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리새인의 누룩
누가복음 12장 1-12절
'예수께서 그 제자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바리새인의 누룩을 경계하라'(12:1-이하일역)
사람의 누룩은 그 주의(主意)이다.
소량의 누룩이,
그 가운데 다량의 맥분을 발효케 하는 힘을 갖추고 있듯,
사람의 주의는 그 행위의 전부를 지배한다.
사람은 그 행위행동에 있어서, 모두 그 주의 대로이다.
그는 실로 그 회포(회태 a conception)하는 주의의 화신(현현)이다.
'위선'은 바리새인의 주의였다.
바리새인이란 위선의 화신이었다.
그가 말하는바 행하는 바는 모두 이 주의가 발동된 것이었다.
위선이란 물론 표리의 별 있는 것이다.
밖(겉)의 장식으로서
안(내부)의 부식(부패)을 가리는 일이다.
즉 그리스도의 말씀하신 '회칠한 무덤'이다.
(마태복음 23:27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
칼(검 a sword)을 품속에 감추고서,
입에 감로(nectar; honeydew)를 공궤 하는 일이다.
특히 종교의 선미로써 정치가의 야심을 가리는 것이다.
소아의 천진무구(innocence)를 절애 하신 예수는,
바리새인의 위선을 증오하여 마지않았다.
'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긴 것이 알려지지 않을 것 없다'(2)
이는 은혜 깊은 천연의 법칙이다.
세상에 영구히 은폐(concealment)되는 일이란 없다.
은폐는 모두 잠시 적이다.
혹은 3년, 혹은 5년, 혹은 10년, 혹은 20년,
그 긴 것은 때로 혹은 300년에 달하는 일 있다.
하지만 진상이 반드시 드러나는 것은,
물이 낮은 데로 불티가 위로 오름 같이 확실하다.
참 사람은 참 사람으로서 나타나고,
위인은 위인으로서 나타난다.
이는 다만 시간의 문제이다.
오해는 잠시 적이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우주에 있어서,
영구적인 오해라는 것은 없다.
'이러므로, 너희가 어두운 데서 말한 것은 밝은 데서 듣게 될 것이다. 골방에서 귀에 대고 속삭인 말은 지붕 위에서 널리 퍼지리라'(3)
어두운 데서 말한 것은,
말 그대로 축음기로서 전해지듯 전해질 것이다.
하지만 그것보다도 훨씬 명료한 말로서
혹은 말보다 더 훨씬 확실한 사적으로서,
뭇 사람의 눈에 뜨이고 만인의 귀에 울려 퍼질 것이다.
주의는 말을 내고, 또 품성을 만든다.
그러므로 말로서는 전해지지 않는 주의도,
품성으로서는 사람의 인식하는 바로 된다.
주의는 언제나 이것을 감쌀 수 없다.
말로서 전해지지 않는대도,
행위로서 드디어 천하에 퍼질 것이다.
현세에 있어서 그렇다.
내세에 있어서는 더욱 그렇다.
천년도 하루 같이 보시는 하나님의 안중에,
은폐내밀의 비사 없다.
내세는 현세를 다시 더 연장한 것이다.
그리고 현세 이미 명확한 하나님의 재판이다.
내세 어찌 오(誤)보다 나은 명단(명 판결 clear judgement)없이 그대로 가하랴!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말씀하시기를,
위선주의에 따르지 말라, 그것은,
즉 그 목적을 달성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라고.
하나님의 본성과 우주의 구조를 아는 자는,
그 양심에 호소할 것도 없이,
그 상식에 비추어,
위선의 무익함을 알기 때문에,
이것을 그 생애의 주의로 않아야 할 것이다.
'내 친구여,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신체를 죽이고 후에 아무 것도 알 수 없는 자를 두려워 말라'(4)
'내 친구여' 적인 바리새인과 상대(대립)하여 말한다.
나와 주의를 같이 하는 자여,
위선 주의를 신봉치 않는 자여.
두려워 말라는 것은,
신체(몸)을 죽이는 외에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자이다.
즉 세상의 잔학(殘虐)자 같은 것이다. 그들은 맹수류이다.
사람의 산업(재산)을 노략(plunder)하고,
그 생명을 빼앗는 외에,
그 이상의 것을 할 수 없다.
그들은 생명여탈의 권을 잡는 것으로서 인간지대의 권능이라고 사유한다.
하지만도 그들은 오인이 가장 두려워해야 할 자가 아니다.
세상에는 그들보다도 더 두려워해야 할 자가 있다.
'내가 두려워 해야 할 자를 너희에게 보이리라.
죽인 후에 지옥에 던지는 권위를 가진 자를 두려워하라.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를 두려워하라'(5)
두려워할 자는 악한 사람이 아니다. 악한 주의이다.
악학의 왕도 그 행할 수 있는 바는 백성의 생명을 빼앗는데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누악(vileness)한 주의에 이르러서는
그 행하는 바 영원에 이르러도 소멸되지 않는다.
악한 주의는 영혼을 해독하여 미래 영겁에 미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거듭하여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를 두려워하라'고.
'다섯 마리의 참새는 한 앗사리온에 팔리는 것 아닌가?
그런데 하나님께 있어서는 그 하나도 잊어버리시는 일없다.
너희의 머리털도 모두 계수 하신다. 그러므로 두려워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더 귀하다'(6-7)
두려워 할 이를 두려워하고, 두려워 말 자를 두려워 말라.
사람이 있어,
만약 내 이름 때문에 네 생명을 빼앗으려 하는 자가 있으면 이것을 두려워 말라.
한 마리의 참새까지도 하나님의 허락 없이 땅에 떨어지는 일없다.
하물며 너랴!
하나님의 윤허(royal permission)없이 누구라도 네 생명에 손 댈 수 없다.
하나님은 네 머리카락 수까지도 모두 다 아시고, 또 이것을 지키신다.
하물며 네 전신이랴!
하나님은 비상한 이유 없이, 이것을 네 적의 손에 붙이지 않으실 것이다.
네 생명은 하나님의 것이다.
하나님이 이것을 네 손에 요구하시기까지는,
누구도 이것을 네게서 빼앗을 수 없다.
너는 이것을 깊이 마음에 두고,
두려워 할 것 없는 사람의 손에서 벗어나기 위해 두려워 할 위선 죄를 범하고,
네 신앙을 사람 앞에 숨겨 하나님과 자기를 속이며,
그리하여 지옥에 던져지는 불행에 빠지는 일이 없도록 하라고.
'또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나를 사람 앞에서 안다고 하면 인자도 또한
하나님의 사자 앞에서 이를 안다고 하리라
나를 사람 앞에서 모른다고 하는 자는, 하나님의 사자 앞에서 그도 모른다 할 것이다'(8-9)
그리스도께서 아신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휴식(안식)에 들어가는 일이다.
이에 반하여, 그가 모른다고 하게 되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쫓겨나 밖 어두운데 던져지는 일이다.
(누가복음 13:28 너희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모든 선지자는 하나님 나라에 있고 오직 너희는 밖에 쫓겨난 것을 볼 때에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그리고 이 세상에 있어서, 그리스도를 안대도,
세상의 박해희소를 두려워하여, 위선 죄를 범하고,
그를 모른다고 하는 것은,
끝 날의 재판 날에 있어서,
그도 역시 그리스도에게 모른다는 말을 듣게 되리라는 것이다.
필요한 경우에 있어서의 신앙의 표백은 위선주의의 비인이다.
이것을 하지 않음은(위선주의 배격을 잃음은)
아직 바리새의 누룩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세속의 방편에 따라,
내 충심의 신앙을 은폐하는 결과,
마침내 이것을 잃어버려,
하나님 앞에서 추방되지 않도록 삼가야 할 것이다.
'무릇 인자를 비방하는 자는 용서받으리라.
하지만 성령을 욕설하는 자는 사함 받지 못할 것이다'(10)
'인자'는 물론 인류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를 비방한다는 것은, 그를 알지 못하면서 비방함이다.
미신자의 비방이라는 것은 거의는 이런 유이다.
그리고 그리스도는 이런 유의 비방 자에 대하여 말씀하신다.
'내 이것을 용서할 것이다'라고.
하지만 성령을 욕설하는(더럽히는 것 아니라)자는 전혀 이것과 다르다.
'성령을 욕설한다'는 것은,
그 음성을 억압하고, 그 명에 저항하고, 그 광명을 차단하는 일이다.
그리고 이를 행하여 계속하면
성령은 마침내 이를 행하는 자의 마음을 떠나기에 이른다.
성령은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주시는 최선최미의 은사이다.
그리고 그 철회(거둬들임 withdrawal)는 생명의 치탈(빼앗아 들임)과 같다.
'사함 받지 못할 것이다'란, 구원받지 못할 것이라는 말과 같다.
우러러 존경해야 할 성령을 욕설(abuse)하고,
그 음성을 소멸하여 자신의 뜻을 펴려하는 자는,
마침내 성령의 버린 바로 된다.
사면의 희망이 그러한 자에게 있을 수 없다.
성령이 온전히 그를 떠나 버린 그 때에,
그는 이미 그의 죄를 판정 받는 것이다.
관대한 예수는, 자유로, 또한 쾌히,
그를 부지중에 비방한 것을 용서하신다.
그러므로 우리들도 또 그(예수)를 본받아,
우리의 신앙이 무엇인지를 해득하지 못하여
우리를 비방하는 자는 자유롭게 또는 쾌히,
이것을 용서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가장 가련한 자는,
그리스도가 어떤 이신지를 지각하고 (즉 성령의 광명을 얻고),
그런 후에 그를 비방하며, 또는 그를 버리는 자이다.
그러한 자에 대하여 사도 베드로가 한 말은 과격이 아니다.
즉 다음과 같다.
'그들이 의의 길을 알고도 그 전해진 바의 거룩한 계명을 버리는 것보다는,
차라리 의의 길을 알지 못했던 편이 나았을 것이다.
개, 돌아와서 그 토한 것을 먹고,
돼지, 씻어 깨끗해진 후 다시 진흙탕에 뒹군다고 하는 속담은
그들에게 들어맞았도다'(베드로후서 2:21-22일역)
'사람이, 너희를 회당, 또는 관리, 또는 권세 있는 자의 앞에 끌고 가면,
어떻게 대답하고 무엇을 말할까고 염려하지 말라.
그 때에 할 말은 성령께서 너희에게 가르쳐 주실 것이다'(11-12일역)
그리스도 신자는 회당 또는 집정(집권관리)
또는 권세 있는 자 앞에 끌려 갈 것이라고 한다.
그는 즉 그의 신앙 때문에, 종교가 및 정치가의 박해를 받을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그러한 경우에 처하여,
그는 미리 답변의 말을 만들어 둘 필요는 없다.
대저 성령에 거슬리지 않는 그는 그때에 귀한 성령의 원조를 받을 것임으로라고.
바리새의 위선주의를 배척하고,
옳은 것을 옳다하고 아닌 것을 아니라 하며,
사람을 두려워 않고 죄를 두려워하고,
분연(resolute) 그리스도를 위해 서는 때는,
우리가 아무 것도 두려워할 것 없다.
하나님은 우리의 몸을 지키시고,
그 영으로서 우리에게 지혜의 말씀을 주시며,
우리로 하여금 죽지 않을 곳에서 죽지 않게 하시고,
사리에 궁하여 패를 취하는 일이 없게끔 하신다.
실패는 언제나 이심에서 온다.
단심으로써 하나님께 쓰일 때,
공포 없다. 패배 없다.
*내촌감삼의 (1904년 8월 '성서지연구')를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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