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의 모범
누가복음 11장 1-4절 예수께서 한 곳에서 기도하시고 마치시매 제자 중 하나가 여짜오되 주여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친 것과 같이 우리에게도 가르쳐 주옵소서
2)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기도할 때에 이렇게 하라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시오며
3) 우리에게 날마다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4)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모든 사람을 용서하오니 우리 죄도 사하여 주시옵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소서 하라.
예수가 어떤 곳에서 기도하신 때,
그 끝마치기를 기다려,
제자의 한 사람, 그에게로 와서 말하기를,
'주여, 요한이 그 제자에게 가르쳐 준 것 같이, 우리에게도 기도하는 것을 가르쳐 주옵소서'라고.
예수,
그 청하는데 응하여 다음의 기도의 모범을 주셨다.
'아버지여, 이름을 거룩히 받들게끔 하옵기를 나라이 임하시옵기를
우리의 일용양식을 날마다 주옵소서 우리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우리도 또한 우리에게 (죄)진 자를 모두 용서하오매.
우리를 시험에 넘겨주지 마옵소서(2-4)' (네스틀레 편찬 그리스어 신약성서 참조)
아주 간단한 기도이다.
마태복음에 기록된 바의 것보다도 더욱 간단하다.
하지만 간단한 만큼 그것만큼 의미심장하다.
실로 기도의 모범으로서 봉대(having for the head)해야 할 것이다.
하나님께 불러 아룀에 있어서 다만 '아버지여'라고 부른다.
이것으로 충분하다.
일본역의 '하늘에 계시는 우리들의'라는 문자는 모름지기 제거해야 할 것이리라.
오늘의 종교가가 하듯 '우주 만물을 지으신 하늘에 계시는 참되신 하나님이여'라고 불러,
땅의 낮은데서 하늘의 높은데 향하여 절규할 것 아니다.
'아버지여'로 충분하다.
'내 곁에 계시는 아버지여'이다.
'내가 원하기 전에 모든 내 소원을 아시는 아버지여'이다.
'그리운 사모하는 아버지여'이다.
하나님을 단지 '아버지여'로 부를 수 있음으로,
우리들은 담대히 (주저하는 일없이) 그의 슬하에 가까이 할 수 있고,
거기서 내 모든 소원을 피력(expression)할 수가 있는 것이다.
'이름'은 성격(특유성표시)이다.
'성명'(성호)은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보여 주신바 자신의 성격이다.
성서가 보여주시는 바이고, 특히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내주신 바이다.
'이름을 거룩히 받들게'란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이신 하나님이 무엇인지 사람의 마음에 분명해 자기를’
바라는 기구이다.
하나님이 참으로 사람에게 알려지는 일,
사람이 참으로 사람에게 알려지는 일,
사람이 참으로 하나님을 알기에 이르는 일등이다.
세상에 이보다 더 원할 일은 없는 것이다.
예수가 이것을 기도의 제1위로 두신 것은 까닭 있는 것이다.
더구나 사람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에 의하지 않고서
어찌 그런 기구를 생각인들 할 수 있으랴 이다.
그리고 그리스도 강세 1900년 후의 오늘,
이 기구는 지금도 아주 필요한 것이다.
사람은 아직 하나님의 성격(특유성)을 모르는 것이다.
그리스도교 교국의 백성이라고 하는 자 까지가,
아직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이신 참된 하나님의 성격에 대하여
많은 오해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의 성격이 무엇인지를 알 때, 스스로 그리스도교국을 자처하면서
타국에 향하여 전쟁을 선고할 수는 도저히 없는 것이다.
옳다,
성명(이름)을 거룩하게 받들게 되옵기를.
하나님에 관하여 사람이 가지는 사상이 거룩하게 되기를.
사람이 참으로 하나님을 이해하기에 이를 수 있기를.
그는 무력의 하나님이 아니라,
지략의 하나님이 아니라,
사랑의 하나님이 심을 깨닫게 되기를.
스스로 인류의 죄를 지시고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야말로,
가장 완전하게 하나님을 나타내신 분임을 알기에 이를 수 있기를.
전도의 목적은 이것 외에 달리 없는 것이다.
인류의 진보는,
그들이 하나님께 대해 가지는 관념의 진보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옳다, 이름을 거룩히 받들 수 있게 되기를.
인류가 하루라도 빨리 하나님이 참으로 무엇인지에 대하여 참으로 깨닫게 되기를.
기원 제1은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히 받들게 하옵소서'(2)이다.
즉 사람의 마음에 하나님에 관한 진정한 사념(생각)이 가져질 수 있도록 이다.
기원 제2는 '나라이 임하시는 일'(2)이다.
즉 마음에 갖게 된 거룩한 사념(생각)이 사실로 되어 나타나는 일이다.
제1은 안으로 거룩해지는 일이다.
제2는, 밖으로 거룩해지는 일이다.
영에 있어서 하나님을 모시는 일이다.
육으로서 그를 나타내 모시는 일이다.
나라가 임하시옵소서 하는 기도 중에,
내 행위가 고쳐지기를,
사회에 정의가 행해지기를,
세계에 평화가 임하기를 등의 기원이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이 땅이 화하여 천국으로 되는 것과,
안으로 시작한 성령의 감화가 밖으로 미치는 일등의 기원이다.
그리고 이것은 또한 우리들의 간절한 기원임은 말할 것도 없다.
'모든 피조물의 간절한 소망은,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일이다'(로마서8:19일역)
구원은 사람의 심령에만 한하지 않는다.
그의 육체, 사회국가, 전 세계, 전 우주에까지 미쳐야 할 것이다.
나라이 임하시기를,
육체가 부활되기를,
만물이 부흥되기를,
우주가 개조되기를,
이 세상의 모든 나라가 우리들의 주님
그리스도의 것으로 되고,
그리스도가 세세 무궁토록 이것을 다스리게 되기를 원하는 기원이다.
(계시록 11:15 일곱째 천사가 나팔을 불매 하늘에 큰 음성들이 나서 이르되 세상 나라가 우리 주와 그의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어 그가 세세토록 왕 노릇 하시리로다 하니).
실로 위대한, 장미(壯美) 한 원대(광원)한 기원이다.
이 세상과 만물에 관한 기원이지만,
그러나 현세적이 아닌, 물질적이 아닌,
육욕적이 아닌 기원이다.
그리고 이 기원이 오늘 또한 매우 필요한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제20세기의 세계는 결코 그리스도의 다스리시는 세계는 아닌 것이다.
그 안에 많은 비(非) 그리스도적인 종교와 도덕이 행해질 뿐 아니라,
그리스도 교회라 칭하는 그것,
및 그리스도교국이라 칭하는 것까지가,
지금도 매우 비 그리스도적 또는 반 그리스도적인 것이다.
그들은 주여 주여 하고 부르면서 그를 경배하지만도,
그의 뜻을 알지 못하고, 이것을 행하지 않는 것이다.
그들은 이 세상의 상찬을 기뻐하고,
이 세상의 정신에 따라 모든 것을 행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라를 임하게 하옵소서'의 기원은,
'교회의 세력을 세상에 미치게 하옵소서'의 기원은 아니다.
먼저 제1로
주의 이름으로서 불리 우는 교회 중에 나라를 임하게 하옵소서의 기원이다.
그 속기를 물리쳐 주옵소서,
그 이상으로 하는 바를 바꾸게 하옵소서,
세상에 아부하는 일없이,
이에 반항하여 이에 이길 수 있기를 원하는 기원이다.
나라의 내림을, 신천지가 구천지에 대신하기를,
새 예루살렘의 예비가 다 되어 하나님의 처소를 나와,
하늘에서 임하시옵기를.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하는…황폐(collapse) 중에 있어서
부활의 새벽을 대망 하는 신자의 기원으로서 이것보다도 간절한 것은 없는 것이다.
제1은 하나님에 대해서의 기원이다.
제2는 피조물, 즉 인류와 우주만물에 대한 기원이다.
그리고 제3이하가 우리들 자신에 대한 기원이다.
그렇지만 '나'에 대한 기원은 아니다.
'우리들'에 대한 기원이다.
나를 복 주옵소서 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들을 복 주옵소서 하는 것이다.
우리들 전체를 복 주옵소서이다.
신자(참된 신자) 전체를 대표해서의 기원이다.
내 일신 위해, 내 가족 위해, 내 구원 위해서라고 하여
나 한 사람 위한 기원은 아니다.
모두 예수를 사랑하고 그의 나타나심을 대망 하는 자위한 기원이다.
성부의 뜻에 합한 기원은 사욕을 전연 벗어난 기원이 아니어서는 안 된다.
그리고 신자의 기원은 신자 자신 위한 기원은 아니다.
성명(聖明)과 나라 위한 기원이다.
'우리들의 일용할 양식을 주옵소서'라는 기원은,
우리로 하여금 생존을 계속하여 인생을 즐기게 하옵소서의 기원은 아니다.
날마다의 양식을 주시어 성명과 주의 나라 위해 일하게 하옵소서의 기원이다.
신자에게 있어서는 생명의 귀함은 이 때문이다.
하나님께 쓰이기 위해, 그 성업을 돕기 위해,
생명은 무궁하게 존귀한 것이다.
그리고 신자의 이 기원에 응답하여 하나님께서 내려주시는 양식은
보통의 양식은 아닌 것이다.
몸을 키우는 양식인 동시에 또 영을 살리는 양식이다.
천국 건설 위한 병량이다.
쌀밥, 밀떡(빵)이기는 하나,
이것을 먹는 자로 하여금 영생에 이르게 하는 양식이다.
그리고 아버지는 신자의 이 기원에 응답하여
풍성히 이것을 주시지 않으랴 이다.
식물(食物)의 결핍은,
이것을 자기 위해 소비하려는 자에게만 있는 것이다.
이 몸이 그 나라 건설 위해 부지되기를 원하는 자에게,
음식물이 끊길 염려 있으랴 이다.
'누가, 군사로 나가, 자기 비용을 쓰는 자 있으랴'(누가 자기 비용으로 군인노릇 하겠는가 (고린도전서 8:7)이다.
하나님의 군사로 나가려는 자는 하나님에게서 양식의 공급을 받는 것이다.
하나님에게서 양식의 공급받기를 기도하여
이것을 얻지 못하는 것은 이것을 자기 위해 소비하려는 때문이다.
이름(성명)과 나라(주의 나라) 위해 일어설 때,
양식의 공급은 확실하다.
교회의 보조를 기다릴 필요는 없다.
하나님은 교회 또는 선교사의 손을 거치지 않고서 곧 우리에게 이것을 주신다.
'우리의 일용양식을 날마다 주옵소서'(3)
오늘은 오늘의 양식을 주옵소서,
내일은 내일의 양식을 주옵소서
월급으로 주어짐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연봉으로서 주어짐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노동자가 날마다 임금을 받듯,
우리들, 주의 이름과 주의 나라 위해 일하는 자에게
일용양식을 날마다 주옵소서.
다만 주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양식이,
하늘에서 내리는 만나처럼 거룩한 것이기를.
그것이,
이 세상의 정부가 정략 위해 주는 더러운 양식이 아니기를.
또는 교회가 교세 확장을 위해주는 위선의 빵이 아니기를.
만약 주의 뜻에 합하시면,
그것이,
우리들 자신 이마에 땀흘려 얻은 노동의 빵이 되기를,
만약 그렇지 않으면, 순수한 사랑의 증여물이기를.
우리들은 악마의 빵을 먹고서 하나님의 성업에 종사할 수는 없는 것이다.
우리들이 먹는 빵의 성질은
드디어 우리들이 종사하는 사업에 감염되지 않기를 바란대도 안 될 수 없는 것이다.
우리들은 거룩한 사업에 종사하면서 이에 성공하기 위해서는
단연 불결한 빵을 물리치지 않을 수 없다.
실로 땅이 소산하는 식물의 양은 많다.
하지만 거룩한 식물의 양은 많지가 않다.
우리들은 기르는 소량의 음식물이라 해도
거룩한 것을 얻고자 할 때,
그 곤란이란 실로 큰 것이다.
이에 있어서,
우리의 일용양식을 날마다 주옵소서의 기원의 필요가
절실하게 느껴지는 것이다.
'어떠한 양식이라도 가하다'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의 종을 기르기에 적합한 양식을 주옵소서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결코 얻기에 쉬운 양식은 아니다.
이 죄의 세상에 있어서 오점 없는 양식을 얻음의 곤란은
황야에 있어서 케케묵지 않은 빵을 얻은 것만큼 그것만큼 곤란하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거룩한 복음 위해 일하려 하는데 있어서,
식물충족의 오늘의 사회에 있대도,
하늘에서 내려 생명을 사람에게 주는 만나를 구하여 마지않는 것이다.
우리들은 교섭을 거듭하여 정부 또는
교회에서 얻을 수 있는 양식과 빵을 필요로 하지 않는 것이다.
우리들은 하나님의 성수에서 나와
곧 우리들의 손에 달하는 기적의 만나를 요구하는 것이다.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