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기도문
성 경: [눅 11:1-4] 예수께서 한 곳에서 기도하시고 마치시매 제자 중 하나가 여짜오되 주여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친 것과 같이 우리에게도 가르쳐 주옵소서
2)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기도할 때에 이렇게 하라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시오며
3) 우리에게 날마다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4)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모든 사람을 용서하오니 우리 죄도 사하여 주시옵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소서 하라.
[눅 11:1] 예수께서 한 곳에서 기도하시고 마치시매 제자 중 하나가 여짜오되 주여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친 것과 같이 우리에게도 가르쳐 주옵소서
▶ 한 곳에서 기도하시고 마치시매 - 마태복음의 경우 '주의 기도'는 산상 수훈에
포함되어 있어 적어도 그 장소는 어느 산 위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누가는 다소 모호한 표현인 '한 곳에서'로 이야기의 서두를 삼고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예수께서 기도하고 있었다는 사실인데,
(3:21 백성이 다 침례를 받을새 예수도 침례를 받으시고 기도하실 때에 하늘이 열리며;
6:12 이 때에 예수께서 기도하시러 산으로 가사 밤이 새도록 하나님께 기도하시고),
이렇게 기도하시는 예수의 모습은 제자들로 하여금 기도에 대한
열심을 지니게 하는 하나의 중요한 동기가 되었음에 틀림없다.
▶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친 것과 같이 우리에게도 가르쳐 주옵소서 - 복음서 안에서 제자들이 기도를 가르쳐 달라서 요청하는 것은 이 곳이 유일한 경우이다.
제자들은 예수께서 기도하는 것을 보자 침례요한이 그의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쳐 준것이 생각나 자기들에게도 기도를 가르쳐 달라고 한다.
당시 어떤 종교공동체(宗敎共同體)에서 지도자들이
기도를 가르치는 일은 일반적인 것이었다.
랍비들은 자기의 제자들에게 기도문을 만들어 준 일이 있었고(Farrar, Plummer),
또한 일반 유대인들도 정시에 일정한 형태의 기도문으로 기도를 하였다.
(행 10:2-3 그가 경건하여 온 집안과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며 백성을 많이 구제하고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더니
3) 하루는 제 구 시쯤 되어 환상 중에 밝히 보매 하나님의 사자가 들어와 이르되 고넬료야 하니,
9 이튿날 그들이 길을 가다가 그 성에 가까이 갔을 그 때에 베드로가 기도하려고 지붕에 올라가니 그 시각은 제 육 시더라).
이러한 상황에서 제자들은 예수를 중심으로 하는 그들의 공동체를
특징 지워줄 수 있는 기도를 원했던 것이다(Jeremias).
[눅 11:2]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기도할 때에 이렇게 하라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시오며
▶ 이렇게 하라 - 예수께서는 제자들의 요청에 즉각적으로 응답하신다.
본문을 영원불변의 기도형으로 생각해서 마치 주문(呪文)을 외듯이
반복하라는 말씀으로 받아서는 안 될 것이며,
기도가 담고 있어야 할 최소한의 내용과 그 기도가
지향하는 바가 무엇이어야 하는가에 대한 하나의 모범을 제시하는 것으로
이해함이 마땅하다.
그것은 예수께서
'이것을'(what) 기도하라 하신 것이 아니라
'이렇게'(how) 기도하라 하신 것에서도 잘 드러난다.
▶ 아버지여 - 이 호칭은 예수께서 기도하실 때 사용했던 것으로
하나님과 예수의 관계가 마치 부모와 자식간의 관계처럼
다정하고 친밀한 것임을 나타낸다.
(10:21 베드로가 내려가 그 사람들을 보고 이르되 내가 곧 너희가 찾는 사람인데 너희가 무슨 일로 왔느냐).
이제 예수는 제자들도 그런 의미에서 이 칭호를 사용하라고 하신다.
이는 예수를 따르는 자들이 예수를 통하여 하나님과
새롭게 갖게되는 관계가 어떠한 것인가를 말해준다.
(요 20:17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붙들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아니하였노라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 하시니;
롬 8:14-17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15)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
16)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
7)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
한편 평행 본문인 마태복음에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마 6:9)로 되어 있어 형식에 있어서
더 세련되고 완벽한 형태를 보여 주고 있다.
▶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 이 부분은 마태복음과 일치한다.
(마 6:9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성경에서 이름은 그 사람의 인격과 존재 자체를 표현한 것이니만큼
여기서 '이름'은 하나님 자신을 뜻한다.
결국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는다는 것은
하나님이 거룩히 여김을 받는다는 의미이다.
이것은 하나의 기원(祈願)이자 경외심에서 기인하는
하나님께 대한 찬양이기도 하다.
또한 본 구절의 표현이 수동태로 되어 있는 것은
하나님 스스로 자신의 이름을 높인다는 의미가 아니라
기도하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높여 드리겠다는
신앙의 표시이자 하나의 서약이라고 할 수 있다.
(레 22:32 너희는 내 성호를 속되게 하지 말라 나는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거룩하게 함을 받을 것이니라 나는 너희를 거룩하게 하는 여호와요;
시 79:9 우리 구원의 하나님이여 주의 이름의 영광스러운 행사를 위하여 우리를 도우시며 주의 이름을 증거하기 위하여 우리를 건지시며 우리 죄를 사하소서;
사 8:13 만군의 여호와 그를 너희가 거룩하다 하고 그를 너희가 두려워하며 무서워할 자로 삼으라;
29:23 그의 자손은 내 손이 그 가운데에서 행한 것을 볼 때에 내 이름을 거룩하다 하며 야곱의 거룩한 이를 거룩하다 하며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경외할 것이며).
동시에 이 기원은 기도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모독하고 거역하여 하나님 앞에서 죄악을 범하지 않고
온전히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을 가지고 예배(worship)하며
영광을 돌릴 수 있는 형편을 허락해 달라고 하는 간구이기도 하다.
▶ 나라이 임하옵시며 - 하나님의 의로운 통치가 지배하는 나라가
임하게 되는 것은 하나님의 이름이 높이어 지는 것에 상응하는 인간에 대한 축복이다.
이것은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는 측면에서 종말론적 성취를 대망하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가 사단의 통치의 종식(終熄)을 뜻한다는 의미에서
이 나라는 예수와 그의 제자들에 의해 이미 성취되기 시작한 것이다.
(9:1 예수께서 열두 제자를 불러 모으사 모든 귀신을 제어하며 병을 고치는 능력과 권위를 주시고;
10:17 칠십 인이 기뻐하며 돌아와 이르되 주여 주의 이름이면 귀신들도 우리에게 항복하더이다).
따라서 본문의 말씀도 성도들이 단지 미래에 성취될
종말론적 하나님의 나라만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 현재적 삶에서
하나님의 뜻이 개인과 사회 속에서
구체적으로 성취되어지는 것을 바라며,
또한 실제로 경험하며 살게 해달라는 간구로 보아야 한다.
[눅 11:3] 우리에게 날마다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 여기서부터 시작되는 두 번째 부분은
개인적인 필요를 구하는 내용이다.
본문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일용할'(에피우시온)이라는 형용사의 해석이 난해하다는 것이다.
이 말은 여기에서만 사용되었기 때문에
다른 곳에서 사용된 범례(凡例)를 참고할 수도 없으며
그 의미도 여러가지로 해석된다.
(1) '내일을 위한'이란 의미.
그러나 문맥상 '내일'이 아니라 현재의 필요를 요청하는데 초점이 있는 만큼,
이 해석은 저녁에 기도하는 경우에만 적합하다고 할 수 있다.
만약 이 단어가 종말론적이고 영적인 의미로 해석된다면
'내일'은 종말론적 완성의 때를 가리키며
'양식'은 완성된 하나님의 나라에서 먹을 영적인 양식을 뜻한다고 할 수 있다.
한편 마태복음에 기록된 '오늘날'(6:11)은 그 미래의 양식을
'오늘' 허락해 달라는 간구로 이해할 수도 있다.(Liefeld).
(2) '필요한' 또는 '충분한'이라는 의미.
이렇게 되면 본문은 "날마다 충분한 양식을 주옵시고"가 되어
비교적 자연스러운 문장이 된다.
예수 당시의 날품팔이 노동자들에게 있어 매일 매일 필요한 양식을
공급받는다는 것은 매우 절실하고 중요한 일이었으며,
(마 20:1-5 천국은 마치 품꾼을 얻어 포도원에 들여보내려고 이른 아침에 나간 집 주인과 같으니
2) 그가 하루 한 데나리온씩 품꾼들과 약속하여 포도원에 들여보내고
3) 또 제삼시에 나가 보니 장터에 놀고 서 있는 사람들이 또 있는지라
4)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도 포도원에 들어가라 내가 너희에게 상당하게 주리라 하니 그들이 가고
5) 제육시와 제구시에 또 나가 그와 같이 하고),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를 지날 때
매일 매일 필요한 양식을 하나님께로부터 얻었다는 사실은,
이 신앙의 근거가 된다.
(출 16:4 그 때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서 양식을 비 같이 내리리니 백성이 나가서 일용할 것을 날마다 거둘 것이라 이같이 하여 그들이 내 율법을 준행하나 아니하나 내가 시험하리라;
신 8:9 네가 먹을 것에 모자람이 없고 네게 아무 부족함이 없는 땅이며 그 땅의 돌은 철이요 산에서는 동을 캘 것이라)
육체적인 양식이든 영적인 양식이든 그것을 공급하시는 분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이심을 믿는 신앙은 매우 중요하다.
[눅 11:4]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모든 사람을 용서하오니 우리 죄도 사하여 주시옵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소서 하라.
▶ 용서하오니 우리 죄도 사하여 주시옵고 - 여기서 '죄'(하마르티아)는
아람어 '호바'(hoba)를 번역한 것인데 이 말은 '빚'이라는 의미도 갖는다.
이에 근거하건대 '죄'란
하나님께 '빚' 또는 '부채'를 지는 것이라고 생각해 볼 수 있다.
즉 죄를 범한 사람이란 하나님께 응분의 대가를 치러야 할 '채무'를 지는 사람이다.
그런데 이 빚을 탕감받기 위해서는 최소한의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하는 바
그것은 나에게 빚진 자를 탕감해 주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용서해주는 것이
하나님께 빚진 나의 채무를 필연적으로 탕감되도록 하는 담보는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하나님께 빚의 탕감을 조심스럽게 간구할 수 있는
최소한의 전제가 되는 것이다.
▶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소서 - 여기서 '시험'(페이라스모스)은
'유혹'(temptation, NIV)이라는 의미로 해석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이 말의 의미는 성도의 신앙을 꺾으려는 외적인 시련과
죄를 범할 수 있는 내적 유혹을 함축적으로 포괄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일단 시험은 불가피한 것으로 여겨지므로
중요한 것은 그 시험을 견디어내는 것이다.
본문은 우리로 하여금 시험에 들게하는 주체가
하나님인 것으로 오해의 여지를 남기나
약 1:1-15에 의하면 하나님은 결코 성도들을 시험에 빠지게 하시는 분이 아니다.
(약 1:1-15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 야고보는 흩어져 있는 열두 지파에게 문안하노라
2)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3)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4)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5)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6)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7)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
8) 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로다
9) 낮은 형제는 자기의 높음을 자랑하고
10) 부한 자는 자기의 낮아짐을 자랑할지니 이는 그가 풀의 꽃과 같이 지나감이라
11) 해가 돋고 뜨거운 바람이 불어 풀을 말리면 꽃이 떨어져 그 모양의 아름다움이 없어지나니 부한 자도 그 행하는 일에 이와 같이 쇠잔하리라
12)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나니 이는 시련을 견디어 낸 자가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이기 때문이라
13) 사람이 시험을 받을 때에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
14)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15)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물론 때로는 그분의 선한 뜻을 펴시기 위해 시험을 허락하기도 하지만,
(4:1-12 예수께서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요단 강에서 돌아오사 광야에서 사십 일 동안 성령에게 이끌리시며
2)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시더라 이 모든 날에 아무 것도 잡수시지 아니하시니 날 수가 다하매 주리신지라
3) 마귀가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이 돌들에게 명하여 떡이 되게 하라
4)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기록된 바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하였느니라
5) 마귀가 또 예수를 이끌고 올라가서 순식간에 천하 만국을 보이며
6) 이르되 이 모든 권위와 그 영광을 내가 네게 주리라 이것은 내게 넘겨 준 것이므로 내가 원하는 자에게 주노라
7) 그러므로 네가 만일 내게 절하면 다 네 것이 되리라
8)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기록된 바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
9) 또 이끌고 예루살렘으로 가서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여기서 뛰어내리라
10) 기록되었으되 하나님이 너를 위하여 그 사자들을 명하사 너를 지키게 하시리라 하였고
11) 또한 그들이 손으로 너를 받들어 네 발이 돌에 부딪치지 않게 하시리라 하였느니라
12)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하였느니라;
욥 1:12 여호와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내가 그의 소유물을 다 네 손에 맡기노라 다만 그의 몸에는 네 손을 대지 말지니라 사탄이 곧 여호와 앞에서 물러가니라)
본문은 성도가 시험에 부딪쳤을 때 굴복하지 않도록 해달라는 간구인 것이다.
이것은 마 6:13의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라는 표현에서도 잘 드러난다.
한편 마태복음에는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이라는 송영구가 있으나,
권위있는 마태복음 사본 가운데 기록되어 있지 않은 것도 있어
이것이 본래적인(original)것인지에 대해서는 확실히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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