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11월 1일 월요일

예수께서 한 마을에 들어가시매 마르다라 이름하는 한 여자가 자기 집으로 영접하더라

  

마리아와 마르다

 

성 경: [10:38-42] 그들이 길 갈 때에 예수께서 한 마을에 들어가시매 마르다라 이름하는 한 여자가 자기 집으로 영접하더라

39) 그에게 마리아라 하는 동생이 있어 주의 발치에 앉아 그의 말씀을 듣더니

40) 마르다는 준비하는 일이 많아 마음이 분주한지라 예수께 나아가 이르되 주여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시나이까 그를 명하사 나를 도와 주라 하소서

41) 주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42) 몇 가지만 하든지 혹은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10:38] 그들이 길 갈 때에 예수께서 한 마을에 들어가시매 마르다라 이름하는 한 여자가 자기 집으로 영접하더라

 

길 갈 때에 예수께서 한 마을에 - '길 갈 때에'라는 모호한 표현은

장소와 시점 그리고 앞부분과의 관련성에 대해서는

아무런 단서도 제공하지 않는다.

 

'한 마을'이라는 표현 역시

누가가 장소에 대한 정확성에 집착하지 않고 있음을 보여주는 개괄적인 표현이다.

 

'한 마을'은 요 11:112:1에 의하면 '베다니'라는 마을이며

이 마을은 예루살렘 동쪽에 있는 감람산(the Mount of Olives)

동쪽 기슭에 위치한 마을로 예루살렘에서 3km정도 떨어진 거리에 있었다.

 

그런데 누가는 이 마을이 예루살렘 가까이에 있다는 사실을 밝히지 않았다.

아마 누가는 예수가 예루살렘과 그 인근 지역에서 사역한 것에 관해서는

이후에 언급하려는 의도를 갖고 있었을 것이다.

 

(13:32-33 이르시되 너희는 가서 저 여우에게 이르되 오늘과 내일은 내가 귀신을 쫓아내며 병을 고치다가 제삼일에는 완전하여지리라 하라

33) 그러나 오늘과 내일과 모레는 내가 갈 길을 가야 하리니 선지자가 예루살렘 밖에서는 죽는 법이 없느니라;

 

17:11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실 때에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로 지나가시다가;

 

19:28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예루살렘을 향하여 앞서서 가시더라).

마르다라 이름하는 한 여자가 자기 집으로 영접하더라 마르다의

자연스러운 영접과 이어지는 이야기의 전개는

예수와 그들이 초면이 아니었음을 암시한다.

 

(11:5 예수께서 본래 마르다와 그 동생과 나사로를 사랑하시더니).

 

이 마르다는 마리아의 언니이며 나사로의 동생이다.

 

(39 그에게 마리아라 하는 동생이 있어 주의 발치에 앉아 그의 말씀을 듣더니;

 

11:19-20 많은 유대인이 마르다와 마리아에게 그 오라비의 일로 위문하러 왔더니

20) 마르다는 예수께서 오신다는 말을 듣고 곧 나가 맞이하되 마리아는 집에 앉았더라;

 

12:2-3 거기서 예수를 위하여 잔치할새 마르다는 일을 하고 나사로는 예수와 함께 앉은 자 중에 있더라

3) 마리아는 지극히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의 발을 닦으니 향유 냄새가 집에 가득하더라).

 

나사로는 죽었다가 예수의 도움으로 살아난 일이 있으며,

 

*참조 : (11-12)

 

마리아는 예수의 몸에 향유를 부은 일이 있는데,

그 만큼 이들 가족은 예수와 각별한 사이였다.

 

여기서는 예수를 영접하는 주체로 마르다가 등장하는데 우연히도

'마르다'라는 이름은 '여주인'이라는 뜻으로 아람어의 여성 명사이다.

 

성경에 그녀의 남편이 있다는 것에 대한 어떠한 암시도 없으며

단지 마 26:6에 근거하여 그가 문둥이 시몬의 아내일 것이라고

막연하게나마 추측할 수 있을 뿐이다.

 

(26:6 예수께서 베다니 나병환자 시몬의 집에 계실 때에)

 

 

[10:39] 그에게 마리아라 하는 동생이 있어 주의 발치에 앉아 그의 말씀을 듣더니

 

주의 발치에 앉아 그의 말씀을 듣더니 - 마르다와 마리아의 모습은

12장에서의 모습과 병행을 이룸을 알 수 있는데,

여기서도 마르다는 예수를 위하여 음식을 마련하고,

 

(12:2 거기서 예수를 위하여 잔치할새 마르다는 일을 하고 나사로는 예수와 함께 앉은 자 중에 있더라)

 

마리아는 예수 곁에서 그에게 향유를 붓는다.

 

(12:3 마리아는 지극히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의 발을 닦으니 향유 냄새가 집에 가득하더라).

 

여기서 '앉아''곁에 앉다'로 제자가 스승의 발치에 앉아

교훈을 듣는 자세를 묘사하는 말이다.

 

(22:3 나는 유대인으로 길리기아 다소에서 났고 이 성에서 자라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우리 조상들의 율법의 엄한 교훈을 받았고 오늘 너희 모든 사람처럼 하나님께 대하여 열심이 있는 자라).

 

이것은 마리아가 마치 학생이 스승에게 가르침을 받듯이

예수에게 진리의 말씀을 들으려고 매우 열심이 있었음을 뜻한다.

 

이는 마리아의 태도를 묘사한 '듣더니'가 미완료 능동태로 되어 있는

것에서도 잘 드러나는 바 그녀는 다른 일에 관심을 돌리지 않은 채

열심히 계속해서 주의 말씀을 경청하였던 것이다.

 

한편 마리아를 가리켜 '발 아래 여인'이라는 별칭으로 부르기도 하는데

이는 그녀가 예수의 발 아래서 그의 말씀을 들었고(본절),

죽은 오라비를 위해 예수의 발 아래 엎드려 간구했고,

 

(11:32 마리아가 예수 계신 곳에 가서 뵈옵고 그 발 앞에 엎드리어 이르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하더라),

 

예수의 발 아래 앉아 그에게 향유(perfume, NIV)를 부었기 때문이다.

 

(12:3 마리아는 지극히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의 발을 닦으니 향유 냄새가 집에 가득하더라).

 

 

[10:40] 마르다는 준비하는 일이 많아 마음이 분주한지라 예수께 나아가 이르되 주여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시나이까 그를 명하사 나를 도와 주라 하소서

 

마르다는 준비하는 일이 많아 마음이 분주한지라 - 마르다의 바쁜 모습은

그녀가 예수께 대단한 정성을 쏟았음을 보여준다.

 

여기서 '분주한지라''사방에서 끌어당기다'는 의미로

그녀의 바쁜 상태가 어느 정도인가를 생생하게 나타낸다.

 

이렇게 바쁜 마르다의 모습과

예수의 발 아래 앉아 그의 말씀을 조용히 듣고 있는 마리아의 모습은

뚜렷한 대조를 보인다.

 

마르다도 마리아처럼 예수의 말씀을 듣고 싶지 않은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예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는 그분이 먹고 마실 수 있도록

음식을 장만하는 일이 더 중요한 일이라고 판단하여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고 짐작된다.

 

명하사 나를 도와 주라 하소서 - 아마 마르다는 혼자서 음식을

준비하기에는 너무 바쁘니 와서 도와 달라고 마리아에게

신호를 보내기도 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의 말씀에 너무 열중인 나머지

그녀의 요청을 거들떠보지도 않는 마리아의 태도에 화가 난 마르다는

마침내 예수에게 직접 이의를 제기하고 있는 듯하다.

 

이러한 마르다의 이의 제기에는 다음과 같은 의미가 들어 있을 것이다.

 

(1) 자신이 그렇게 바쁜데도 불구하고 전혀 자기를

도우려 하지 않는 마리아에 대한 간접적인 책망이 있을 것이고,

 

(2) 그러한 사실을 알고서도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는

예수님의 무관심에 대한 원망이 있으며,

 

(3) 적어도 지금의 상황에서 음식을 마련하는 자신의 판단과 행위가

가장 옳다고 하는 확신에 의해,

아무것도 하지 않고 예수의 말씀만 듣고 있는 마리아에 비해

자기가 지금 얼마나 옳은 일을 하고 있는가를 은연중 과시하려는

마르다의 생각이 담겨있다고도 볼 수 있다.

 

 

[10:41] 주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 마르다의 이름을

두 번에 걸쳐 부르는 이중 호격의 사용은

예수께서 마르다의 정성스런 행위 자체에 대해서는

동정적인 마음을 가지고 계셨음을 암시한다.

 

'염려하고'라는 표현은 '흩어지다''나누어지다'는 의미의 헬라어

'메리조'에서 파생된 것으로 과도한 욕구로 인해

어지럽게 분열된 심적 상태를 나타낸다.

 

또한 '근심하나''문제를 야기 시키다'는 뜻으로,

이것 역시 자기가 스스로를 괴롭게 하는 것이다.

 

물론 예수께 대한 열심으로 말하면

마르다(Martha)나 마리아(Mary)가 매일반(每一般)이었다.

 

하지만 마르다는 육체적인 배고픔을 해소해 줄 먹을거리 보다는

영혼을 배부르게 하는 생명 양식인

하나님의 말씀이

더 소중하고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아야했다.

 

(119:103-105 주의 말씀의 맛이 내게 어찌 그리 단지요 내 입에 꿀보다 더 다니이다

104) 주의 법도들로 말미암아 내가 명철하게 되었으므로 모든 거짓 행위를 미워하나이다

105)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

 

 

[10:42] 몇 가지만 하든지 혹은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몇 가지만 하든지 혹은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 본문은 해석이 난해한

구절로서 각 사본들에도 다양하게 표현되는 부분이다.

 

아무튼 본문에서 중요한 것은 '몇 가지''한 가지'를 어떻게 해석하느냐이다.

여기에는 두 가지 견해가 있다.

 

(1) 둘 다 음식의 가지 수로 보는 견해.

이렇게 볼 때 예수의 말씀은 다음과 같이 이해될 수 있다.

즉 마르다는 너무 많은 종류의 음식을 만들려 했기 때문에 바쁜 것이니만큼

음식의 가지 수를 몇 가지로 줄이거나 또는 한 가지만 하여도 족하다는 것이다.

 

(2) 전자는 물질적인 것을, 후자는 영적인 것을 뜻한다고 본다.

여기서는 예수께서 접대 행위 자체보다는 영적인 것에 관해 가르쳤다는

디벨리우스의 견해에 따라 (2)의 견해(見解)가 더 타당하다고 본다.

 

그렇다면 여기서는 예수께서 물질적인 것 자체를

부인하지는 않았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한다.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 마리아로 하여금

자기를 돕도록 명하여 달라는 마르다의 요청은 거부되며

오히려 마르다가 마리아의 태도를 따라야 한다는 의미로 대답이 주어진다.

 

예수를 섬기는 적절한 방법은

필요 이상으로 지나친 물질로써가 아니라

그분의 말씀에 동참함으로써 섬기는 것이다.

 

한편 이 이야기는 여인들의 위치가 가사 일에만 국한되지 않고

여자들도 복음 사역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는 관점에서 이해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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