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로에게 주는 교훈
성 경: [벧전 5:1-5] 너희 중 장로들에게 권하노니 나는 함께 장로 된 자요 그리스도의 고난의 증인이요 나타날 영광에 참예할 자로라
2) 너희 중에 있는 하나님의 양 무리를 치되 부득이함으로 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좇아 자원함으로 하며 더러운 이를 위하여 하지 말고 오직 즐거운 뜻으로 하며
3) 맡기운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오직 양 무리의 본이 되라
4) 그리하면 목자장이 나타나실 때에 시들지 아니하는 영광의 면류관을 얻으리라
5) 젊은 자들아 이와 같이 장로들에게 순복하고 다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
[벧전 5:1] 너희 중 장로들에게 권하노니 나는 함께 장로 된 자요 그리스도의 고난의 증인이요 나타날 영광에 참예할 자로라
▶ 너희 중 장로들에게 권하노니 - 지금까지는 여러 계층의 사람들
즉 사환,
(2:18 사환들아 범사에 두려워함으로 주인들에게 순복하되 선하고 관용하는 자들에게만 아니라 또한 까다로운 자들에게도 그리하라)
아내들,
(3:1 아내 된 자들아 이와 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복하라 이는 혹 도를 순종치 않는 자라도 말로 말미암지 않고 그 아내의 행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게 하려 함이니)
남편들,
(3:7 남편된 자들아 이와 같이 지식을 따라 너희 아내와 동거하고 저는 더 연약한 그릇이요 또 생명의 은혜를 유업으로 함께 받을 자로 알아 귀히 여기라 이는 너희 기도가 막히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라)
모든 사람들에 대한 권면이었으나
(3:8 마지막으로 말하노니 너희가 다 마음을 같이 하여 체휼하며 형제를 사랑하며 불쌍히 여기며 겸손하며)
본절은 장로들에 대한 권면이다.
'장로'(프레스뷔테루스)는 구약 시대부터 시작된 호칭이다.
(출 3:16 너는 가서 이스라엘 장로들을 모으고 그들에게 이르기를 여호와 너희 조상의 하나님 곧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 내게 나타나 이르시되 내가 실로 너희를 권고하여 너희가 애굽에서 당한 일을 보았노라,
18 그들이 네 말을 들으리니 너는 그들의 장로들과 함께 애굽 왕에게 이르기를 히브리 사람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임하셨은즉 우리가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희생을 드리려 하오니 사흘 길쯤 광야로 가기를 허락하소서 하라;
24:9 모세와 아론과 나답과 아비후와 이스라엘 장로 칠십 인이 올라가서;
민 11:16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이스라엘 노인 중 백성의 장로와 유사되는 줄을 네가 아는 자 칠십 인을 모아 데리고 회막 내 앞에 이르러 거기서 너와 함께 서게 하라;
수 20:4 그 성읍들의 하나에 도피하는 자는 그 성읍에 들어가는 문 어귀에 서서 그 성읍 장로들의 귀에 자기의 사고를 고할 것이요 그들은 그를 받아 성읍에 들여 한 곳을 주어 자기들 중에 거하게 하고).
구약 시대에는 주로 나이가 많은 연장자들을 부르는 호칭으로 사용되었으나 점차적으로 직분을 나타내는 호칭으로 바뀌게 되었다.
신약 시대에 와서는 예루살렘 교회가 장로 제도를 사용하였으며,
(행 11:30 이를 실행하여 바나바와 사울의 손으로 장로들에게 보내니라;
21:18 그 이튿날 바울이 우리와 함께 야고보에게로 들어가니 장로들도 다 있더라)
바울과 바나바는 전도 여행을 하면서 각 교회에 장로들을 세웠다.
(행 14:23 각 교회에서 장로들을 택하여 금식 기도하며 저희를 그 믿은 바 주께 부탁하고).
따라서 이 제도는 예루살렘에서 시작되어 여러 지역으로 번져갔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러한 '장로'는 '감독'(에피스코포스)과 거의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다.
(딤전 3:1 미쁘다 이 말이여 사람이 감독의 직분을 얻으려 하면 선한 일을 사모한다 함이로다;
딛 1:7 감독은 하나님의 청지기로서 책망할 것이 없고 제 고집대로 하지 아니하며 급히 분내지 아니하며 술을 즐기지 아니하며 구타하지 아니하며 더러운 이를 탐하지 아니하며).
그러나 감독은 직분적인 측면의 성격이 강하며, 장로는 신분적인 측면이 강하다.
이와 같은 장로는 교회에서 전반적인 것을 관리하는 영적 지도자로서 교인들을 양육하고 돌보며 인도하는 일을 감당하였다.
(히 13:7 하나님의 말씀을 너희에게 이르고 너희를 인도하던 자들을 생각하며 저희 행실의 종말을 주의하여 보고 저희 믿음을 본받으라;
약 5:14 너희 중에 병든 자가 있느냐 저는 교회의 장로들을 청할 것이요 그들은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며 위하여 기도할지니라).
한편 베드로는 장로들에게 권면할 수 있는 자신의 자격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1) 함께 장로 된 자요 - 이것은 베드로 자신의 사도적 권위에 대한 주장이 아니라 서로가 같은 동역자임을 강조하는 주장이다.
이는 결코 자신의 권위를 높이고 다른 사람을 훈계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며 자신도 '장로'로 같은 '장로'의 입장을 충분히 이해하고 공감함을 시사한다.(Brown).
(2) 그리스도의 고난의 증인이요 - 이것은 베드로 자신이 직접 그리스도의 고난을 목격한 증인이요,
(행 5:32 우리는 이 일에 증인이요 하나님이 자기를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주신 성령도 그러하니라 하더라;
10:39 우리는 유대인의 땅과 예루살렘에서 그의 행하신 모든 일에 증인이라 그를 저희가 나무에 달아 죽였으나),
그것을 증거 할 책임을 부여받은 사람임을 의미한다.
(요 21:15–18 저희가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가라사대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
16) 또 두번째 가라사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가라사대 내 양을 치라 하시고
17) 세번째 가라사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가로되 주여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양을 먹이라
18)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젊어서는 네가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치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행 1: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3) 나타날 영광에 참예할 자로라 - '나타날 영광'은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에 보여 주실 영광이며
(4:13 오직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동시에 베드로를 포함한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함께 누릴 영광이다.
(롬 8:17-18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
18)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혹자는 본절의 영광이 변화산상에서 베드로가 목격한 영광을 지칭한다고 하나, (Stibbs)
그것보다는 장차 임할 미래적인 사건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벧전 5:2] 너희 중에 있는 하나님의 양 무리를 치되 부득이함으로 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좇아 자원함으로 하며 더러운 이를 위하여 하지 말고 오직 즐거운 뜻으로 하며
▶ 너희 중에 있는 하나님의 양 무리를 치되 - 베드로는 요 21:15 - 17에서 예수께서 자신에게 부탁했던 말을 다른 목자들 즉 장로들에게 권면한다.
(요 21:15–17 저희가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가라사대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
16) 또 두번째 가라사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가라사대 내 양을 치라 하시고
17) 세번째 가라사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가로되 주여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양을 먹이라)
본래 '양'은 그리스도의 것이며
(요 10:14 나는 선한 목자라 내가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21:15 저희가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가라사대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
하나님의 것이다.
(행 20:28 너희는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저들 가운데 너희로 감독자를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치게 하셨느니라).
그런데 목자장이 되시는 그리스도께서 양 무리를 돌보는 직임(職任)을 사람들에게 위임하신 것이다.
베드로는 그리스도께서 부여하신 '양 무리'를 돌보고 양육하는 직임을 다하라고 장로들에게 권면한다.
장로들은 이 때 두 가지 마음 자세를 가져야 한다.
(1) 부득이함으로 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좇아 자원함으로 하며 - '부득이함으로'는 '자원함으로'와 대조를 이루는 것으로 '억지로'를 의미한다.
장로들은 주어진 직임을 행할 때 인간적인 열심이 아니고 성령께서 주신 마음으로 즉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열심으로 행해야 한다.
(행 20:28 너희는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저들 가운데 너희로 감독자를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치게 하셨느니라).
(2) 더러운 이를 위하여 하지 말고 오직 즐거운 뜻으로 하며 - 본절은 당시의 장로직에 일정한 보수가 있었음을 암시한다.
(딤전 5:17-18 잘 다스리는 장로들을 배나 존경할 자로 알되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이들을 더할 것이니라
18) 성경에 일렀으되 곡식을 밟아 떠는 소의 입에 망을 씌우지 말라 하였고 또 일꾼이 그 삯을 받는 것이 마땅하다 하였느니라).
'더러운 이'는 돈을 벌기 위한 목적으로 자신들에게 맡겨진 공동체의 재정을 이용하는 행위이며(Kelly),
'즐거운 뜻'에는 헌신적으로 열심을 내는 것을 가리킨다.
장로들은 자신의 사리 사욕을 채우기 위해 공동체의 재정을 이용하거나 돈을 목적으로 직임을 감당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서 주신 직분을 감당하기 위해 헌신하는 자세로 임해야 한다.
[벧전 5:3] 맡기운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오직 양 무리의 본이 되라
▶ 맡기운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오직 양무리의 본이 되라 - 본절 역시 앞절과 마찬가지로 장로가 직임을 감당할 때 취해야 할 마음 자세에 대한 언급이다.
'맡기운 자들'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갔을 때 제비 뽑기를 하여 땅을 할당 받았던 것에서 유래한다.
(수 18:10 여호수아가 그들을 위하여 실로 여호와 앞에서 제비 뽑고 그가 거기서 이스라엘 자손의 분파대로 땅을 분배하였더라).
한편 '주장하는 자세'는 권세를 가지고 지배하는 것을 의미한다.
양 무리는 하나님의 것이고, 장로 직임은 하나님의 은혜로 맡겨진 것이기 때문에 장로들은 지배를 하거나 다스리는 자세로 양 무리를 치는 것이 아니라 다만 겸손한 마음과 신성한 모습으로 모범을 보여서 양을 양육하고 돌봐야 한다.
[벧전 5:4] 그리하면 목자장이 나타나실 때에 시들지 아니하는 영광의 면류관을 얻으리라 - 신약성경에서 단 한번 나오는 '목자장'(아르키포이메노스)은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예수는 '목자'로 불리어졌으나,
(2:25 너희가 전에는 양과 같이 길을 잃었더니 이제는 너희 영혼의 목자와 감독 되신 이에게 돌아왔느니라)
본절에서는 장로들과 구별하기 위하여 '목자장'으로 사용되었다. (Deissmann).
모든 양들의 목자가 되시는 예수는
'큰 목자'요.
(히 13:20 양의 큰 목자이신 우리 주 예수를 영원한 언약의 피로 죽은 자 가운데서 이끌어 내신 평강의 하나님이)
'선한 목자'이시며
(요 10:11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14 나는 선한 목자라 내가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베드로를 포함한 장로들은 목자장이신 예수의 '대리자'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는 대리 목자들에게 그의 행위에 따라서 적합한 보상을 해주실 권리가 있다.
그것의 상급은 '시들지 아니하는 영광의 면류관'이다.
'시들지 아니하는'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마란티논'은 '아마란티노스'라는 절대로 시들지 않는 꽃 이름에서 나온 단어로 '쇠하지 않음'을 상징하며(Robertson)
'면류관'은 운동경기에서 승리자에게 주어지는 '월계관'을 가리킨다.
직임을 잘 감당하는 장로들은 그리스도로부터 합당한 상급으로 영원히 쇠하지 않는 영광을 받게 될 것이다.
(롬 8:17-18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
18)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요일 3:2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 것은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내심이 되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계신 그대로 볼 것을 인함이니).
[벧전 5:5] 젊은 자들아 이와 같이 장로들에게 순복하고 다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
▶ 젊은 자들아 이와 같이 장로들에게 순복하고 다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 본절의 '장로'는 단순히 '연장자'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Kelly, stibbs, Blum).
젊은 사람들이 연장자에게 순복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마땅한 질서이다.
한편 '허리를 동이라'의 헬라어 '엥콤보사스데'는 '옷 입다'라는 의미로 노예들이 주인을 시중들기 위하여 앞치마를 두르는 것을 가리킨다.
이것은 예수께서 수건으로 앞을 두르고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것을 상기시키는 권면으로,
(요 13:14–17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
15)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
16)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종이 상전보다 크지 못하고 보냄을 받은 자가 보낸 자보다 크지 못하니
17) 너희가 이것을 알고 행하면 복이 있으리라)
겸손히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함을 강조하는 표현이다.
▶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 - 본절은 잠 3:34(LXX)의 인용으로 겸손해야 하는 이유이다.
(잠 3:34 진실로 그는 거만한 자를 비웃으시며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시나니)
젊은 자들이 장로들에게 겸손해야 하는 이유는 교만한 자는 하나님이 대적하시고 겸손한 자들에게 은혜를 주시기 때문이다.
'대적하다'는 군대를 배치시킬 때 사용하는 군사 용어였다.(Caffin).
하나님은 하나님 자신을 의뢰하지 않고 교만하여 자기의 능력만을 믿는 자들을 대적하셔서 파멸시키신다.
반면에 겸손하여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자에게는 은혜를 허락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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