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0월 16일 수요일

서로 대접하기를 원망 없이 하고

  

나그네의 접대

 

베드로전서 47-11: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

8) 무엇보다도 열심으로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9) 서로 대접하기를 원망 없이 하고

10)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각양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 같이 서로 봉사하라

11)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 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 같이 하라 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 그에게 영광과 권능이 세세에 무궁토록 있느니라 아멘.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웠다’(일역)는 것은,

 

초대 신자의 사이에 현저하게 미만(편만 diffusion)해 있던 관념으로서, 신자 상호 또는 불신자에 대한 태도 같은 것도, 이 근본 사상 위에 세워졌던 것이다.

신약성서에는 종종 이 관념이 되풀이되고 있다.

 

물론 그리스도 신자는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웠다는 것을 듣고서 두려움을 가진 것은 아니다.

 

그리스도교에서 말하는 세상의 마지막(말세)이란, 불법(불교)에서 말하는 말세와는 전연 그 의미를 달리한다.

이 세상의 모든 상태가 일변하여, 우리들이 가장 귀하게 생각하는 아름다운 상태가 출현되는 때를 말하는 것이다.

 

마치 백화가 피기를 기다리는 겨울 끝(동정말) 같은 것이다.

 

초대의 신자는 언제나 이러한 마음가짐으로 있었다. 그것을 염두에 두지 않으면, 신약성서는 잘 알 수 없다.

 

오늘의 사람은 모두 현재의 상태를 기초로 하여 긴 미래가 쌓아 올려지는 것이라 생각하고 있다.

 

예컨대 경제 상태 같은 것도, 100, 500년 후에 이르기까지 지금과 마찬가지로 돈이 힘 일 것이라고 생각하여, 사람에게 주는 것은 고통스러운 일 같이 느껴지는 것이다.

 

초대 신자에게 있어서는 이 세상은 영속할 것은 아니었다.

머지않아 때는 와서 우리는 새 나라로 옮겨지는 것이라고, 그들은 이같이 믿고 있었으므로,

시여(분배 distribute)하는 것은 결코 난사가 아니었던 것이다.

 

오늘의 사람의 생각이 옳은지, 초대 신자의 관념이 과연 잘못된 것인지, 이것은 커다란 문제이다.

 

재작년 여름 무렵까지, 구주(Europe)에 있어서는 독인도 불인도 영인도 모두 이와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어떠했나? 불과 수일간에 있어서의 정치가의 준조절충(국제문외교절충), 그렇게도 안전한 듯이 보인 경제 상태를 아연 전복시킨 것이다.

특히 이것을 일개인의 문제로서 보면, 언제 종말이 올지를 보증하기 어렵다.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웠다고. 신약성서는 그 관념으로서 읽어야 할 것이다.

 

일전 어느 독신의 조선인의 내방을 받았다.

그는 일 있어서 옥에 던져져 있기 3, 그 동안 칼은 매일 그의 머리 위에 놓여졌다.

하나님 앞에 나가는 것이 오늘이냐 내일이냐고 대망하면서, 신약성서를 통독하기 전후 8, 그 깊은 가르침은 잘 그의 저작(이해)하는 바로 되었던 것이다.

 

베드로전서를 받은 사람들도 또 그 마음가짐에 있었다. 그리고 그러한 상태에 있는 때, 사람은 절로 기도하지 않을 수 없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말한다.

 

이러므로, 기도하기 위해, 삼가 스스로 제어하는 일을 하라’(일역).

 

삼가란 것은 자기의 욕(욕정)을 억누르는 일,

스스로 제어하며란 이것을 절약하는 일이다.

자기의 욕(욕정)을 억제하고 이것을 절약하라는 것과 같다.

 

그리고 그렇게 하는 것은 자기를 기도의 태도에 두기 위해서이다.

신자에게 있어서 선한 기도를 하는 만큼 소중한 일은 없다.

신앙이 쇠약해지고 불평 많아 인생에 의의 없음을 느끼는 때, 결코 선한 기도는 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언제나 선한 기도를 할 수 있는 신자의 보통 상태에 자기를 두기 위해, (욕정)을 억제하고 또 절약하여 그 준비를 하라는 것이다.

불신자에 대해서는 인내와 무저항, 그리고 신자 상호에 대해서는,

 

무슨 일보다도 먼저 서로 사랑하는 사랑을 뜨겁게 하기를 힘쓰라. 그것은 사랑은 많은 죄를 덮어주기 때문이다’(8일역)라고.

 

이것을 해석하여, 사람을 사랑하면 그것으로서 자기의 죄를 없이할 수 있다는 것으로 취해서는 아주 위험하다.

죄를 보상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은 사람의 악한 것을 기억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서로 사랑 없는데, 죄는 자꾸 지적되고 힐책되며 심판되어, 결국 사람을 구원하지 못하고, 도리어 이것을 멸망으로 들어가게 하는 실례, 결코 적지 않다.

 

이에 반하여 사랑 있는 때는 사람 모두 서로 사랑으로서 죄를 덮는 까닭에, 사랑을 입은 자는 스스로 부끄러워하여 회개로 옮기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물론, 냄새나는 구린 것에 뚜껑을 덮음의 뜻은 아니다. 함부로 지탄하는 일없이, 실망하지 않도록 인도해 주는 것이다.

 

모든 죄는 어려워도, 많은 죄는 이것을 덮을 수가 있다.

사랑이 뜨거운 곳에 이 적극적 치료법이 행해진다.

마치 건강체에 병독이 들어간 때처럼 전신이 이것을 덮어버려 마침내 독물을 없이해 버리는 것이다. 실로 상식에 찬 말이다.

 

너희는 서로 아까워하는 일없이 접대하라’(일역)

 

이것 오늘의 강연의 제목이다.

 

나그네의 접대에 대하여 성서의 교훈은 극히 많다.

 

(10:18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신원하시며 나그네를 사랑하사 그에게 식물과 의복을 주시나니;

 

25:35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12:13 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하며 손 대접하기를 힘쓰라;

 

13:1-3 형제 사랑하기를 계속하고

2) 손님 대접하기를 잊지 말라 이로써 부지중에 천사들을 대접한 이들이 있었느니라

3) 자기도 함께 갇힌 것 같이 갇힌 자를 생각하고 자기도 몸을 가졌은즉 학대 받는 자를 생각하라).

 

신약성서에는 필록세니아(philoxenia)라는 특별히 의미 깊은 말이 있다.

이것을 방어로 나그네의 접대 도는 빈객의 접대로 역하지만, 도저히 원어의 정신을 전하기에 족하지 못하다.

크세니아(Xenia)는 밖에서 온 사람으로 신자의 방문자의 일이다.

 

당시 아직 그리스도를 믿는 자 많지 않았다.

각지에 산재하여, 고독한 가운데 그 신앙을 지키는 때, 같은 신자 상호의 방문은, 필경 특수한 의무 또는 특권으로서 행해졌으리라.

 

형제는 나그네로서 형제의 집에 영접되고, 깊은 기쁨을 주고 받았던 것이다.

 

우리나라(일본)에 있어서도 3, 40년 전에는 신자의 수가 5, 6천을 넘지 못하고, 따라서 그 친밀은 깊고, 서로 방문을 교환하는 것은 무엇보다의 쾌락이었다.

 

필로 (Philo)란 사랑이다. 즉 사람()을 형제로서 조금의 간격도 없이 친밀한 범위 내에 받아들이는 일이다.

 

그러므로 이른바 접대(대접)는 아니다.

 

일본인의 다수는 아직 객을 접대함의 길을 알지 못한다. 그저 취급을 정중히 하고, 특수한 존경을 표시하는 것으로서 지극한 접대로 여기는 일은 잘못의 이만저만이 아니다.

 

크리스천의 접대는 전혀 이것과 취지를 달리한다. 즉 가족의 일원으로서 친히 그 즐거움을 나누는 것이다.

 

처자가 먹는 것을 함께 식음케 하는 것이다. 가정에 그리스도가 들어 온 때, 먼저 제일로 생겨 날 좋은(선한) 현상은 구래의 개개 별별의 식사를 폐지하고 일가 공동의 식탁을 돌려 앉는 일인데, 그것과 한 가지로 크리스천의 접대도 구래의 접대법을 일변하는 것이다.

 

초대 신자의 사이에는 그러한 미풍이 아주 성행되었다. 그 기원의 일부는 확실히 나라의 풍습에 있다.

 

오늘에 있어서도, 이점에 있어서 가장 유명한 것은 아라비아인(아랍인)이다. 그들에게 있어서 무엇보다 즐거운 일은, 자기의 천막에 사람의 방문을 받는 일이라고 한다.

 

심한 것은, 일찍이 한 낯선 사람, 그 적에게 쫓겨 자기의 천막으로 도피해 온 때, 기꺼이 영접했던 바, 실은 자기 아들을 죽인 자로서 이것을 추격해 온 것은 즉 아들의 친구였다.

그러나 그래도 자가(自家)의 객으로서 영접한 이상, 원수를 갚을 수 없다고 하여, 친절히 접대했다는 이야기마저 남아 있다. 실로 접대를 중히 여기는 인종이다.

 

그러한 사상 가운데 예수의 가르침이 들어가 신자로서의 사랑이 가해져, 아주 아름다운 풍습으로 되어 이 가르침과 함께 전해진 것이다.

 

나그네의 접대는 오늘 우리들 사이에도 가장 소망스러운 일이다.

이 사랑의 교환에 의해 서로 생활의 내정을 알고 친밀의 도는 더욱 더욱 농도(심화)를 더하는 것이다.(227, 백미 성서강좌에 있어서의 강연대의, 등정무필기).

 

내촌감삼의 (19164성서지연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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