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소망)의 이유
베드로전서 3장 15절
‘너희 속에 있는 희망(소망)의 연유를 묻는 사람에게는 유화와 외구로서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라’(베드로전서 3:15일역)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예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벧전 3:15개역한글)
‘희망’(소망)이란 특별한 희망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다시 살아나게 하신 일에 의해 신자의 마음속에 일어난 ‘산 희망’(1:3)이다.
즉 ‘우리들 위해 하늘에 간직되어 있는, 썩지 않고, 더러워지지 않고, 쇠하지 않는 분깃’(1:4일역)을 주신다는 소망이다.
‘마지막 때에 나타나려 하는 구원을 얻을’(1:5) 희망이다.
‘너희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존귀와 영광을 얻기에 이를 것이다’(1:7일역)라고 있는 그 희망이다.
즉 그리스도 재림의 희망이다. 만물의 부흥, 몸의 구원의 소망이다.
신약성서가 직접 간접으로 480회나 거듭하여 말하고 있는 그리스도 신자 독특한 소망이다.
‘연유’(이유)란,
그리스어의 logos
영어의 reason으로서,
오늘의 방어로서 하면 ‘이유’이다.
일의 실험적 도는 지식적 설명이다.
미신 또는 교권적 신앙에 대하여 쓰는 말이다.
그러므로 ‘소망의 연유’라고 하면,
소망이 생기게 된 이유,
이것을 마음에 가진 이유,
그 실제적 설명,
과학적 또는 철학적 변증 등을 말하는 것이다.
즉, 그리스도 신자는 그들 독특한 소망을 가지는데, 적당한 이유 없이 이것을 가진 것이 아님을 보이는 것이다.
우리들의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시는 일(재림)은 교묘한 꾸며낸 이야기는 아닌 것이다.
(베드로후서 1:16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과 강림하심을 너희에게 알게 한 것이 공교히 만든 이야기를 좇은 것이 아니요 우리는 그의 크신 위엄을 친히 본 자라)
여기에는 깊은 이유가 있는 것이다.
제1로, 성서 이것을 명시하고,
제2로, 내 영 이것에 응답하고,
제3으로 천연 이것을 찬동하고,
역사 이것을 설명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진리인 이상, 국부적 진리가 아니라 전반적 진리여야 할 것이다.
‘소망의 이유를 묻는 사람에게는 대답할 준비를 하라’고 한다.
실로 적당한 권고이다. 하지만 그 일이란, 쉬운 일이 아니다.
학문이 유치하던 사도 시대에 있어서 용이치 않았다.
하물며 오늘에 있어서랴 이다.
오인은 물론 신앙은 지식에 의한다고 하지 않는다.
신앙은 뜻(의)의 일이지, 슬기(지 wisdon)의 일은 아니다.
그러므로 지식적으로 증명되어 생겨나는 것은 아니다.
‘사람의 속에는 영혼이 있다. 전능자의 기운, 이에 총명을 주신다’(욥기 32:8 일역)고 있어서,
신앙은 사람의 영이 하나님의 영에 접촉(touch)하여 생기는 것이다.
하지만도 하나님에 의해 생기는 것이기 때문에 합리적이 안 될 수 없다.
‘대저 하나님은 혼란의 하나님이 아니시라, 조화의 하나님이시다’(고린도전서 14:33일역)라고 있다.
그가 신자에게 주시는 산 소망에, 우주 인생과 전연 조화하는 데가 있을 것이다.
신자에게 커다란 희망이 있다.
그 희망은, 신자에 한한 희망이 아니라, 우주의 희망이다.
또 인류의 희망이다.
신자의 희망은 우주 인류의 희망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자는, 그 속에 있는 희망을 묻는 사람에게는 유화와 외구(경건)를 가지고서 답할 수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하는 것은, 그의 신앙을 유지하기 위해서만 필요한 것은 아니다.
남에게 신앙을 권하고 희망을 주기 위해 필요하다.
신자는 학구를 게을리 해서는 안 된다.
그가 하나님의 아들인 이상, 우주 만물, 그에게 관계없는 것은 하나도 없을 것이다.
그는 성서에 의거함은 물론, 모든 학문에 달하여, 그의 속에 있는 소망을 보존하고 더욱 더 이것을 선명케 해야 할 것이다.
희망의 선전은 물론 필요하다. 하지만도 그것과 동시에 또 그것에 앞서 희망의 연구는 더욱 필요하다.
우리들의 희망으로 하여금 이유 있는 희망이 되게 하라.
과학으로서 하고 철학으로서 하며, 역사로서 하여 변명할 수 있는 희망이 되게 하라.
희망은 열하기 쉽다. 열하여 미치기(광) 쉽다. 그러므로 냉정한 연구를 요한다.
그리고 경건한 성서의 연구자는 모두 아는 것이다. 신자의 마음에 가지는 희망은 가장 엄밀한 연구에 견디어 낼 수 있는 희망이라는 것을.
신자는 실로 그리스도의 재림을 믿음으로서, 교묘히 기괴한 설을 믿은 것은 아니다.
‘대저 피조물의 간절한 소망은,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기를 기다리는 일이다’(로마서 8:19일역)라고 있어서, 이는 만물의 외침의 소리임을 아는 것이다.
또 ‘아아, 나는 괴로운 사람이로다. 이 죽음의 몸에서 나를 구원할 자는 누구랴? 이는 우리들의 주 예수 그리스도인 까닭에, 하나님께 감사한다’(동 7:24일역)고 있어서, 이는 또 모든 괴로워하는 양심의 소리임을 아는 것이다.
천연학과 심리학, 문학과 역사, 그 궁극은 드디어 여기에 이르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리스도 재래는 성서의 중심적 진리이다.
그러므로 또 우주의 중심적 진리이다.
우리가 그 깊은 연구를 게을리 하여 가하랴?
(2월 20일, 백목, 금정관에 있어서의 그리스도의 재림을 믿는 신자 30여명의 회합의 석상에 있어서 말한 것)
* 내촌감삼의 (1918년 3월 ‘성서지연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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