 너희에게 있어 흡족한즉 너희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에 게으르지 않고 열매 없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니와;
2:20 만일 저희가 우리 주 되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앎으로 세상의 더러움을 피한 후에 다시 그 중에 얽매이고 지면 그 나중 형편이 처음보다 더 심하리니)
'부르신 자'는 하나님이라기보다는 그리스도를 가리킨다고 봄이 타당하다.
[벧후 1:4]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로 정욕을 인하여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으니
▶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 이 약속은 그리스도의 영광과 덕으로 말미암아 주어진 것으로 그리스도인들이 미래의 일들 즉,
그리스도의 재림,
(3:4 가로되 주의 강림하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뇨 조상들이 잔 후로부터 만물이 처음 창조할 때와 같이 그냥 있다 하니,
9 주의 약속은 어떤 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12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그 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새 하늘과 땅,
(3:13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의 거하는 바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영원한 나라(11절)에 참여케 되는 것을 가리킨다.
(11절 이같이 하면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나라에 들어감을 넉넉히 너희에게 주시리라)
▶ 너희로 정욕을 인하여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 '피하여'의 헬라어 '아포퓌곤테스'는 부정 과거 분사로서 '피한 이래로'라는 의미이다.(Bigg, Blum).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침례를 받은 후부터 죄와 정욕과 거리가 멀어지며 피하게 된다.
▶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으니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게네스데데이아스 코이노노이 퓌세오스'에서 헬라어 '데이아스'('신에게 속한')는 성경적 용어라기보다는 헬라 사상에 따른 이교적 표현이다. (Richardson).
베드로는 이 단어를 의도적으로 사용하여 그의 논쟁을 전개시키고 있다.(Kasemann).
그러나 본문은 이교도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인간의 내면에 본래부터 신과 같은 거룩한 성품이 있어서 이것을 잘 계발하면 성인(聖人)이 되고 거스리게 되면 악인(惡人)이 된다는 사상을 시사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와의 참된 연합을 통해서 성령의 교제로 신의 성품에 참예하게 됨을 시사한다.(Bigg, Green).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으로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나게 되고,
(고후 5: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참된 영적 교제를 나누며,
(요 14:16-17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17) 저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저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저를 아나니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26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
장차 나타날 영광과 축복에 참여하게 된다.
(롬 8:18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벧후 1:5-7] 이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6)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7)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공급하라
▶ 이러므로 - 이는 문자적으로,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for this very reason)라는 의미로 3,4절 전체를 받는다. (Bauckham).
▶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6)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7)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공급하라 - 그리스도인들은 믿음을 통해서 얻은 구원으로만 만족해서는 안 된다.
그래서 베드로는 그리스도께서 성도들의 거룩한 삶을 추구하는데 필요한 모든 영적 자원을 주셨으므로 그리스도인들이 그 자원을 바탕으로 자발적으로 성숙을 향하여 진보해 가야함을 권면한다.
'공급하라'의 헬라어는 무대 공연비용을 지불하는 사람을 가리켜 사용된 것으로 풍부하게 공급하고 지원하라는 의미이다. (Green, Blum).
▶ 믿음에 덕을 - '믿음'은 전적인 하나님의 선물로서,
(엡 2:8-9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9)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응답이다. 그리스도인은 믿음을 통해서 구원을 얻게 되며 세상과 썩어질 것을 피하고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하게 된다.
(4절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로 정욕을 인하여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으니)
따라서 이 '믿음'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밑바탕이 된다.
(롬 5:1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
히 11:1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유 1:20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는 너희의 지극히 거룩한 믿음 위에 자기를 건축하며 성령으로 기도하며).
베드로는 이 '믿음'에 '덕'을 공급하라고 권면한다.
'덕'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레텐'은 '디카이오쉬네'('의')와 동일한 것으로 도덕적인 탁월성을 의미한다. (Bauckham,Green).
이것은 그리스도 자신의 덕을 말하는 것으로,
(3절 그의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으니 이는 자기의 영광과 덕으로써 우리를 부르신 자를 앎으로 말미암음이라)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를 닮음으로 도덕적 탁월성을 배울 수 있음을 시사한다.
(빌 4:8 종말로 형제들아 무엇에든지 참되며 무엇에든지 경건하며 무엇에든지 옳으며 무엇에든지 정결하며 무엇에든지 사랑할 만하며 무엇에든지 칭찬할 만하며 무슨 덕이 있든지 무슨 기림이 있든지 이것들을 생각하라;
벧전 2:9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 덕에 지식을 - '지식'은 기독교인이 덕있는 생활을 하며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는데 필요한 '지혜' 또는 '통찰력'을 말한다.
(롬 15:14 내 형제들아 너희가 스스로 선함이 가득하고 모든 지식이 차서 능히 서로 권하는 자임을 나도 확신하노라;
고전 13:2 내가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벧전 3:7 남편된 자들아 이와 같이 지식을 따라 너희 아내와 동거하고 저는 더 연약한 그릇이요 또 생명의 은혜를 유업으로 함께 받을 자로 알아 귀히 여기라 이는 너희 기도가 막히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라)
▶ 지식에 절제를 - '절제'는 고대 그리스 사상과 헬레니즘의 철학적 윤리학에서 높이 평가되는 덕목이다.
신약성경에서 절제는 육체적 욕망의 지나친 방종과 이방 세계의 성적 남용(濫用)에 반대되는 의미로 사용되었으며 성령의 역사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성령의 열매에 속한다.
(갈 5:23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 절제에 인내를 - '인내'는 하나님을 신뢰하고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되리라고 소망하는 가운데 고난과 악에 대항하여 용기있게 지속적으로 참는 것을 가리킨다. (Bauckham).
이것은 믿음을 지속하는 능력이며 세상 체계의 압박에 저항하는 능력으로,
(눅 8:15 좋은 땅에 있다는 것은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하는 자니라;
롬 5:3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히 12:2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환난에 직면해서도 그것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견디어서 끝내 승리를 쟁취하는 것이다.
▶ 인내에 경건을 - '경건'은 삶속에서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며 헌신하여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하는 것을 가리킨다.
특별히 초기 기독교에서는 이 말을 하나님의 뜻에 대한 존경과 하나님의 뜻에 부합되는 도덕적 생활방법을 나타낼 때 사용하였다.
▶ 경건에 형제 우애를 - '형제 우애'는 베드로전서에서도 이미 언급되었으며,
(벧전 1:22 너희가 진리를 순종함으로 너희 영혼을 깨끗하게 하여 거짓이 없이 형제를 사랑하기에 이르렀으니 마음으로 뜨겁게 피차 사랑하라;
3:8 마지막으로 말하노니 너희가 다 마음을 같이 하여 체휼하며 형제를 사랑하며 불쌍히 여기며 겸손하며)
또한 신약성경에서도 중요하게 다루어진 덕목이다.
(롬 12:10 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며;
살전 4:9 형제 사랑에 관하여는 너희에게 쓸 것이 없음은 너희가 친히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받아 서로 사랑함이라;
히 13:1 형제 사랑하기를 계속하고;
요일 5:1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마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니 또한 내신 이를 사랑하는 자마다 그에게 난 자를 사랑하느니라).
이방 세계에서는 이 단어가 혈육을 나눈 가족간의 사랑을 나타낼 때 사용되었으나 초대교회에서는 믿음 안에서 한 형제와 자매가 된 그리스도인들의 교제를 나타낼 때 사용되었다. (Bauckham).
▶ 형제 우애에 사랑을 - '믿음'으로 시작된 그리스도인의 덕목이 '사랑'으로 완성된다.
'사랑'은 모든 덕목들 가운데 으뜸이며(고전 13장),
사랑의 본체인 하나님께서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 세상에 보여주신 것으로 남을 위하여 자기 자신을 희생하는 행동을 의미하며, 하나님께서 우리 속에 이루고자 하시는 것이다.
(요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롬 5:5 소망이 부끄럽게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
요일 3:16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4:8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이와 같은 덕목들은 신의 성품에 참예한 자들이 맺어야 하는 열매로서 바울이 언급한,
'성령의 열매'(갈 5:22,23)와
'하나님의 사람'(딤전 6:11)이 갖추어야 할 덕목과 내용이 유사하다.
위의 모든 덕목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점진적으로 얻을 수 있으며, 각 덕목은 다른 덕목들과 상호 관계 속에서 생성되며 발전된다.
이러한 덕목들은 서로 조화를 이루어야 하며 사랑으로 완성되어가야 한다.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