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11월 16일 화요일

너희가 박하와 운향과 모든 채소의 십일조는 드리되 공의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은 버리는도다

  

여섯 가지 화

 

성 경: [11:42-44] 화 있을진저 너희 바리새인이여 너희가 박하와 운향과 모든 채소의 십일조는 드리되 공의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은 버리는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43) 화 있을진저 너희 바리새인이여 너희가 회당의 높은 자리와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을 기뻐하는도다

44) 화 있을진저 너희여 너희는 평토장한 무덤 같아서 그 위를 밟는 사람이 알지 못하느니라.

 

 

[11:42] 화 있을진저 너희 바리새인이여 너희가 박하와 운향과 모든 채소의 십일조는 드리되 공의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은 버리는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박하와 운향과 모든 채소의 십일조 - 여기서부터는 '화 있을진저'로 시작해서

여섯 가지의 화()가 바리새인과 율법사들에게 선포되는데,

이 문구에는 '저주' 또는 '복수'의 의미라기보다는

'탄식'의 뜻이 들어 있다.

 

(10:13 화 있을진저 고라신아, 화 있을진저 벳새다야, 너희에게 행한 모든 권능을 두로와 시돈에서 행하였더라면 그들이 벌써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하였으리라).

 

본문에서는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의 근본정신을 사장(死藏)시킨 채

그 형식에만 집착함으로써 성스러운 하나님의 율법을 박재화시킨

바리새인들의 형식주의를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다.

 

본래 구약의 율법은 곡식, 포도주, 기름과 같은 주요 농산물과

가축에 대한 십일조를 규정하고 있다.

 

(27:30-33 그리고 그 땅의 십분의 일 곧 그 땅의 곡식이나 나무의 열매는 그 십분의 일은 여호와의 것이니 여호와의 성물이라

31) 또 만일 어떤 사람이 그의 십일조를 무르려면 그것에 오분의 일을 더할 것이요

32) 모든 소나 양의 십일조는 목자의 지팡이 아래로 통과하는 것의 열 번째의 것마다 여호와의 성물이 되리라

33) 그 우열을 가리거나 바꾸거나 하지 말라 바꾸면 둘 다 거룩하리니 무르지 못하리라;

 

14:22-29 너는 마땅히 매 년 토지 소산의 십일조를 드릴 것이며

23) 네 하나님 여호와 앞 곧 여호와께서 그의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에서 네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의 십일조를 먹으며 또 네 소와 양의 처음 난 것을 먹고 네 하나님 여호와 경외하기를 항상 배울 것이니라

24) 그러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자기의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이 네게서 너무 멀고 행로가 어려워서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풍부히 주신 것을 가지고 갈 수 없거든

25) 그것을 돈으로 바꾸어 그 돈을 싸 가지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택하신 곳으로 가서

26) 네 마음에 원하는 모든 것을 그 돈으로 사되 소나 양이나 포도주나 독주 등 네 마음에 원하는 모든 것을 구하고 거기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너와 네 권속이 함께 먹고 즐거워할 것이며

27) 네 성읍에 거주하는 레위인은 너희 중에 분깃이나 기업이 없는 자이니 또한 저버리지 말지니라

28) 매 삼 년 끝에 그 해 소산의 십분의 일을 다 내어 네 성읍에 저축하여

29) 너희 중에 분깃이나 기업이 없는 레위인과 네 성중에 거류하는 객과 및 고아와 과부들이 와서 먹고 배부르게 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손으로 하는 범사에 네게 복을 주시리라).

 

물론 여기에는 땅 위에서 소출하는 모든 것이라는 개념이

포함되어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랍비적 규범은 십일조를 아주 사소한 것까지 세분화하였는데,

심지어는 땔 나무까지 십일조를 드려야 한다고 요구한다(Mishna).

 

이런 것 자체가 벌써 바리새인들의 형식주의와 맹목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여기서는 바리새인들이 바친 십일조의 세 항목이 열거되고 있는데,

 

'박하'(헤두오스몬)는 정원에서 재배하는 식물로 그 향기가 좋으며,

'운향'(폐가논)은 회록색의 잎과 노란 꽃을 가진 식물이다.

 

마태의 평행 본문에는

 

(23:23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회향'(아네돈)으로 되어 있는데

이것은 이논드 향료(anethum graveolens)를 가리킨다.

 

마지막 항목인 '채소'(라카논)는 어떤 특정한 종류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일반적인 총칭으로서의 채소를 뜻한다.

 

마태는 누가와 달리 특정한 종류인 '근채'(퀴미논)로 기록하고 있다.

공의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은 버리는도다 - 형식적 율법을

준수함에 있어서는 규정 이상으로 열성적이며 철저했던 바리새인들은

정작 가장 중요한 율법의 정신을 탈색시켜 버렸다.

 

여기서 '공의'(크리시스)'정의', '의로움'의 뜻으로

사회 정의와 관련된 말이며(Easton),

 

따라서 바리새인들이 가난한 사람들과 불의에 억압당하는 사람들에 대해

아무런 관심을 갖지 않았음을 지적한다.

 

'사랑'(아가페)에 대해서는,

'하나님이 보이신 사랑'에 근거하여

마음과 목숨과 힘,

그리고 뜻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고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그런 사랑을 가리킨다.

 

(10:27 대답하여 이르되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이러한 공의와 사랑을 버렸던 것이다.

 

'버리다''비켜나다', '간과하다'의 의미로 이들의 행위가

중요한 핵심을 비켜가면서 형식만을 추구하는 것이었음을 가리킨다.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아니하여야 - 예수께서 그들의 철저한 율법 준수를 부정하신 것은 아니다.

 

다만 그들이 철저하게 형식을 지키는 만큼,

그 율법의 정신에 대해서도 철저해야 한다는 것이다.

 

후자가 간과되거나 무시된 채 전자만이 지켜질 때

그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혹자는 정결법의 규절을 파기하신 예수께서,

 

(38잡수시기 전에 손 씻지 아니하심을 그 바리새인이 보고 이상히 여기는지라)

 

율법의 준수를 말하는 것이 모순이 아닌가에 대해 의문을 제기 하기도 하는데

그것은 예수를 맹목적 율법 파괴자로 오해하는 데서 오는

그릇된 문제 제기이다.

 

왜냐하면

 

(1) 예수께서는 율법 자체를 파괴하거나 반대하시지 않고,

 

(16:17 그러나 율법의 한 획이 떨어짐보다 천지가 없어짐이 쉬우리라),

 

 

(2) 결코 예수는 정신이 결여된 율법 준수를 인정하지 않으셨으며 또한,

 

(3) 율법이 규정하지도 않은 유전적(遺傳的) 규범을 거부하는 것과

정당한 목적을 가진 십일조를 인정하는 것은 전혀 모순되지 않기 때문이다.

 

 

[11:43] 화 있을진저 너희 바리새인이여 너희가 회당의 높은 자리와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을 기뻐하는도다

 

회당의 높은 자리와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 - 이번에는 바리새인들의

교만과 명예욕이 지적된다.

 

첫째로 지적되는 것은 교권적 교만으로,

그들은 공식적 예배 종교 교육 담당 기관인 회당에서

늘상 높은 자리에 앉기를 좋아했다.

 

마태의 평행 본문에는 이들이 잔치에서도 상석에 앉는 것을

좋아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23:6 잔치의 윗자리와 회당의 높은 자리와)

 

여기서 '높은 자리'(프로토카데드리아)

'가장 높은 자리'(the most important seats, NIV)로 번역하는 것이 옳다.

 

종교 지도자들로서의 바리새인들이 회당의 상석에 앉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럽고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철저하게 비판받아야 하는 것은 그들이 맡은 바 종교적 의무를

충실히 수행하는 것 보다는 특권적 우월의식(優越意式)이나

교만한 과시욕에 몰두하는 일에 더 큰 관심을 보였던 점이다.

 

둘째로 지적되는 것은 세속적 명예욕으로,

그들은 시장에서 인사 받는 것을 자신들의 특별한 존재성을

확인받는 것으로 여겼다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이 그들에게 먼저 인사하는 것은 단순한 문안 인사의

차원을 넘어 존경의 표시였다.

그들은 종교 지도자들로서 당연히 존경의 인사를 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이 의례히 존경을 받아야 한다는 착각에서 깨어나

자신들의 내면과 행위가 진정으로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서

바른 것인지를 점검해 봤어야 했던 것이다.

 

 

[11:44] 화 있을진저 너희여 너희는 평토장한 무덤 같아서 그 위를 밟는 사람이 알지 못하느니라

 

평토장(平土葬)한 무덤 - 바리새인들에 대한 세 번째 화(),

그들의 본질적 모습에 관한 것이다.

 

즉 그들은 평토장한 무덤과 같아서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억울한 부정을 범하게 만드는 악한 존재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율법에 의하면 무덤에 닿으면 칠일간 부정하게 되는데

평토장한 무덤 같이 드러나지 않는 것이라도 닿으면 부정하게 되기 때문이다.

 

(19:16 누구든지 들에서 칼에 죽은 자나 시체나 사람의 뼈나 무덤을 만졌으면 이레 동안 부정하리니).

 

본절에서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이 부패하고 썩은 무덤이라는 사실을

은폐하여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부지 중에 부정한 죄를

범하게 하는 자들로 비판되고 있다.

 

이에 비해 마태의 평행 본문에서는,

조금 다른 각도에서 서술되고 있다.

 

(23:27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

 

즉 거기서는 바리새인들이 회칠한 무덤

, 속에는 죽음과 부패함이 있으나

겉은 아름답게 치장하는 자들로 묘사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니까 본문은 그들의 은폐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이고

마태복음에서는 그들의 외부적인 치장에 비판의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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