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혜가 제일
잠언 4장 1-9절 : 아들들아 아비의 훈계를 들으며 명철을 얻기에 주의하라
2) 내가 선한 도리를 너희에게 전하노니 내 법을 떠나지 말라
3) 나도 내 아버지에게 아들이었었으며 내 어머니 보기에 유약한 외아들이었었노라
4) 아버지가 내게 가르쳐 이르기를 내 말을 네 마음에 두라 내 명령을 지키라 그리하면 살리라
5) 지혜를 얻으며 명철을 얻으라 내 입의 말을 잊지 말며 어기지 말라
6) 지혜를 버리지 말라 그가 너를 보호하리라 그를 사랑하라 그가 너를 지키리라
7) 지혜가 제일이니 지혜를 얻으라 무릇 너의 얻은 것을 가져 명철을 얻을지니라
8) 그를 높이라 그리하면 그가 너를 높이 들리라 만일 그를 품으면 그가 너를 영화롭게 하리라
9) 그가 아름다운 관을 네 머리에 두겠고 영화로운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하였느니라.(한글개역)
아버지라 하고, 아들이란다.
단순히 혈육의 관계 일뿐이 아니다.
참된 아버지는 육의 아버지임과 동시에,
영의 아버지가 아니어서는 안 된다.
즉 아들에게 육의 생명을 줌과 동시에,
영의 생명을 주는 자가 아니어서는 안 된다.
즉 신앙의 전달자가 아니어서는 안 된다.
그리고 히브리인 사이에 있어서는, 이것이 사실이었다.
히브리인과 동종족인 아라비아인 사이에 있어서는,
지금도 여전히 그러한 것이다.
가장은 아버지요, 제사장이요, 교사요, 예언자(선지자)이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사적이 잘 이것을 말해주고 있다.
아버지는 단순히 육의 아버지요,
아들은 아버지와 사상 신앙을 달리한대도 무관하다는 것은
서양사상이고, 또 근대사상이다.
그것이 과연 진리일지는 아직 증명되지 않은 문제이다.
굳이 아버지 위해서 않고, 아들 위해 말한다.
아들(자녀들)은 과연 육체이외의 일에 있어서,
아버지에게서 아무것도 가르쳐 받음의 필요 없을 것인가?
만약 그렇다고 하면, 아들의 불행은 이상 더 없는 것이다.
'내 아버지가 나를 가르쳤으며, 내 교훈(훈계)을 네게 준다'고.
지혜는 전통적이다.
인생의 경험은, 각자 이것을 반복할 필요 없고,
또 반복할 수 없다.
부조의 경험은, 지혜로서 이를 이러 받고,
우리는 그 위에 서서 신방면으로 향해 발전해야 할 것이다.
그것 그 자신이 커다란 지혜이다.
선도 악도,
자신이 새로이 실험(경험)하지 않으면 인정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은,
자유라고 칭하기보다도 오히려 어리석음이다.
'근대인은 스스로 선악의 나무의 가치를 정하고자 하여,
커다란 위험을 범하고 있다.
그리고 그들의 다수가, 그 평가를 그르쳐 몸을 멸하고,
영혼을 잃어버렸다.'
'지혜는 제1의 것이다. '(7)
길(道)), 신앙, 인류의 실험(경험)으로써 증명된 하나님의 계시,
즉 여기 말하는 바의 지혜이다.
이것은 제일이라고 솔로몬은 말한다.
어버이가 자식에게 전해야 할 제일의 보배는 이것,
자식이 어버이에게서 구해야 할 제일의 자산은 이것,
지혜에 비교해 볼 때, 이 세상의 모든
부도 존귀도, 학문도 재능도 세어 말할 것이 못된다.
지혜 있고서의 부,
지혜 있고서의 권능(능력)이다.
나라도 사람도 지혜 없고서는,
모든 다른 것이 있다 해도 오래는 보전 못한다.
지혜는 부와 존귀를 낳으나,
부와 존귀는 지혜의 대용을 하지 못한다.
재산과 학문은 없대도 가하다.
그러나 지혜는 없어서 안 된다.
지혜를 복음의 신앙으로 해득할 때,
그 지대한 가치를 근세사의 많은 사실로써 예증 할 수가 있다.
스페인은 한 때는 부로써 넘쳤으나,
지혜에 결여했기 때문에 오늘날의 쇠퇴를 가져왔다.
독일은 학술로써 세계 패자였으나,
지혜를 잃은 까닭에 오늘의 굴욕을 불러오고, 오늘의 곤란을 가져왔다.
오늘의 일본도 역시 하나님을 앎의 지식을 기르지 않은 결과로서,
기타의 일에 있어서는 우수한 나라라고 해도,
모든 일에 있어서 여의치 않게 되어가고 있다.
나라가 그렇다.
사람 역시 그런 것이다.
사람의 성공은 그 신앙으로 말미암는다.
대(大) 성공자(成功者)는 모두 신앙의 사람이다.
주 예수 그리스도가 그 최대의 실례이다.
그에게 학문 없고, 재산 없고,
있었던 것은 하나님을 믿음의 신앙이었다.
'누가 세상을 잘 이기랴! 우리로 하여금 세상에 이기게 하는 것은 우리의 믿음이'(요한1서 5:4)
만약 세상에 참된 의미에 있어서의
그리스도교 문명이라는 것이 있다고 하면,
그것은 신앙으로써 하는 세상의 정복이다.
무력 또는 지능으로써 하는 정복은,
얕은 잠시적인 정복에 지나지 않는다.
물론, 이런 인세관은 이 세상 사람에게 조소된다.
(하지만) 지혜의 진가는, 지혜의 사람에게만 인정되는 것이다.
'지혜는 지혜의 자녀에게 옳게 여겨진다'(마태복음 11:19)고 예수는 말씀하셨다.
천박한 문사라든가. 교활한(약삭빠른) 정치가에게 묻지 않고,
깊이 인생을 맛본 사람에게 묻는다면,
그들은 누구나 솔로몬의 이 말이 그릇되지 않은 것임을 증거하리라.
'지혜는 제일이다. 무엇을 못 얻는대도 지혜를 얻으라. 모든 네 얻은 것을 바쳐서라도 지혜를 얻으라'고
마태복음 13장 44절 이하에 있어서의
예수의 말씀이 솔로몬의 이 말의 최선의 주해이다.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도다. 사람이 발견하면 이를 숨겨두고,
기뻐하며 돌아가, 그 가진 것을 다 팔아 그 밭을 사는 것이다.
천국은 또 좋은 진주를 구하려는 상인 같다.
하나의 값진 진주를 찾아내면 그 소유를 다 팔아 이것을 사는 것이다.'(일역)
지혜는 어찌하여 그처럼 귀한가?
그것은 인생의 실험(경험)에 의해 알게 된다.
'지혜를 버리지 말라. 그녀는 너를 지키리라.
그녀를 사랑하라. 그녀는 너를 보호하리라. 그녀를 존경하라.
그녀는 너를 높이 들리라. 만약 그녀를 품으면, 그녀는 너를 영화롭게 하리라.
그녀는 아름다운 화곤을 네 머리에 두리라. 영화의 관을 네게 주리라'(6-9 일역)
말은 지극히 평범한 듯하나, 그 의미는 심장하다.
즉 그 의미는,
이 세상의 안전, 또는 성공으로써 그치지 않는다.
일(사실)은 영원에 관계되는 문제이다.
지혜를 단순히 지혜로서 해석하지 않고,
인생의 실험(경험)에서 얻은 유효적 지식으로서 취하지 않고서,
최고의 지혜, 즉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앎의 살아있는 참된 지식으로 해석 할 때,
천상천하 이보다 귀한 것은 없다.
그 의미에 있어서 지혜 제일이다.
제군은 무엇을 버리고서라도, 이것을 알고자 하는가?
이것은 장사 여가에,
또는 공부 여가에 얻고자 하여 얻어지는 것은 아니다.
모든 대가를 지불하고서, 구해야 할 것이다.
* (내촌감삼의 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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