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의 모범'의 계속
누가복음 11장 13절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
11장 5-8절 또 이르시되 너희 중에 누가 벗이 있는데 밤중에 그에게 가서 말하기를 벗이여 떡 세 덩이를 내게 꾸어 달라
6) 내 벗이 여행중에 내게 왔으나 내가 먹일 것이 없노라 하면
7) 그가 안에서 대답하여 이르되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문이 이미 닫혔고 아이들이 나와 함께 침실에 누웠으니 일어나 네게 줄 수가 없노라 하겠느냐
8)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비록 벗 됨으로 인하여서는 일어나서 주지 아니할지라도 그 간청함을 인하여 일어나 그 요구대로 주리라,
18장 1-8절 예수께서 그들에게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할 것을 비유로 말씀하여
2) 이르시되 어떤 도시에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는 한 재판장이 있는데
3) 그 도시에 한 과부가 있어 자주 그에게 가서 내 원수에 대한 나의 원한을 풀어 주소서 하되
4) 그가 얼마 동안 듣지 아니하다가 후에 속으로 생각하되 내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나
5) 이 과부가 나를 번거롭게 하니 내가 그 원한을 풀어 주리라 그렇지 않으면 늘 와서 나를 괴롭게 하리라 하였느니라
6) 주께서 또 이르시되 불의한 재판장이 말한 것을 들으라
7)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그들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8)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
누가복음 11장 13절은, 예수의 말씀으로서 전해 말하고 있다.
'너희가 악한 자인데도, 좋은 것을 너희 자녀에게 줄줄 안다.
하물며 하늘에 계시는 너희 아버지는,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으랴'고.
이 일절의 중요한 부분은 그 후반이다.
그리고 주해자는 이것을 다음과 같이 해석하는 것을 상례로 한다.
즉, '하물며 하늘에 계시는 너희 아버지는 성령을 구하는데 이것을 주시지 않으랴'고.
하지만, 이는 예수께서 말씀하시고자 하는 바는 아니였음을
전절과의 관계에서 볼 때 분명하다.
이 세상의 아버지까지도 그 자식에게 좋은 것을 줄줄 안다.
하물며 하늘에 계시는 너희 아버지는,
구하는 자에게 그의 최선의 것인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성령을 구하는 자에게 이것을 주신다는 것은 아니다.
아버지에게 구하는 자에 대해서는,
그는 최선의 은사(사물)인 성령으로써 응답해 주신다는 것이다.
지금, 시험 삼아 여기 성부에게
이 세상의 행복을 구하는 자있다고 할 것인가,
혹은 가택, 혹은 전답, 혹은 사업, 혹은 건강을 그에게 구하는 자 있을 것인가,
성부는 때로 이것을 주시지만도,
또 때로는 이것을 주시지 않는 것이다.
성부는 구하는 자에게
아무 것이든 모두 이것을 준다고는 약속치 않는 것이다.
하지만 그는 기도로써 그의 보좌로 나오는 자를 결코
공수로는 돌려보내시지 않는다고 약속하시는 것이다.
그리고 사람의 기구에 응하시는 하나님의 은사는
하나님 상응(correspondence)의 것으로서,
그것은 성령이시라는 것이다.
이 세상의 아버지는 원래 하나님 앞에는 죄인이고,
죄 중에 생장하여, 죄를 그 특성으로 하는 자 이지만도,
그 아들이 빵을 구하는 때에 돌을 주지 않고,
생선을 구하는 때에 뱀을 주지 않으며,
달걀을 구하는 때에 전갈(scorpion)을 주지 않고,
반드시 그 자식이 구하는 것을 준다.
하물며, 그 자신
사랑과 빛과 참이시며, 빛을 옷 입듯 두르시고,
(시편 104:21 젊은 사자들은 그들의 먹이를 쫓아 부르짖으며 그들의 먹이를 하나님께 구하다가),
사랑을 그 표지(attitude)로 하시는
하늘에 계시는 너희 아버지는,
(아가 2:4 그가 나를 인도하여 잔칫집에 들어갔으니 그 사랑은 내 위에 깃발이로구나),
너희에게 ∽ 라는 것이다.
하늘의 아버지를 세상의 아버지에 비교하여,
하나님은 사람 같다고 한 것은 아니다.
사람인 아버지로서 그 자식이 구하는 것을 준다고 하면,
하물며, 하늘의 아버지는,
그 자식이 구하는 것보다 이상의 것을 주시지 않겠느냐고,
예수는 여기서 가르치신 것이다.
'하물며 하늘에 계시는 너희 아버지는,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으랴'
성부에게 구할 것인가?
그는 구하는 자의 요구 이상의 것으로서 그 기구(祈求)에 응하시는 것이다.
즉 성령으로서 이에 응하시는 것이다.
부를 구하는 자에게 부를 주시기 않을지 모르나,
그렇지만 성부를 사랑하고 그를 믿고 그에게 구하는 부를 주시지 않는대도,
이 세상의 부보다 훨씬 귀하고 생명의 근원이 되는 성령을 주신다.
혹은 지식을 구하여 지식을 얻지 못하고,
혹은 평안을 구하여 평안을 얻지 못하고,
혹은 건강을 구하여 건강을 얻지 못하고,
아니, 그 정 반대로,
부를 구한 때에 빈이 오고,
평안을 구한 때에 슬픔이 오고,
건강을 구한 때에 병이 오는 경우 있다 해도,
하지만 이는 사랑하는 아버지께서 한마디로 그 자식들의 기원을
거절하여 그들을 물리치시는 때문이 아니다.
아니, 그는 그들의 기원 이상으로 그들을 복(은혜)주시고,
성령을 그들에게 주시어, 그들을 기쁘게 하시는 것이다.
실로, 우리들은 무엇을 구해야 할지를 모르는 것이다.
다만 목전의 요구에 따라, 이것저것 요구 되는대로 구하는 것이다.
하지만 하늘에 계시는 우리들의 아버지는
정확하게 우리들의 요구를 아시는 것이다.
그것은 그 자신이시다. 생명의 영이시다. 성령이시다.
한없이 사는 영으로서, 이것을 받아,
사람은 이 세상에서부터 불멸의 역(驛)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실로,
'하나님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해 예비하시는 것은
눈으로 아직 보지 못하고, 귀로 아직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에 아직 생각되지 못했던 것이다'(고린도전서 2:9일역)란다.
하나님은 자기를 사랑하는 자에게 의외의 은사를 내려주시어
그를 놀라게 하시는 것이다.
그는 신자에게 성령을 주시어,
그로 하여금 예기 이상으로,
옳다, 훨씬 예기 이상으로, 만족케 하시는 것이다.
그러면 기도가 응답되지 못한대서 무엇을 슬퍼하랴.
하나님은 기도하는 그 마음을 가납(acceptance)하시어,
이에 보상하심에, 그가 하나님으로서 주시는 최대의 은사(선물)인
성령으로 하시는 것이다.
하나님께 복 받고 복 받지 못함은,
이 은사의 유무에 따라 아는 것이다.
부한 자 반드시 복 받은 자가 아니다.
가난한 자 반드시 복된 자 아니다.
성령을 받은 자가 복된 자로서,
이것을 받지 못한 자가 복되지 못한 자인 것이다.
세상에는 과학과 철학의 지식에 족하면서도,
성령을 받지 못한 까닭에,
하나님에 대해서는 아주 무지한 자가 있다.
옳다.
신학에 깊으면서 신앙에 얕은 그리스도 신자도 역시 적지 않다.
옳다.
성령의 은사에 비교해 볼 때,
생명 그것도 이보다 귀하지는 않다.
가령 우리들의 사랑하는 자가 우리들의 간절한 기원에 반하여,
병으로 쓰러져 죽어간대도,
만약 그 최후(임종)에 있어서 그 얼굴에 천사의 빛을 비추고,
성령이 확실히 그 마음에 임한 것을 증거 한다면,
우리들은 그의 경우에 있어서,
죽음이 생보다 나은 은혜임을 믿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께 기도하여 응답 받았다고 기뻐하는 자는,
어떻게 응답된 것인지,
그것에 대하여 깊이 생각해야 할 것이다.
사업의 성공을 기도하여 성공했기 때문에 기뻐하는 자,
병의 회복을 기도하여 회복되었기 때문에 기뻐하는 자,
생애의 평안을 기도하여 평안을 얻었기 때문에 기뻐하는 자는,
그 자식의 영달을 예수께 기도한 세베대의 아들들의 어머니처럼
'기도하는 바를 모르는 자'(마태복음 20:20이하)이다.
그리고 만약 하늘에 계시는 우리 아버지는
그 자녀가 기도하는 대로를 응답해주시는 이라면,
그는 실로 아주 무자비하신 아버지로서,
아버지로 우러러 모시기에 족하지 못한 것이다.
하지만, 복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이신 우리들의 하나님,
그는 구하는 자에게는 성령을 주신다는 것이다.
죄를 깨끗이 하는 영, 하나님을 아는 영,
죽음에 이기는 영, 한없이 사랑하는 영을 주신다는 것이다.
그리고 진심으로서 하나님께 따르는 자로서,
이 은사를 놓진(잃은)자는 없는 것이다.
하나님을 믿음으로서 반드시 부귀는 오지 않는 것이다.
대개의 경우에 있어서는, 그 정반대의 빈과 비천이 오는 것이다.
하나님을 믿음의 보수는 반드시 가정의 행복,
사업의 성공이 세상의 칭양은 아닌 것이다.
대개의 경우에 있어서는,
그 정반대인 불행의 약속, 사업의 실패,
이 세상의 배척(rejection)이,
신앙의 결과로서 우리들의 몸에 임하는 것이다.
옳다.
신앙은 반드시 병을 고치는 것 아니다.
생명을 연장시키는 것 아니다.
신앙은 이러한 것을 구하여 그 하나도 얻지 못하는 경우가 있는 것이다.
그러면 기도는 무익한가 하면, 결코 그렇지는 않은 것이다.
하나님은 성령의 은사로서 그의 모든 요구에 응하시는 것이다.
그의 기도는 응답 받지 못하고 있는 동안에 더욱더 응답 받고 있는 것이다.
성령은 그의 마음에 임하고 있는 것이다.
그의 마음눈은 서서히 열리고 있는 것이다.
그는 땅의 것을 잃고 있는 동안에 하늘의 것을 얻고 있는 것이다.
그는 이 세상의 친구에게서 떠나고 있는 동안에
하나님과 그리스도에 가까이 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사람에게 배척되고 있는 동안에 성부에게 사랑되고 있는 것이다.
그의 육이 썩고 있는 동안에 그의 영은 소생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자기에게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일에 있어서 그는 결코 실수하지 않는 것이다.
성령의 획득은 신앙필연의 보수라고 결코 틀리지 않는 것이다.
이에 있어서, 예수께서 종종 제자들에게,
기도에 인내의 필요를 말씀하신 그 이유가 이해되는 것이다.
같은 누가복음의 제11장 5절 이하 8절까지가 이 교훈의 1이다.
동 제18장 1절 이하 8절까지가 그 2이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이 친구라는 이유로서는 일어나서 주지 않는대도,
간곡히 청하는 까닭에 그 청구를 따라 일어나 줄 것이다'(11:8일역)라고 있다.
또
'하나님은 주야 기도하는 바의 그 택하신 자를,
오랫동안 참으시지 만도 이것을 구언 하지 않겠느냐'(18:7일역)고 있다.
'줄 것이다'란 '성령을 줄 것이다'라는 말이다.
'구원하지 않으랴'는
'그 기도에 응답하여 성령을 내려,
그 모든 요구를 채우시지 않으랴'는 것이다.
하나님은 능히 사람의 모든 요구를 채우시는 길을 아시는 것이다.
그리고 사람은 하나님으로부터 성령을 받을 때 비로소
참된 의미에 있어서의 만족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이다.
전 세계를 자기 것으로 한대도 얻을 수 없는 만족을,
그는 성령을 받음으로서 비로소 아는 것이다.
시인 괴테(4권 7역주)의 재능과 축적(accumulation)으로서 한 대도
언제나 마음의 공허를 탄식하여 마지않음에 대하여,
그리스도의 무학 한 종의 1인은, 마음에 성령의 은사를 받아,
차고 넘치는 환희와 만족을 느끼는 것이다.
그러면 기도할진저.
방심 말고, 한결같이 기운 상실 말고,
악마와 세상과 박(薄)신자에게 조소되면서도 기도할진저.
사람은 기도하여 부자로 될 수는 없다.
또 기도하여 학자로 될 수는 없다.
또 기도하여 권자로 될 수는 없다.
또 기도하여 용사로 될 수는 없다.
하지만 그는 기도하여 크리스천으로 될 수가 있다.
기도의 특별한 효력은 여기에 있는 것이다.
성령을 받고자 하지 않고서, 기타의 것을 구할 때,
우리들은 실망치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교회는 우리로 하여금 성령 이외의 것을 구하게 하여,
몇 번이고 우리를 신앙의 위지(dangerous place)에 빠뜨렸던 것이다.
*내촌감삼의 (1915년 3월 '성서지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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