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0월 15일 화요일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

  

성도들의 새 생활

 

성 경: [벧전 4:1-11] 그리스도께서 이미 육체에 고난을 받으셨으니 너희도 같은 마음으로 갑옷을 삼으라 이는 육체의 고난을 받은 자가 죄를 그쳤음이니

2) 그 후로는 다시 사람의 정욕을 좇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좇아 육체의 남은 때를 살게 하려 함이라

3) 너희가 음란과 정욕과 술취함과 방탕과 연락과 무법한 우상 숭배를 하여 이방인의 뜻을 좇아 행한 것이 지나간 때가 족하도다

4) 이러므로 너희가 저희와 함께 그런 극한 방탕에 달음질하지 아니하는 것을 저희가 이상히 여겨 비방하나

5) 저희가 산 자와 죽은 자 심판하기를 예비하신 자에게 직고하리라

6) 이를 위하여 죽은 자들에게도 복음이 전파되었으니 이는 육체로는 사람처럼 심판을 받으나 영으로는 하나님처럼 살게 하려 함이니라

7)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

8) 무엇보다도 열심으로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9) 서로 대접하기를 원망 없이 하고

10)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각양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 같이 서로 봉사하라

11)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 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 같이 하라 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 그에게 영광과 권능이 세세에 무궁토록 있느니라 아멘.

 

 

[벧전 4:1] 그리스도께서 이미 육체에 고난을 받으셨으니 너희도 같은 마음으로 갑옷을 삼으라 이는 육체의 고난을 받은 자가 죄를 그쳤음이니

 

그리스도께서 이미 육체의 고난을 받으셨으니 - 베드로는 본절에서 그리스도의 본()을 강조하고 있다.

 

'육체의 고난'은 문자적으로 '육체 안에서 고난을 받으셨다'라는 의미로(KJV), 그리스도께서 '육의 생활영역'에서 죽기까지 고난 받으셨음을 시사한다.

 

(3:18 그리스도께서도 한 번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으니).

 

너희도 같은 마음으로 갑옷을 삼으라 여기서 '갑옷'은 전장(戰場)에서 사용하는 것처럼 싸움을 하기 위한 것이 아니고 현세의 삶 속에서 사상이나 이념들을 방어하기 위한 것을 의미한다.

 

베드로는 그리스도인들이 갖추어야 할 갑옷으로 그리스도와 '같은 마음'을 제시하고 있다.

 

여기서 '같은 마음'은 그리스도께서 사람들을 위해서 고난 속에서도 인내하며 온유했던 대속적인 마음을 의미한다.

 

(2:5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께서 지상 생활 속에서 고난 당하시는 가운데 가지셨던 마음으로 무장해야 한다.

 

육체의 고난을 받은 자가 죄를 그쳤음이니 - 그리스도께서 받으셨던 고난에 동참한 '그리스도인들'을 일컫는다.

 

침례를 통해서 그리스도께서 당하신 고난과 죽음에 동참한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죄의 유혹과 권세가 이기지 못하여 죄가 끊어지게 되며 깨끗한 삶을 영위하는 성화의 한 과정을 경험하게 된다.

 

(6:8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

11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지어다)

 

베드로는 수신자들에게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에의 동참을 통해서, 그리스도와 같은 마음으로 무장함으로 죄의 권세가 지배할 수 없는 성화의 삶을 영위하도록 권면한다.

 

 

[벧전 4:2] 그 후로는 다시 사람의 정욕을 좇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좇아 육체의 남은 때를 살게 하려 함이라 - 본절은 그리스도의 고난을 통하여 그리스도인들이 살아야 하는 삶을 제시한다.

 

'육체의''육체 안에서'라는 의미로 육체로 살아가야 하는 지상 생활을 나타낸다.

 

한편 '남은 때'는 시간의 흐름을 나타내는 표현이다.

이것은 그리스도인들이 이 땅에서 생명이 남아 있는 시간을 의미한다.

 

사람의 정욕을 좇지않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좇아 - '사람의 정욕''하나님의 뜻'은 강한 대조를 이룬다.

 

'사람의 정욕' - 이는 단순히 성적인 욕망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타락한 본성에서 비롯된 모든 죄악 된 욕망을 의미한다.

 

(요일 2:16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

 

한편 '하나님의 뜻'은 문맥상 죄를 그치고(1) 부끄러운 죄악들을 행하지 않는 것이다.

 

(2-3 그 후로는 다시 사람의 정욕을 좇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좇아 육체의 남은 때를 살게 하려 함이라

3) 너희가 음란과 정욕과 술취함과 방탕과 연락과 무법한 우상 숭배를 하여 이방인의 뜻을 좇아 행한 것이 지나간 때가 족하도다).

 

비록 베드로는 본절에서 '하나님의 뜻'에 대해 정의하지 않았지만, 본서 내에서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형제를 사랑하며 왕을 공경하며 선을 행하다가 고난을 받는 것으로 정의하고 있다.

 

(19그러므로 하나님의 뜻대로 고난을 받는 자들은 또한 선을 행하는 가운데 그 영혼을 미쁘신 조물주께 부탁할지어다;

 

2:15 곧 선행으로 어리석은 사람들의 무식한 말을 막으시는 것이라,

17 뭇 사람을 공경하며 형제를 사랑하며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왕을 공경하라;

 

3:17 선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진대 악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보다 나으니라).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동안 인간의 타락된 본성에서 비롯된 죄악을 버리고 하나님의 뜻을 행해야만 한다.

 

 

[벧전 4:3] 너희가 음란과 정욕과 술취함과 방탕과 연락과 무법한 우상 숭배를 하여 이방인의 뜻을 좇아 행한 것이 지나간 때가 족하도다 -

 

본절은 수신자들의 그리스도를 영접하기 이전의 삶에 대한 묘사로,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삶은 과거 그리스도인이 되기 전으로 족한 것임을 시사한다.

 

'이방인의 뜻''하나님의 뜻'과 정면으로 배치된다.

 

한편 '행한 것'은 수신자들이 그리스도인이 되기 이전에 전부 이방인이었음을 암시한다.

이미 그리스도인이 된 수신자들은 더 이상 과거 이방인의 삶과 동일한 죄악 된 삶을 영위할 이유가 없다. 죄악 된 삶은 과거 이방인 시절로 족한 것이다.

 

베드로는 경고하기 위해서 과거 수신자들이 저지른 세 가지 부류의 죄악을 열거한다.

 

(1) 음란과 정욕 - 본문은 성()과 관계된 죄악이다. '음란'은 절제되지 않은 지나친 정욕으로 인한 부도덕한 성행위를 가리키며. '정욕'은 사악한 욕망들이 내적으로 감추어진 상태를 말한다.

 

(2) 술취함과 방탕과 연락 - 본문은 ''과 관계된 죄악이다.

 

'술취함' 술에 만취한 상태를 가리킨다.

'방탕'은 술취한 사람들이 거리를 쏘다니며 난동을 부리는 것을 의미하며

'연락''큰 술잔치를 베풀어 즐기는 것'을 가리킨다.

 

술이 만취 되었을 때 사람들은 이성을 상실하고 쉽게 범죄하게 된다.

 

(3) 무법한 우상 숭배 - '무법한'에는 자연과 양심의 법으로서는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우상 숭배를 가리킨다.

 

이러한 우상 숭배는 음주와 음란이 섞인 가증스러운 것이었다.

 

(왕상 21:26 저가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쫓아내신 아모리 사람의 모든 행한 것 같이 우상에게 복종하여 심히 가증하게 행하였더라;

 

7:20 그들이 그 화려한 장식으로 인하여 교만을 품었고 또 그것으로 가증한 우상과 미운 물건을 지었은즉 내가 그것으로 그들에게 오예물이 되게 하여;

 

2:22 간음하지 말라 말하는 네가 간음하느냐 우상을 가증히 여기는 네가 신사 물건을 도적질하느냐).

 

그 결과 죄를 범할 뿐만 아니라 창조주며 구속주이신 하나님을 기억지 못하게 되고, 그분을 떠나 허탄한 우상에 빠져버리게 된다.

 

 

[벧전 4:4] 이러므로 너희가 저희와 함께 그런 극한 방탕에 달음질하지 아니하는 것을 저희가 이상히 여겨 비방하나

 

이러므로 저희가 이상히 여겨 비방하나 - 이것은 한때 이방인과 같은 생활을 하였지만 이제 그리스도로 인하여 변화된 삶이 되었음을 시사한다.

 

한편 '이상히 여겨''낯선 사람처럼 보이다'라는 의미이다.

 

이방인들은 과거에 자신들과 같은 생활을 하던 그리스도인들이, 낯선 사람처럼 행동하며 그들과 함께 어울리지 않는다는 점을 이상히 여겨 비방한다.

 

이러한 모욕과 비방은 단순히 그리스도인에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비방하는 것이다.

 

너희가 저희와 함께 그런 극한 방탕에 달음질 하지 아니하는 것을 - 본문은 이방인들이 그리스도인들을 보고 비방하는 이유이다.

 

'극한'은 자기 자신을 무모하게 버려두는 것을 의미한다.

 

(15:13 그 후 며칠이 못되어 둘째 아들이 재산을 다 모아 가지고 먼 나라에 가 거기서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허비하더니).

 

그러므로 '극한 방탕'은 자신을 절제하지 않으며 방종한 생활에 버려둠으로 도저히 구원받지 못할 생활을 말한다.

 

(5:18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1:6 책망할 것이 없고 한 아내의 남편이며 방탕하다 하는 비방이나 불순종하는 일이 없는 믿는 자녀를 둔 자라야 할지라).

 

이방인들은 과거에 방탕한 생활을 하던 그리스도인들이, 구원을 받아 전혀 다른 새 삶을 사는 것을 보고 자신들처럼 살지 않는다고 비방한다.

 

 

[벧전 4:5] 저희가 산 자와 죽은 자 심판하기를 예비하신 자에게 직고하리라 -

 

본래 하나님께서 소유하고 계시던 심판의 권세를 그리스도께 주셨다.

 

(5:22 아버지께서 아무도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심판을 다 아들에게 맡기셨으니,

27 또 인자됨을 인하여 심판하는 권세를 주셨느니라;

 

17:31 이는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이에 저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 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니라 하니라;

 

2:16 곧 내 복음에 이른 바와 같이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사람들의 은밀한 것을 심판하시는 그 날이라).

 

사람들은 자신의 모든 생활에 대해서 마땅히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다.

 

'산 자와 죽은 자'는 그 당시에 살아 있는 사람과 이미 죽은 자들을 말한다.

 

(살전 4:15 우리가 주의 말씀으로 너희에게 이것을 말하노니 주 강림하실 때까지 우리 살아 남아 있는 자도 자는 자보다 결단코 앞서지 못하리라).

 

여기서 '죽은 자'는 복음을 듣지 못한 자와 그리스도인들을 비방하는 자들도 포함된다.

 

'심판하기를 예비하신 자''마땅히 심판하시는 자'를 표현한 것으로, 심판의 필연성을 나타내는 말이다.

 

 

[벧전 4:6] 이를 위하여 죽은 자들에게도 복음이 전파되었으니 이는 육체로는 사람처럼 심판을 받으나 영으로는 하나님처럼 살게 하려 함이니라

 

이를 위하여 죽은 자들에게도 복음이 전파되었으니 - 본절에 '이를 위하여'라 함은 그리스도께서 산 자와 죽은 자의 심판 주가 되심을 가리킨다.

 

그리스도께서 '산 자와 죽은 자''심판 주'가 되시기 위해서 '죽은 자'에게도 복음이 전파되었다.

 

본절의 '죽은 자'는 살아있을 동안에 복음을 듣고 회개하였으나, 그리스도의 재림이 임하기 전에 죽은 그리스도인을 의미한다. (Dalton, Kelly, Moffat, Selwyn, Cranfield).

 

이는 육체로는 사람처럼 심판을 받으나 영으로는 하나님처럼 살게 하려 함이니라 - 베드로는 '육체로''영으로', '심판을 받으나''살게 하려 함이니라'를 대조시켜서 본절이 '죽은 자'에게도 복음이 전파된 목적임을 나타내고 있다.

 

'심판을 받으나'는 육체로는 세상에서 이미 심판을 당하였음을 시사한다.

 

반면에 '살게 하려 함이니라'는 현재형으로 '죽은 자'들이 심판을 받아 육체로는 죽음을 당하였을지라도, 하나님과 더불어 영으로는 영원히 살고 있음을 시사한다.

 

복음은 영원한 죽음에 이를 수밖에 없는 죄인들을 영원한 생명에 이르게 하는 능력으로,

 

(요일 3:14 우리가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거하느니라)

 

그리스도인들은 육체로는 죽임을 당할 수 있으나, 영적으로는 복음이 제공하는 생명력으로 하나님과 더불어 영원히 살 수 있다.

 

 

[벧전 4:7]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왔으니 - '만물의 마지막'은 일반적으로 예수의 재림을 의미한다.

 

(3:10 그러므로 생명을 사랑하고 좋은 날 보기를 원하는 자는 혀를 금하여 악한 말을 그치며 그 입술로 궤휼을 말하지 말고).

 

'가까왔으니' 임박한 상황을 가리키는 표현으로 베드로는 박해받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낙심치 말고 소망을 가질 것을 권고하고 있다.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 -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울수록 그리스도인들은 더욱 깨어서 기도해야 한다.

 

'정신을 차리다'에는 '올바른 마음', '침착한 마음'을 의미하며,

'근신하여'는 환경에 따라 요동하는 것이 아니고 마음의 중심을 잡는 조심성을 의미한다.

 

그리스도인들은 '마지막'이 가까울수록 오직 그리스도만을 바라보며 흔들리지 않고 기도할 뿐만 아니라, 무절제한 생활을 버리고 깨어 있어야 한다.

 

 

[벧전 4:8] 무엇보다도 열심으로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

 

'무엇보다도'는 어떠한 일보다 사랑을 먼저 할 것을 말하는 것이라기 보다는, 사랑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표현이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제일 중요한 것은 열심으로 사랑하는 것이다.

 

'열심으로''힘껏 노력하는', '전심 전력하는' 의미로 그리스도인이 힘써서 할 사랑은, 감정적으로 하는 일시적인 사랑이 아니라 의지의 결단을 가지고 행동을 수반하는 아가페적인 사랑이다.

 

이러한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을 수 있다.

즉 피차간에 있는 허물을 덮어 주고 서로를 세워주고자 하는 사랑은 죄를 가리운다.

 

(10:12 미움은 다툼을 일으켜도 사랑은 모든 허물을 가리우느니라).

 

'죄를 덮느니라'는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의 죄가 하나님의 은총으로 말미암아, 무조건적으로 용서되었기 때문에 더욱더 타인의 잘못을 용서할 수 있게 된다.

 

 

[벧전 4:9] 서로 대접하기를 원망 없이 하고 - 이것은 문자적으로 '나그네에게 사랑을 베풀다'라는 의미로, 당시에는 '여관'이 없었기 때문에 나그네를 대접하는 것은 구체적인 사랑의 표현 방법이었다.

 

(딤전 3:2 그러므로 감독은 책망할 것이 없으며 한 아내의 남편이 되며 절제하며 근신하며 아담하며 나그네를 대접하며 가르치기를 잘하며;

 

5:10 선한 행실의 증거가 있어 혹은 자녀를 양육하며 혹은 나그네를 대접하며 혹은 성도들의 발을 씻기며 혹은 환난 당한 자들을 구제하며 혹은 모든 선한 일을 좇은 자라야 할 것이요;

 

1:8 오직 나그네를 대접하며 선을 좋아하며 근신하며 의로우며 거룩하며 절제하며).

 

나그네를 대접하는 것은 단순히 잠자리를 제공하는 차원이 아니다. 왜냐하면 당시에는 고난과 핍박을 받는 그리스도인들이 쫓겨 다니면서 전도 생활을 하는 등, 어려운 처지에 있었던 자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나그네를 대접하는 행위는 사랑의 행위 뿐만 아니라, 간접적으로 복음을 전파하는 기회여서 사도들은 자주 이 덕에 대해서 언급하였다.

 

(12:13 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하며 손 대접하기를 힘쓰라;

 

13:2 손님 대접하기를 잊지 말라 이로써 부지중에 천사들을 대접한 이들이 있었느니라;

 

요삼 1:5-8 사랑하는 자여 네가 무엇이든지 형제 곧 나그네 된 자들에게 행하는 것이 신실한 일이니

6) 저희가 교회 앞에서 너의 사랑을 증거하였느니라 네가 하나님께 합당하게 저희를 전송하면 가하리로다

7) 이는 저희가 주의 이름을 위하여 나가서 이방인에게 아무 것도 받지 아니함이라

8) 이러므로 우리가 이같은 자들을 영접하는 것이 마땅하니 이는 우리로 진리를 위하여 함께 수고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함이니라).

 

한편 베드로는 나그네를 대접하는 조건으로 '원망없이'할 것을 권면한다.

당시 나그네를 대접하는 것이 힘에 겨울 수도 있었으며 많은 어려움이 뒤따르기도 하였다. 그렇다 할지라도 불평하는 것은 합당치 못하다.

 

왜냐하면 이러한 사랑의 행위는 그리스도를 위한 것이고 그리스도께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25:35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38 어느 때에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벗으신 것을 보고 옷 입혔나이까,

40 임금이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벧전 4:10]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각양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 같이 서로 봉사하라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서로 봉사하라 - '은사''하나님께서 값없이 주신 선물'로서 다양하다.

 

(12:6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받은 은사가 각각 다르니 혹 예언이면 믿음의 분수대로;

 

고전 12:4 은사는 여러 가지나 성령은 같고).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서로 다른 은사를 주셨다 할지라도, 그 은사는 서로 비교되거나 자기의 유익과 자랑을 위해 사용되는 것이 아니라 교회의 몸을 세우기 위한 것이다.

 

(고전 4:7 누가 너를 구별하였느뇨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뇨 네가 받았은즉 어찌하여 받지 아니한 것 같이 자랑하느뇨)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이 받은 은사를 가지고 서로 봉사해야 한다.

 

'봉사' '상대를 섬기는 것'이고 '자기를 희생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각양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 같이 - 본절은 은사를 받은 그리스도인들이, 은사를 통해 서로 섬겨야 하는 자세를 나타낸다.

 

'각양'에는 여러 가지 특색의 은사를 나타내는 것으로, 하나님은 한 사람에게 모든 은사를 주시지 않고 각 사람마다 다양한 종류의 은사를 허락하셔서 각 사람이 서로를 위해 섬기고 봉사하여 필요한 부분을 채우도록 하신다.

 

한편 '청지기'는 본래 '집안의 재산을 관리하는 하인'을 의미하는 것으로, 각양 은사를 받은 그리스도인들이 은사를 사용하는 방법을 말한다.

 

청지기인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교회를 섬기고 봉사하며, 관리하는 자로서 자신이 받은 은사를 통해 자기의 유익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의 유익과 멋을 추구해야 한다.

 

 

[벧전 4:11]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 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 같이 하라 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 그에게 영광과 권능이 세세에 무궁토록 있느니라 아멘.

 

베드로는 본절에서 은사의 사용 범주에 대해 두 가지로 설명하고 있다.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 같이 하고 첫 번째 범주는 '말의 사용'이다.

 

그리스도인은 공적이든, 사적이든 간에 말할 때 하나님의 말씀처럼 즉 성경 말씀처럼 해야 한다.

 

(고후 5:20 이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사신이 되어 하나님이 우리로 너희를 권면하시는 것 같이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간구하노니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하라;

 

살전 2:13 이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쉬지 않고 감사함은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 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다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 속에서 역사하느니라).

 

이것은 마치 '하나님의 신탁'을 전하는 것처럼 그대로 하라는 것이 아니라, 성경의 말씀을 표본 삼아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해야 함을 시사한다.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같이 하라 둘 째 범주는 '봉사'이다.

 

베드로는 봉사의 종류가 많기 때문에 다 열거하지 않고 한 단어로 묶고 있다.

 

'공급하다'는 본래 '합창하다'라는 의미였으나 후에 '하나님이 아낌없이 주는 것'이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그리스도인은 교회의 유익과 덕을 세우기 위해 하나님이 주신 은사로 봉사하고자 할 때, 하나님께서 아낌없이 공급해주시는 것을 염두에 두고 힘껏 봉사해야 하며, 자기 자신의 힘으로 하는 것같이 하는 것이 아니고 겸손하게 하나님의 청지기로서 하나님이 주시는 능력으로 봉사해야 한다.

 

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함이니 - 본절은 그리스도인이 앞서 언급한 두 가지 범주,

 

즉 말과 봉사의 영역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처럼, 그리고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처럼 해야 하는 이유이다. 하나님께서 각양 은사를 베풀어 주신 것은 오로지 하나님 자신의 영광을 위해서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주어진 은사를 통해 삶을 살아가는 전() 영역에서 오직, 하나님의 영광만을 위해 행해야만 한다.

 

한편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라는 말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는 것이 인간의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은혜로 인해서 가능한 것임을 암시한다.

 

그에게 영광과 권능이 세세에 무궁토록 있느니라 아멘 - 본절은 하나님을 찬미하는 송영이다.

 

(11:33-36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34)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뇨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뇨

35)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뇨

36)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

 

3:20-21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능력대로 우리의 온갖 구하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이에게

21) 교회 안에서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이 대대로 영원 무궁하기를 원하노라 아멘).

 

'그에게'는 예수 그리스도인지, 하나님인지 분명치 않으나 만약 '예수 그리스도'라고 한다면, (Stibbs, Michaels, Kelly, Goppelt, Selwyn)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에게 속한 영광'이란 의미가 되어 논리에 어긋난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영광'이 논리상 타당하므로 본절에 해당하는 선행사를 '하나님'으로 보는 것이 적절하다. (Blum, Clement).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가 곧 하나님이시고 영광이 예수를 통해서 하나님께 연결되기 때문에,

 

(16:27 지혜로우신 하나님께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광이 세세무궁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1:25 곧 우리 구주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광과 위엄과 권력과 권세가 만고 전부터 이제와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

 

1:6 그 아버지 하나님을 위하여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신 그에게 영광과 능력이 세세토록 있기를 원하노라 아멘)

 

찬미 대상이 누구든 간에, 의미에는 특별한 차이가 없으며 아마도 베드로도 대상을 구별하지 않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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