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리새인의 외식
성 경: [눅 11:37-41] 예수께서 말씀하실 때에 한 바리새인이 자기와 함께 점심 잡수시기를 청하므로 들어가 앉으셨더니
38) 잡수시기 전에 손 씻지 아니하심을 그 바리새인이 보고 이상히 여기는지라
39) 주께서 이르시되 너희 바리새인은 지금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나 너희 속에는 탐욕과 악독이 가득하도다
40) 어리석은 자들아 겉을 만드신 이가 속도 만들지 아니하셨느냐
41) 그러나 그 안에 있는 것으로 구제하라 그리하면 모든 것이 너희에게 깨끗하리라.
[눅 11:37] 예수께서 말씀하실 때에 한 바리새인이 자기와 함께 점심 잡수시기를 청하므로 들어가 앉으셨더니
▶ 한 바리새인이 자기와 함께 점심 잡수시기를 청하므로 들어가 앉으셨더니 -
여기 한 바리새인이 예수를 식사에 초대한 것은
모종의 적대 의식 또는 반감을 가지고
책잡기 위해 끌어들인 것은 아니었다고 짐작된다.
'점심 잡수시기'에 사용된 동사 '아리스테세'는
'먹다'는 의미의 '아리스타오'의 과거형으로 정확하게 말해서
이 말의 뜻은 하루의 첫 번째 식사를 가리킨다.
보통의 상류층 유대인들도 평일에 하루 두 끼의 식사를 한다.
한 번은 늦은 아침에 가볍게 하고(아리스톤),
또 한 번은 늦은 오후에 하는 데 이것이 주식사이다(데이프논).
안식일에는 세 차례의 식사를 하는데,
예배가 끝난 후에 먹는 점심을 가장 잘 차린다.
이렇게 볼 때 예수께서 초대받은 식사는
첫 식사라는 의미에서 '아침'이며,
시간상 점심이라고 할 수도 있는 것이다.
(요 21:12 예수께서 이르시되 와서 조반을 먹으라 하시니 제자들이 주님이신 줄 아는 고로 당신이 누구냐 감히 묻는 자가 없더라,
15 그들이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
'앉으셨더니'(아나퓨토)는 비스듬히 누워서 음식을 먹는
유대인들의 식사 자세를 묘사한 것이다.
[눅 11:38] 잡수시기 전에 손 씻지 아니하심을 그 바리새인이 보고 이상히 여기는지라
▶ 손 씻지 아니하심을 그 바리새인이 보고 이상히 - 막 7:2에는 제자들이
손을 씻지 않고 음식을 먹었다가 바리새인들과 부딪친 일이 기록되어 있는데,
(막 7:2 그의 제자 중 몇 사람이 부정한 손 곧 씻지 아니한 손으로 떡 먹는 것을 보았더라)
여기서는 예수 자신이 손을 씻지 않고 식사에 임함으로 문제가 되고 있다.
여기서 '씻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배티조'는
'담그다', '적시다'의 의미로서
규례에 따라 식사 전에 물그릇에 손을 담그는 것을 뜻한다.
이 행위는 당시 하나의 예의요 관습이었고,
단순히 위생상의 문제뿐만 아니라 죄많은 세상과
접촉함으로 인해서 생기는 불결을 제거하기 위한 결례(潔禮)였다.
아무튼 이 제의적(祭儀的) 식사 관습은 바리새인 뿐 아니라
일반 유대인들도 철저히 지켰던 규범이었다.
(막 7:3-4 (바리새인들과 모든 유대인들은 장로들의 전통을 지키어 손을 잘 씻지 않고서는 음식을 먹지 아니하며
4) 또 시장에서 돌아와서도 물을 뿌리지 않고서는 먹지 아니하며 그 외에도 여러 가지를 지키어 오는 것이 있으니 잔과 주발과 놋그릇을 씻음이러라)).
따라서 이 유전을 무시한 예수의 행위는
그 바리새인에게 파격적인 것으로 다가왔다.
예수의 이러한 행위는 유대인들의 유전에 대한 무지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저들의 형식적이고 외식적인 악습을
질책하기 위한 의도적인 것이었다 할 수 있다.
[눅 11:39] 주께서 이르시되 너희 바리새인은 지금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나 너희 속에는 탐욕과 악독이 가득하도다
▶ 겉은 깨끗이 하나 너희 속에는 탐욕과 악독 - 예수는 '주'(호 퀴리오스)로서
말씀하시며, 그 대상은 예수를 식사에 초대한 바리새인을 넘어
전체 바리새인들에게로 확대된다.
예수는 자신을 초청한 사람을 면전에 두고
매우 강한 어조로
그들의 위선을 비판하고 있는데
마태의 경우는 '화 있을진저'라는 저주 형식으로 기록되어 있다.
(마 23:25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되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게 하는도다)
이들은 종교적인 거룩함을 보이려고 그릇의 겉을 닦듯이
철저히 예식을 엄수함으로써 자신들의 외양을 포장하지만
그 속은 탐욕과 이기심으로 가득한
위선자들이라는 것이다.
탐욕은 '강탈', '약탈'의 의미를 포함한다.
또한 '악독'은 '악한 자'를 뜻하는 말이다.
이는 바리새인들이 겉으로는 종교적 순결성을 지닌 것처럼 보이나
그 중심은 얼마나 욕심이 많고 악한 자들인가를
잘 표현해 주는 말이다.
[눅 11:40] 어리석은 자들아 겉을 만드신 이가 속도 만들지 아니하셨느냐
▶ 어리석은 자들아 - 겉만 깨끗하게 포장을 하면
속의 추악함이 감추어 질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면
그것이야말로 하나님 앞에서 용납될 수 없는
어리석은 짓임에 틀림없는 일이다.
왜냐하면 창조자의 눈에는 피조물들의 모든 것이
적나라하게 드러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마 10:26 그런즉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은 것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느니라).
[눅 11:41] 그러나 그 안에 있는 것으로 구제하라 그리하면 모든 것이 너희에게 깨끗하리라.
▶ 그 안에 있는 것 - 이에 관하여 여러 해석이 있다.
(1) 잔과 접시 속에 있는 것, 곧 호화 음식으로 봄.
그러면 그 의미는
"호화로운 잔치를 벌이지 말고 그 식물을 가난한 자에게 나누어 주라",
"잔 속에 있는 것을 구제물로 주라 그러면 모든 것이 깨끗하리라"(NEB)가 된다.
(2) 이를 부사적 대격으로 해석하여
"마음으로부터 자선을 베풀라"의 뜻으로 본다(N.Turner).
(3) "네가 모아둔 것으로 구제하라 그리하면 즉시 너의 소유물이 깨끗해 질것이다". (J.Knox).
(4) 누가가 기록한 '구제하라'는 아람어 '깨끗이 하다'(dakki)를
'자선을 베풀다'(zakki)로 오역한 것이라는 해석(Wellhausen).
이러한 세 가지 해석들은 각각 나름대로의 타당성을 갖고 있으며
39절과의 연관성에 비추어 볼 때 (2)의 견해가 가장 합당해 보인다.
왜냐하면 바리새인들은 그 마음에 탐욕과 악독이 가득할 뿐 아니라
그러한 마음의 필연적인 결과로 부정한 재물을 축적했음에 틀림없다.
이렇게 볼 때 그들에게 요청되는 것은
탐욕과 악독을 버리고
마음에서 우러나는 진심으로 부정한 재물을 모두 되돌려주는 것이며,
더 나아가 '구제'라는 말에 적합하게
자신들이 정당하게 모은 것에 대해서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줌으로써
마음의 깨끗함을 스스로 확인해야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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