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개의 촉구
성 경: [눅 13:1-9] 그 때 마침 두어 사람이 와서 빌라도가 어떤 갈릴리 사람들의 피를 그들의 제물에 섞은 일로 예수께 아뢰니
2)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는 이 갈릴리 사람들이 이같이 해 받으므로 다른 모든 갈릴리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3)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4) 또 실로암에서 망대가 무너져 치어 죽은 열여덟 사람이 예루살렘에 거한 다른 모든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5)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6) 이에 비유로 말씀하시되 한 사람이 포도원에 무화과나무를 심은 것이 있더니 와서 그 열매를 구하였으나 얻지 못한지라
7) 포도원지기에게 이르되 내가 삼 년을 와서 이 무화과나무에서 열매를 구하되 얻지 못하니 찍어버리라 어찌 땅만 버리게 하겠느냐
8) 대답하여 이르되 주인이여 금년에도 그대로 두소서 내가 두루 파고 거름을 주리니
9) 이 후에 만일 열매가 열면 좋거니와 그렇지 않으면 찍어버리소서 하였다 하시니라.
[눅 13:1] 그 때 마침 두어 사람이 와서 빌라도가 어떤 갈릴리 사람들의 피를 그들의 제물에 섞은 일로 예수께 아뢰니
▶ 그때 마침 - 이 표현은 앞의 이야기와의 연결을 말해주는 동시에
어떤 예기치 않은 그리고 충격적인 사건이 있을 것을 암시한다.
▶ 빌라도가 어떤 갈릴리 사람들의 피를 그들의 제물에 섞은 일 - 매우 충격적인 사건이
예수께 보고되고 있다.
여러 명의 갈릴리인들이 성전에서
빌라도에 의해 살해당하였다는 것이, 그 보고 내용인데
이러한 류의 사건들,
즉 식민지 통치자인 로마 총독과
피식민지 백성인 유대인들 사이의 반목 때문에 생겨나는
인명 살상극은 당시에 흔했다.
역사가 요세푸스(Josephus)의 기록에 의하면
어떤 유월절 제사 때에는 3천명의 유대인들이
제단에 바쳐지는 짐승들처럼 학살당했으며
또 다른 어떤 유월절에는 무려 2만 명이나 되는 유대인들이
학살(虐殺)을 당했다는 기록이 있다.
본문의 사건이 구체적으로 어느 때 있었는지는 분명치 않고,
다만 여러가지 추축이 있을 뿐이다.
(1) 행 5:37의 사건과 동일한 것으로 본다.
(행 5:37 이 사람 다음에도 조세 등록하던 때에 갈릴리 사람 유다가 일어나서 많은 사람을 꾀어 자기를 따르게 했으나 그도 죽으니 그를 추종하던 자들이 다 흩어졌느니라)
(2) 헤롯과 빌라도가 원수처럼 되게 한 사건이라고 본다.
(23:12 헤롯과 빌라도가 전에는 원수였으나 당일에 서로 친구가 되니라).
(3) 앞에서 언급한 것과 같이 요세푸스가 기록하고 있는 각종 사건들이라고 보는 견해.
그러나 이들 견해는 확실한 증거로써 뒷받침되지 않는 하나의 추축에 불과하다.
[눅 13:2]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는 이 갈릴리 사람들이 이같이 해 받으므로 다른 모든 갈릴리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 이 말씀은 앞에서 보고한 사람들의 관심(關心)이
빌라도의 악함이나 죽임을 당한 사람들의 불쌍함에 있는 것이 아니라
피살자들의 죄에 있음을 암시한다.
이는 인간이 당하는 불행한 사건에 대한 유대인들의 종교적 이해를 보여주는 바,
유대인들은 사람이 당하는 불행은 그가 범한 죄의 결과라고 보았던 것이다.
(욥 4:7 생각하여 보라 죄 없이 망한 자가 누구인가 정직한 자의 끊어짐이 어디 있는가;
8:20 하나님은 순전한 사람을 버리지 아니하시고 악한 자를 붙들어 주지 아니하시므로;
22:4-5 하나님이 너를 책망하시며 너를 심문하심이 너의 경건함 때문이냐
5) 네 악이 크지 아니하냐 네 죄악이 끝이 없느니라;
요 9:1-2 예수께서 길을 가실 때에 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을 보신지라
2) 제자들이 물어 이르되 랍비여 이 사람이 맹인으로 난 것이 누구의 죄로 인함이니이까 자기니이까 그의 부모니이까).
[눅 13:3]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 본문은 빌라도에게
죽임을 당한 사람이나 그 죽음을 보면서 상대적으로
자기들의 죄 없음을 확인하려는 사람들이나
모두 동일한 죄인이라는 사실을 지적하고 있다.
따라서 아직 불의의 재난을 당하지 않은 사람들도 안심할 수 없으며
동일한 불행을 당하지 않기 위해서는 '회개'를 해야 한다는 말씀이다.
여기서 '회개'(메타노에오)는
지난날을 돌아보아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뉘우치는 것에 머무르지 않고
잘못된 삶의 태도를 완전히 바꾸는 것까지도 포함한다.
이런 의미에서 이들에게 시급히 요청되는 '회개'는
이웃이 당하는 불행을 보고
위로해 주고 함께 아파해 주지는 못할망정
도리어 정죄하는 신앙의 태도를 버리는 것이고
더 나아가 자기들도 하나님 앞에서
동일한 죄인임을 깨닫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마 7:1-5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2) 너희가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3)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4) 보라 네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
5)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
롬 3:10-12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11)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12)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한편 "이와같이 망하리라"가 의미하는 것에 대해서는 A.D.70년에 있었던
예루살렘 멸망을 가리킨다고 보는 견해도 있으나(Farrar,Godet),
그보다는 이 말씀이 보편적으로 인간 모두에게 적용된다는 의미에서
'최후의 심판'을 뜻한다고 볼 수 있다. (Marshall,Lenski).
[눅 13:4] 또 실로암에서 망대가 무너져 치어 죽은 열여덟 사람이 예루살렘에 거한 다른 모든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 실로암에서 망대가 무너져 치어 죽은 열여덟 사람 - 예수는 앞에서 말씀하신 것을
재차 강조하기 위하여 '재난과 죄'의 관계에 관한 또 하나의 예를 들고 있다.
여기서 '실로암'(Siloam)은 예루살렘 남쪽과 동쪽 성벽에 접해 있었고
기흔 으로부터 예루살렘으로 공급되는 물을 저장하는 저수지였다.
본문에서 말해주는 사건은,
이곳을 지키기 위해 세워놓은 망대가 무너졌다는 것이며
그 사건으로 열여덟 명의 생명이 죽음을 당했다는 것이다.
이 사건은 빌라도가 물의 공급을 개선하기 위하여 실시한
수로 공사와 관련된다고 보기도 한다.
이 사건에 대해서도 예루살렘 사람들은 그들이 전통적으로
이해해 온 방식에 따라 죄의 대가로 해석하였을 것이나
예수는 그러한 해석을 거부하고 있다.
한편 개역성경에는 차이가 없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원어상으로는 2절과 4절의 '죄'가 다른 단어로 되어있다.
즉 2절(하마르톨로이)에서 와는 달리 4절의 '오페일레타이는 '빚진 자'라는 뜻이다.
이것에 대해서 '빚진 자'를 '죄인'에 대한 단순한 동의어라고 보는 견해(Marshall)와
열여덟 명의 희생자들이 성전에 대해 빚을 진 것이라고 보는 견해(Ewald)가 있다.
즉 이들은 빌라도의 수로공사에서 사고로 죽은 것이고,
빌라도는 그 공사비를 성전에 바쳐진 돈을 빼앗아 사용한 것이므로
이 돈을 노임으로 받은 이들은 그 돈을 다시 성전에 되돌려 주어야 했다는 것이다.
[눅 13:5]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 - 3절 말씀을 반복하여
회개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눅 13:6] 이에 비유로 말씀하시되 한 사람이 포도원에 무화과나무를 심은 것이 있더니 와서 그 열매를 구하였으나 얻지 못한지라
▶ 포도원에 무화과나무를 심은 것이 있더니 와서 그 열매를 구하였으나 얻지 못한지라 - 앞부분에서는 다분히 회개하지 않을 때 내려지는 심판이 강조되었는데,
여기서부터 이어지는 비유에는 하나님께서 인내하시는 동안
회개할 것을 촉구하는 말씀이 주어지고 있다.
무화과나무는 이스라엘을 상징하는 것으로,
구약에서도 이스라엘 백성이
포도나,
(시 80:8-11 주께서 한 포도나무를 애굽에서 가져다가 민족들을 쫓아내시고 그것을 심으셨나이다
9) 주께서 그 앞서 가꾸셨으므로 그 뿌리가 깊이 박혀서 땅에 가득하며
10) 그 그늘이 산들을 가리고 그 가지는 하나님의 백향목 같으며
11) 그 가지가 바다까지 뻗고 넝쿨이 강까지 미쳤거늘;
사 5:2 땅을 파서 돌을 제하고 극상품 포도나무를 심었도다 그 중에 망대를 세웠고 또 그 안에 술틀을 팠도다 좋은 포도 맺기를 바랐더니 들포도를 맺었도다)
무화과나무로 비유되는 경우가 있었다.
(렘 24:3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예레미야야 네가 무엇을 보느냐 하시매 내가 대답하되 무화과이온데 그 좋은 무화과는 극히 좋고 그 나쁜 것은 아주 나빠서 먹을 수 없게 나쁘니이다 하니;
호 9:10 옛적에 내가 이스라엘을 만나기를 광야에서 포도를 만남 같이 하였으며 너희 조상들을 보기를 무화과나무에서 처음 맺힌 첫 열매를 봄 같이 하였거늘 그들이 바알브올에 가서 부끄러운 우상에게 몸을 드림으로 저희가 사랑하는 우상 같이 가증하여졌도다)
그렇다면 무화과나무를 심은 사람은 하나님을 비유하며
열매는 이스라엘 백성의 참된 회개를 뜻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포도원에 무화과나무를 심는 것은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니며
포도원에는 여러 가지 과실수들이 함께 심어졌다.
(왕하 18:31 너희는 히스기야의 말을 듣지 말라 앗수르 왕의 말씀이 너희는 내게 항복하고 내게로 나아오라 그리하고 너희는 각각 그의 포도와 무화과를 먹고 또한 각각 자기의 우물의 물을 마시라;
미 4:4 각 사람이 자기 포도나무 아래와 자기 무화과나무 아래에 앉을 것이라 그들을 두렵게 할 자가 없으리니 이는 만군의 여호와의 입이 이같이 말씀하셨음이라).
그런데 중요한 것은
무화과나무가 주인의 기대에 어긋나게 열매를 맺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인내에도 불구하고 회개의 열매를 맺지 못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리킨다.
[눅 13:7] 포도원지기에게 이르되 내가 삼 년을 와서 이 무화과나무에서 열매를 구하되 얻지 못하니 찍어버리라 어찌 땅만 버리게 하겠느냐 -
여기서 ‘포도원지기’(과원지기)는 예수라고 보아야 하며
이 과원지기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무화과나무는 아무런 열매를 맺지 못하였다.
이에 주인은 그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를 찍어버리라고 한다.
열매를 맺지 못한 무화과나무는
두 가지 면에서 부정적인 측면을 가지고 있는데,
하나는 과실수(果實樹)가 과실을 맺지 못하므로 스스로의 존재가치를 상실했으며,
다른 하나는 쓸데없이 자리만 차지하고 있어서 땅만 버리고 있는 것이다.
이쯤 되면 이 쓸모없는 무화과나무를 찍어버리라는 명령은 당연한 것이었다.
여기서 '찍어버림'은 그 시대에 주어지는 하나의 징벌의 수준이 아니라
영원한 파멸을 뜻한다고 보아야 하며(Marshall),
하나님의 인내가 끝날 때 가해지는 심판의 최후성을 말해주는 것이다.
(마 3:10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리라;
7:19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느니라;
21:18-20 이른 아침에 성으로 들어오실 때에 시장하신지라
19) 길 가에서 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그리로 가사 잎사귀 밖에 아무 것도 찾지 못하시고 나무에게 이르시되 이제부터 영원토록 네가 열매를 맺지 못하리라 하시니 무화과나무가 곧 마른지라
20) 제자들이 보고 이상히 여겨 이르되 무화과나무가 어찌하여 곧 말랐나이까).
[눅 13:8] 대답하여 이르되 주인이여 금년에도 그대로 두소서 내가 두루 파고 거름을 주리니
▶ 금년에도 그대로 두소서 내가 두루 파고 거름을 – 예수그리스도의
중보자적 모습이 분명히 드러나는 장면이다.
이것은 마치 멸망 받아야 할 소돔성을 위해
중보의 기도를 올렸던 아브라함의 모습을 연상시키는 것으로,
(창 18:22-32 그 사람들이 거기서 떠나 소돔으로 향하여 가고 아브라함은 여호와 앞에 그대로 섰더니
23) 아브라함이 가까이 나아가 이르되 주께서 의인을 악인과 함께 멸하려 하시나이까
24) 그 성 중에 의인 오십 명이 있을지라도 주께서 그 곳을 멸하시고 그 오십 의인을 위하여 용서하지 아니하시리이까
25) 주께서 이같이 하사 의인을 악인과 함께 죽이심은 부당하오며 의인과 악인을 같이 하심도 부당하니이다 세상을 심판하시는 이가 정의를 행하실 것이 아니니이까
26)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만일 소돔 성읍 가운데에서 의인 오십 명을 찾으면 그들을 위하여 온 지역을 용서하리라
27) 아브라함이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티끌이나 재와 같사오나 감히 주께 아뢰나이다
28) 오십 의인 중에 오 명이 부족하다면 그 오 명이 부족함으로 말미암아 온 성읍을 멸하시리이까 이르시되 내가 거기서 사십오 명을 찾으면 멸하지 아니하리라
29) 아브라함이 또 아뢰어 이르되 거기서 사십 명을 찾으시면 어찌 하려 하시나이까 이르시되 사십 명으로 말미암아 멸하지 아니하리라
30) 아브라함이 이르되 내 주여 노하지 마시옵고 말씀하게 하옵소서 거기서 삼십 명을 찾으시면 어찌 하려 하시나이까 이르시되 내가 거기서 삼십 명을 찾으면 그리하지 아니하리라
31) 아브라함이 또 이르되 내가 감히 내 주께 아뢰나이다 거기서 이십 명을 찾으시면 어찌 하려 하시나이까 이르시되 내가 이십 명으로 말미암아 그리하지 아니하리라
32) 아브라함이 또 이르되 주는 노하지 마옵소서 내가 이번만 더 아뢰리이다 거기서 십 명을 찾으시면 어찌 하려 하시나이까 이르시되 내가 십 명으로 말미암아 멸하지 아니하리라)
예수가 지니고 있는 신적인 인내와 자기 백성에 대한 애정을 나타낸다.
'두루 파고'에서 '파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스캐토'는
뿌리 주변에 있는 흙을 긁어 부드럽게 해주는 것이다.
뿌리 주변의 흙을 부드럽게 해주고 거름을 주는 이 특별한 배려(配慮)는,
열매를 맺어야 하는 기간이 3년이나 지나도록 전혀 과실을 맺지 못하는
나무에게는 적합하지 않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형편없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특별한 정성을 쏟음으로써
끝까지 희망을 버리지 않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는 유대인들의 죄악에도 불구하고 예수의 궁극적 관심은
심판에 있는 것이 아니라 구원에 있음을 보여준다.
(23:34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
[눅 13:9] 이 후에 만일 열매가 열면 좋거니와 그렇지 않으면 찍어버리소서 하였다 하시니라.
▶ 만일 열매가 열면 좋거니와 그렇지 않으면 찍어버리소서 - "만일 실과가 열면 좋거니와"는 표현하고자 하는 바 강조하기 위하여 문장을 완결짓지 않고
중간에 끝맺는 돈절법(頓絶法)적인 표현이다.
과원지기는 나무가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조건을 만들어 줄 수는 있지만
열매를 맺는 것은 나무의 상태에 달린 문제이다.
마찬가지로 예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회개할 수 있도록
기간을 연장해 주고 잘못된 점을 지적해 줌으로써 조건을 만들어 줄 수는 있지만
회개를 하느냐 안하느냐의 결정은
개인의 주체적 판단에 의한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회개할 수 있도록 유보(留保)해둔 심판까지의 기한은
분명히 한정되어 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